77화.
“제국의 늙은이에게 보내는 건 나를 죽이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했어. 그래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데. 뭐, 여기까지만 말하지.”
즉시 체포를 막기 위해 결국엔 자신이 했다는 단언은 끝까지 하지 않았더라도, 이 정도면 다니엘은 모든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다니엘이 아셰에게 사실은 분노할 수 없었던 이유는, 자신이 아셰 입장이어도 완벽한 살인 방법과 알리바이만 확보된다면 그렇게 행동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애초부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서로 죽고 죽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도록 배운다. 왕조의 역사는 반역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형제가 나라를 이끌기에 너무 포악하다 생각하면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새로울 것도 없는 사실이다.
“다니엘, 네 왕좌는 결국 너만의 것이지만…….”
최종 재판은 말할 것도 없이 다니엘의 승리로 끝났고, 다니엘은 대관식을 앞두고 있었다.
“이 모든 비극은 결국엔 왕이 아니면 외국인과 결혼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제약 때문이야. 이 제약은 없애. 특히나 내가 여자로 태어나고 싶어서 여자로 태어났니? 나도 내 나라에서 살 수 있는 권리 정도는 있었으면 좋겠어.”
“그건, 아메탄처럼 왕족끼리의 암투를 인정하는 나라에서 혼약으로 다른 왕족들에게 힘을 실어 주면 내전까지 갈 수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만든…….”
“억지로 제약해 봤자 이런 결과밖에 더 되니?”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다니엘은 마음이 갑갑해졌다. 형제 넷 중 하나는 죽고, 하나는 집행 유예 판결을 받아 궁에 감금되어 있고, 하나는 자신의 비를 살해하여 감옥에 갇혀 있다. 생각하지 못한 왕좌에 생각하지 못한 책임감이다.
“하지만 넌 좋은 왕이 될 거야.”
아셰가 그런 그의 파란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적어도 그 자리의 무게를 알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이니까.”
“한 걸음 한 걸음이 무섭다는 건 사실이지.”
다니엘이 천천히 일어섰다. 그는 언제나 바빴다. ‘의심의 기간’이 선언되고 나서 하루하루가 늘 일정으로 꽉 차 있었다. 한 번도 왕의 자리를 생각해 보지 않다가, 그 자리에 앉으려다 보니 상당히 많은 양의 일을 소화해야 했기 때문이다.
“리젠은…… 깼어?”
“아직. 하지만 어의 말로는 곧 깰 수 있을 거라고 해. 그동안 너무 무리가 심했다고 하네.”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차인 기분은 어때?”
아셰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카이든이 흑마법을 막지 못했는데도, 다니엘은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고 멀쩡했던 것이다. 그 사실이 말하는 건 단 하나뿐이었다. 리젠과 다니엘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온 사람들 앞에서 명시한 셈이었다. 다만 아셰는 다니엘의 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리젠의 마음이 떠났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마음은 변하는 거니까.”
다니엘이 씁쓸하게 웃었다.
“원래 날 좋아했었다며. 그럼 다시 돌아올 수도 있겠지. 내가 잘하면.”
“그래서 네 궁에 데리고 있는 거야? 집에도 안 보내고?”
“카이든도 흑마법에서 날 살린다는 핑계로 그녀를 데리고 있었어. 나도 이 정도는 해도 되는 것 아니야?”
“그래도…… 카이든을 그렇게 보내 버리면…….”
“그였어도 이 상황에서 양보하지 않았을걸.”
“이건 양보의 문제는 아니고…… 난, 잘 모르겠다.”
아셰가 어깨를 으쓱했다.
“리젠이 깨면 내게 보내 줘.”
그 말에, 아셰의 궁을 떠나려고 재킷을 다시 걸치고 있던 다니엘은 멈칫하여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다니엘의 순간적인 망설임을 보고 아셰가 한숨을 쉬었다.
“걔가 살아온 삶에서는 당연한 결정이야. 원망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만, 어느 정도 이해는 해. 만나자는 말은 내가 먼저 해야 할 입장이잖아?”
“……괜찮겠어?”
“어차피 한 번은 만나야 해.”
“하지만…….”
“그 애는 르엘라의 조카야. 난 그걸 잊지 않고 있으니 걱정 마.”
리젠이 눈을 떴을 때, 익숙하지 않은 화려함에 그녀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줄 알았다. 천장에 반짝이는 샹들리에가 별빛처럼 빛나고, 자신을 감싼 이불은 바스락거리지 않을 정도로 포근했다. 그녀가 끙끙대며 몸을 일으키자, 그녀의 옆에서 물을 따르고 있던 시녀가 황급히 부축하더니 다른 시녀를 불러 그녀가 깨어났음을 알렸다.
“……궁이군요.”
리젠이 한 번 주위를 둘러보고, 조심스럽게 중얼거렸다. 어떻게 되었는지 몰라도, 꽤 오랫동안 씻지 못한 것 같았는데 몸은 깨끗했고 실크 가운까지 걸치고 있었다.
“예. 다니엘 전하께서는 대관식 이후 태하람궁으로 거취를 옮기셨고, 리젠 하카트 양은 원래 전하께서 왕자 시절 쓰시던 궁에서 어의의 보살핌을 받으며 머무르셨어요.”
“대관식…… 결국 왕이 되셨군요. 제가 얼마나 정신을 잃었었던 거죠?”
“일주일이요.”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그날 이후 일주일…… 최종 재판이 어떻게 끝났는지 눈으로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모든 것이 잘된 것은 틀림없었다. 그녀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 달려오던 카이든을 멀리서 확인한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와 제대로 대화도 하지 못했다. 원래는 차근차근 수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정말 말도 안 되게 급박한 상황에서 끝까지 설명도 하지 못하고 일이 여기까지 와 버렸다.
“리젠!”
시녀에게 소식을 듣고 왔는지, 다니엘이 급하게 뛰어왔다. 리젠은 눈을 깜빡이며 왕관을 쓴 그를 바라보았다.
“일어났구나. 다행이야.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
“예…… 괜찮아요.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왜 여기에…….”
“최종 재판에서 쓰러졌는데, 생각보다 몸 상태가 많이 안 좋아서…… 내가 어의에게 보여 주고 싶다고 했어.”
리젠은 머뭇거리다가, 결국엔 가장 궁금한 것을 물었다.
“카, 카이든은…….”
다니엘의 눈에 순간 실망감이 스쳐 지나갔지만, 미소를 잃지 않고 대답했다.
“약제국 직원에게 정식 절차를 밟지 않고 수사 과정을 공유한 점, 성분 분석을 개별적으로 의뢰한 점 등 때문에 징계를 받았어. 비율을 너와 정해야 했었는데…… 네가 정신을 잃은 바람에 카이든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100% 자신이 받기로 했거든.”
“……징계요?”
“그래도 내가 개별적으로 네게 부탁한 것 등등이 반영돼서 그냥 간단한 정직 처분으로 끝났어. 정직 한 달 처분이 나왔는데, 부모님 묘지에 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그 참에 고향에 가 있으라고 했어. 어차피 지금 수사국 숙소에 머무르고 있는데, 정직 처분이 나오면 거기 계속 있는 것도 안 되니까.”
“호, 혹시…….”
리젠이 이불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제게 전하고 싶어 하는 말 같은 건…….”
“리젠.”
다니엘이 씁쓸하게 웃었다.
“넌 정말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구나. 눈 뜨자마자 카이든만 찾고…….”
“아, 맞다…… 경하, 경하드립니다, 전하.”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억지로 몸을 일으키자, 다니엘이 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하대.”
“아…….”
“리젠.”
“……네?”
“어쨌든 카이든은 떠났고, 한 달 동안은 안 돌아와.”
리젠의 멍한 눈을 보고, 다니엘이 그녀의 손을 들어 이불 속에 조심스레 넣어 주었다.
“넌 그동안 여기서 몸조리해. 회복에 시간이 좀 걸릴 거라고 어의가 그랬어.”
“아닙니다. 정신이 든 이상 집에 돌아가겠습니다.”
“어차피 보던 의원이 계속 보는 게 나아. 어의를 출장 보낼 셈이야?”
“하지만…….”
“기력 회복할 때까지만이라도 있어. 그리고 그동안…… 나한테도 기회를 줘 봐.”
리젠은 뭐라고 대답하려다가, 머리가 핑 돌아 잠시 이마를 짚었다.
“세상의 모든 값진 것들을 줄게.”
“전하.”
그녀가 머리가 어질어질한 가운데에서도 한숨을 쉬며 말했다.
“왕좌 앉으신 지 얼마나 되셨다고 그런 기득권의 말씀을…… 투표했던 산하기관 직원들이 들으면 기함하겠어요.”
대화를 피하고 싶거나 속을 들키고 싶지 않을 때 습관처럼 던지던 농담이 튀어나온 것이었다.
“리젠, 너무 힘들면 다시 누워. 괜찮아.”
다니엘이 유쾌하게 웃었다. 리젠은 무거운 머리를 어쩌지 못하고 베개 위에 쓰러지며 실눈을 뜨고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요?”
“테스티와 루벤은 감옥에 있어. 루벤은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이 인정됐고. 자신의 비를 죽인 루벤은…… 음…… 원칙상 왕가 내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이니 왕족들끼리 결정하면 돼. 하지만 테스티는 얘기가 달라. 왕족이 아니라 일반인을 그렇게 많이 죽인 건…… 용서할 수 없는 죄목이야.”
“어…… 그래서요?”
“일단은 감옥에 두고…… 모든 면회를 다 강제로 받게 하고 있어. 지금 그녀에게 저주를 퍼붓고 분노를 표출하려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어. 매일같이 하루 종일, 새로운 사람들이 그녀에게 오물을 퍼붓고 욕을 하며 지나가. 그 절차가 모두 끝나면 교수형이 결정되겠지.”
두통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눈을 감는 그녀의 야윈 몸 위로 이불을 덮어 주며 다니엘이 말했다.
“일단 쉬어. 어의가 그러는데 네 몸 상태가 정말로 말이 아니래. 편히 있어.”
“……감사합니다, 전하.”
“기력을 찾으면…… 아셰가 들러 달라고 전해 달랬어.”
리젠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어쨌든 아셰는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다니엘이 한숨을 쉬고 이불 위를 톡톡 두드려 주었다. 리젠은 한숨을 한 번 쉬고, 다시 의식을 잃었다.
“재밌었어?”
카이든의 차가운 표정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리젠은 그 무표정을 알고 있었다. 학창시절 내내 보던 무뚝뚝한 표정과 눈빛이다. 산장에서 그녀를 안고 따뜻함을 속삭이던 그 눈빛과는 전혀 달랐다. 그러나 사실은 6년 동안 보아 왔던, 그래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 차가운 눈빛을 보고 리젠은 숨이 막혀 오는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진짜 재미있었겠다. 꿈속에서 나는 짐승같이 너한테 달려들었는데, 그런 것들 다 숨긴 채로 자제력 있는 척했던 내가 얼마나 웃겼겠어? 미친놈같이 네게 매달리던, 제발 마음 좀 열어 달라고 빌던 내가 정말 우스웠겠네.”
“아니야.”
리젠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고, 오해야.”
“다니엘이 아닌 내가 그 약을 마셔서 얼마나 실망했어? 약 한번 잘못 먹이고 엄한 놈이 꼬여서 귀찮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