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76/256)

76화.

리젠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가만히 서 있었다.

“그게 중요한가요? 어떻게든 테스티 왕비나 루벤 왕자가 죽였겠죠. 스잔나 왕비도 죽이고, 다니엘 왕자님도 죽이려던 여자가 당연히 윌리엄을 안 죽였겠습니까?”

귀족 중 하나가 소리를 질렀다. 사실 다들 6년 전의 화재에 대한 충격이 너무 커서 윌리엄 태자의 죽음에 대해 잊고 있었다. 이 ‘의심의 기간’이 윌리엄 태자의 죽음 때문에 시작되었지만, 너무나 확실한 악역 때문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카이든 역시 너무 급박하게 이루어지는 습격 때문에 윌리엄의 죽음에 대해서는 밝힌 바가 없었고, 사실 더 이상 세울 수 있는 가설도 없었다. 그저 왕위가 탐이 나서 윌리엄 역시 그 가운데에 제거되었을 것이라는 추론만 할 뿐이었다.

리젠은 숨을 몰아쉬었다.

‘사람의 특성을 믿지 말고, 결론을 정해 둔 뒤 일을 시작하지 말 것.’

테스티가 ‘의심의 기간’ 중 그토록 당당했던 이유, 사실은 다니엘의 정치력 외에는 그다지 경계하지 않았던 이유. 사실은 리젠과 카이든, 윌리엄 모두 당연히 테스티가 윌리엄을 죽였을 것이라고 결론을 정해 둔 뒤 일을 시작했다.

‘진실은 하나이고 사람의 생각은 오류가 가능하므로, 보고 싶은 것만 보며 멀쩡한 증거를 외면하지 말 것.’

리젠의 시선이 왕족의 자리에 앉은 로즈리와, 그녀의 어린 딸인 지젤을 향했다. 지젤은 아버지 없이 클 것이다. 금슬이 좋았다던 로즈리는 평생 남편을 그리워하며 살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슬픔은 어디에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카이든이 위험하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리젠의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회상해 보면, 리젠은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범인 선상에 사건으로 인해 이익을 보는 사람을 올리되…….’

그녀가 심호흡을 했다. 지금 자신이 이브나석에 서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수사하는 자가 모든 것을 알 수 없음을 명심할 것.’

수사하는 자들 중에서, 자신 혼자만 알 수 있었던 사실.

‘어쨌든 진실은 하나뿐이야. 어떠한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진실이 이끄는 대로 걸어가. 네가 그러고 싶지 않을 때라고 해도.’

그 어느 따뜻했던 밤, 카이든의 말을 떠올리며 리젠은 확실히 마음을 정했다. 만일 르엘라가 그러고 싶지 않았더라도 루벤에게 모든 진실을 밝혔더라면 이러한 비극을 모두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한순간 눈을 감으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올 수도 있다. 그녀는 끝까지 진실을 말해 버려서 결국엔 카이든이 차갑게 뒤를 돌아섰지만, 그래도 후회하지 않았다. 리젠은 진심으로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윌리엄 태자 마마는 테스티 왕비 전하와 무관합니다.”

리젠은 자신도 모르게 왈칵 눈물을 쏟으며 말했다. 처음으로 본 두 살배기 아기, 지젤의 푸른 눈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요?”

로즈리가 그녀를 보고 외쳤다.

“그럼 도대체 누가…….”

순간 리젠의 머릿속에 수많은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리젠은 만일 영혼을 만질 수 있다면, 지금쯤 자신의 영혼은 더 너덜너덜해질 것도 없이 헤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 모든 것이 해결되고 있는데 모든 것이 더 힘들어지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말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말해야만 하는 리젠의 손이 덜덜 떨렸다.

“윌리엄 태자 마마는 대체 누구에게 살해당하신 건가요?”

리젠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로즈리는 지금까지, 그 어떤 것보다 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 누구의 관심에서도 멀어진 윌리엄을 시해한 정확한 범인을 알기 위해 이 아수라장에서 버티고 있었을 것이다. 리젠은 결국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아셰…… 왕녀님…….”

모두의 표정에 경악이 스쳐 지나갔다. 다소 술렁이던 장내가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배에 힘을 주고 힘주어 말했다.

“윌리엄 태자 마마는 아셰 왕녀님의 차를 마시고 독살당하셨습니다.”

이브나석에서, 가장 사랑하는 남자와 가장 친한 친구의 손을 놓아 버린 리젠은 마치 쓰러질 듯했지만, 그래도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소란스러웠던 장내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르엘라 고모의 일기장에 보면…… 아셰 왕녀님이 개발한 비상에 부분적인 해독제를 가르쳐주는데…… 그게 여자에게만 통하는 해독제거든요.”

그녀는 차마 아셰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군 채로 말했다. 눈물이 그녀의 볼 위로 주룩주룩 쉼 없이 흘렀다. 이게 맞는데, 이 자리에서 이 말을 하는 것이 맞는 것 같은데, 그래도 마음이 쥐어짜는 것처럼 아팠다. 그녀를 이 자리에 서게 한 르엘라와 이브나는 어차피 그녀의 옆에 있어 줄 수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스스로 카이든과 아셰에게 등을 지고 홀로 걸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날 아침, 윌리엄 왕자님께 비상과 해독제를 함께 탄 차를 드리고…… 함께 차를 마신 저와 아셰 왕녀님은 여자였기 때문에 살아남은 겁니다.”

떨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가 결혼에 대해 꿈꾸는 유일한 것은, 다니엘 오빠가 왕이 된 뒤 부디 내 부탁을 들어주어서 그냥 제일 가깝고 우리나라보다 국력이 약한 공국의 젊은 귀족한테 보내 주는 거야. 그나마 자유가 좀 있고, 이런 암투 같은 것과 상관없는 곳. 우리 엄마처럼 존재만으로도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그런 곳에 가서 숨통 트고 사는 거지.’

아셰는 제국에 가는 것을 정말 싫어했었다. 그리고 윌리엄은 그녀가 제국에 갔으면 한다는 뜻을 내비쳤다고 들었다.

“르엘라의 개인적 기록물은…… 증거가 될 수 없을지라도…… 5년 후…… 성분 분석을 해 보면 르엘라의 일기장에 나와 있는 아셰 왕녀님의 비상약과 여자에게만 해당하는 해독제 성분이 정확하게…… 나타날 겁니다. 시해 당시에는…… 저와 아셰 왕녀님, 윌리엄 태자님께 몇 가지의 차 성분밖에 나오지 않았지만요.”

아셰에게 달려드는 로즈리를 말리려고 다니엘이 정신없이 뛰어들었다.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 아닐 수 없었다. 리젠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괴한의 손에 끌려 암흑에 휩싸인 길에서 그녀는 하나하나 사건을 되짚어 가고, 가지 않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르엘라의 모든 일기장 내용을 몇 번이나 되새겨 보았다. 그러면서 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윌리엄의 시해 사건을 놓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르엘라의 일기장과 대조해 보면서 세워지는 가설에 숨이 막혔다.

아셰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 사건에서 그럴 사람 같은 것은 없다…….

‘왕족은 어렸을 때부터 정치의 중심에 있던 사람들이야. 얽혀서 좋을 일 하나 없어. 자기 자신도 도구로 쓰는 사람들인데, 남들은 오죽하겠니. 속에 뭘 품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고.’

사파엘은 언제나 왕족의 사고방식은 우리랑 다르다고, 자신의 작은 이익을 위해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왕족을 너무 믿지 말라고.

그날 아침, 일부러 리젠을 부르고 윌리엄의 편이라는 것을 강조한 뒤, 윌리엄에게 주었던 차라고 한마디 하기까지 했다. 사실은 아셰도 리젠을 이용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때 받았던 충격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가 카이든이 위험에 빠졌다는 말을 듣고 가까스로 차린 의식이었다. 아셰가 여자에게만 해독제의 효과가 나타나는 비상을 알고 있다는 것은 세상에 셋밖에 몰랐다. 르엘라, 아셰, 그리고 르엘라의 일기장을 읽은 리젠. 아셰가 범인인 것을 알면서도, 카이든에게 어떻게든 경고하고 싶어 그녀의 궁에 향하고 그녀에게 수면제를 요구했다. 르엘라와 루벤에게 사랑 앞에 어떻게 그렇게 어리석었냐고 항의할 수 없었던 것은, 그녀 역시 사랑 앞에 그토록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

생각해 보니 약제국에서 습격을 받고, 끝없는 암흑에서 버려져 있다가, 카이든 생각에 미친 듯이 달려 여기까지 왔다. 순간 머리가 핑 돌고, 등의 상처가 화끈하게 달아오르며 그녀는 털썩 쓰러졌다. 행정국 직원들이 진을 빼며 잔뜩 흥분한 관중들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저 멀리 카이든이 누구보다도 빠르게 그녀에게 달려오는 것이 마지막으로 시야에 잡히고 나서, 그녀는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

“나한테는 말해. 어차피 넌 5년 동안 집행 유예야.”

다니엘은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는 아셰를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셰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널 어떻게 믿고?”

“……어차피…… 네가 왜 그랬는지는 알 것 같아.”

정답을 알고 나서 되짚어 보니 너무 명백한 일이었다. 아셰는 자신의 어머니, 샤틴같이 살기를 죽기보다 싫어했던 애였고 자신에게 결혼만큼은 최종 선택권을 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어차피 난 죽어도 제국 같은 덴 가기 싫으니 나중에 뒤통수치지 않을게. 그냥 난 조용한 나라에 얼굴 좀 반반한 남자를 골라서 죽은 듯 살 거야.’

윌리엄이 죽고 나서 제국의 황제와 있었던 혼약은 자연스럽게 깨졌다. 만일 윌리엄이 죽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녀는 제국에 갔을 것이 뻔하고, 모든 대륙에서 일인자로 꼽히는 황제의 비로 들어간 이상, 첩실 사이의 암투에 휘말리거나 샤틴처럼 죽은 척하며 쥐 죽은 듯이 살았을 것이다.

만일 루벤이 왕위에 오른다면, 만에 하나 그녀가 권력을 가질 것이 무서운 루벤은 절대 그녀를 제국에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다니엘이 왕위에 오른다면, 인간적으로 제국이 아닌 다른 곳에 보내 달라고 부탁해 볼 여지가 있었을 테니 아셰로서는 어떤 결과가 나와도 제국에 가지 않는 셈이 된다.

아셰가 키득키득 웃었다.

“제국에 보내지 말라고 그토록 부탁을 했는데…….”

다니엘은 한숨을 쉬었다.

“루벤이 너무 위협적이라며 결국엔 보내겠다고 자기 혼자 결정해 버리더군. 먼저 나를 자기의 장기말로 쓴 건 윌리엄이야. 오라버니와 내가 친한 건 누구나 알고 있었으니, 내가 제국의 비로 간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자신에게 힘이 된다 생각했던 거겠지. 내가 다른 곳은 다 괜찮아도 제국만은 싫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결국 나를 그 정도로 취급한 사람이었어. 뭐, 별다르게 원망은 안 해. 그게 우리가 배워 온 방식이니까.”

그녀가 턱을 괴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완벽한 성분 분석을 할 수 있는 5년간 그녀는 이렇게 궁에 감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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