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화 (75/256)

75화.

어느새 나람의 시체를 옮기고, 다른 수사국 직원들과 함께 카이든이 돌아와 있었다. 텅 비었던 수사국 직원들의 자리가 무색하게 카이든은 꽤 많은 직원들과 함께 있었다. 루카스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진 장내에서 일어나 말했다.

“이번 ‘의심의 기간’에 다니엘 왕자님의 지목을 받아 주도적으로 수사했던 카이든 루스가 늦은 이유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카이든 루스는 아까 리젠 하카트 양이 말했던 두 번째 흑마법의 현장을 덮치기 위해 잠복 수사를 나갔다가, 다소 차질이 생겨 조금 늦었습니다. 하카트 양에 이어 카이든 루스를 이브나석에 세우고자 하는데, 절차상 문제없을까요?”

“문제없습니다.”

법무국장이 선뜻 대답하여 카이든은 조용히 일어나 이브나석으로 향했다. 자신에게 걸어오는 카이든의 모습을 보고 눈물이 왈칵 차오른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떨지 않았는데 갑자기 그가 자신을 바라보며 다가오자 다리가 떨렸다. 이제 자신은 자리로 돌아가야 할 것 같은데, 다리에 힘이 풀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녀의 팔을 붙잡아 세운 뒤, 그가 낮게 말했다.

“금방 끝나. 그냥 있어.”

리젠은 입술을 꼭 깨물고 그녀의 옆에 선 카이든을 바라보았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아직 그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놓였다.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해 흑마법을 제지하지 못하였으나, 잔당을 좇아 잔해를 정리하고 있는 현장을 뒤늦게 찾아 덮쳐 각종 증거물을 획득했습니다. 이 모든 일의 중심이 되었던 불법 마법약 상점 주인인 캐서린 얀슨을 비롯한 여러 범인들을 추격하여 잡느라 좀 늦었습니다. 이미 수사국에서 관련 증언을 확보한 상태이고, 배후에 테스티 왕비 전하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애초부터, 히람궁 화재에서부터.”

장내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서쪽 영주들과 관련되어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항의하기 시작했다. 다니엘의 지시에 따라 수사국 직원들이 테스티와 루벤을 붙잡아 도주와 자결을 막을 동안, 다른 수사국 직원이 각종 흑마법의 잔해들을 가져와 설명하기 시작했다. 눈앞의 생생한 증거들을 보며 모두가 혀를 내둘렀다.

“카이든.”

잠시 장내가 소란스러울 동안, 이브나석에 나란히 선 리젠이 천천히 카이든에게 말을 걸었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그의 눈이 천천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리젠은 순간 커다란 유혹에 휩싸였다. 이대로 모른 척해 버릴까? 그냥 매번 꿈에 나타나면 어때? 평생을 속이고 살면 되지 않을까? 이대로, 이대로 그냥 그의 품에 안겨서 모든 것을 잊을까? 그러나 자신이 그럴 수 없다는 것은 리젠이 더 잘 알았다. 그녀는 한숨을 쉬고, 가지고 나왔던 커다란 박스 안에서 주섬주섬 시험관을 하나 꺼냈다. 오는 길에 급히 약제국에 들려 르엘라의 연구 노트를 들고 오면서, 왠지 눈에 밟혀 함께 가져 왔던 해독제였다.

“마셔. 해독제야.”

“……무슨 해독제?”

카이든이 낮게 물었지만, 이미 놀라지 않는 것을 봐서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있는 듯했다.

“이거 마시면, 이제 꿈에…… 내가 나오지 않을 거야. 오래 걸려서…… 미안해.”

그는 시험관을 받아 들고, 리젠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강당 안은 몹시 소란스러웠고, 수사국 직원들이 테스티에게 달려드는 수많은 귀족들과 산하기관 직원들을 막느라고 곤혹스러워 하고 있었다. 이 사태를 진정시키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다니엘마저도 지금 그들에게 눈길을 주지 못했다. 그 소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그들은 이브나석에 둘만 존재하는 것처럼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거, 어떻게 된 거야?”

리젠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한숨을 쉬었다. 한동안 떨리던 그녀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바닥으로 자신 없이 향했다.

“고모의 노트 중에 꿈 연결 시약이 있길래…… 다니엘 왕자님의…… 꿈에…… 들어가고 싶어서…… 학생 시절에 만들었다가…… 실수로 네가 마시고…… 일회성인 줄 알았는데 자꾸만 들어가게 되어서…… 해독제 연구에 오래 걸렸어…….”

“……그렇구나. 결국 또…… 다니엘이었구나.”

카이든이 해독제를 들고 피식 웃었다. 그 표정에서, 리젠이 익히 알고 있는 차가움이 보였다. 그녀를 바라보지 않을 때, 문득문득 보였던 그 모습.

“왜 말하지 않았어?”

리젠은 순간 울컥 억울함이 차올랐다. 너는 지금 아무것도 모르고…… 내가 너를 살리기 위해 어떤 길을 어떻게 걸었는지, 그 어떤 것도 모르는 채…… 어떻게 그런 표정으로 나를…… 마치 수사국 직원이 누군가를 취조할 때처럼, 그때처럼. 카이든은 자신이 납치당했다는 것도 모르니 어쩔 수 없다고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서러움에 그녀는 울컥하는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침묵을 지켰다.

“…….”

“……내가…… 네가 꿈에 나온다고 할 때…… 그때에도…… 다 알았어?”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의 방향이 그녀가 원하는 쪽으로 가고 있지 않는 것은 확실했다.

“나는 일단, 음…… 일단 모든 걸 다 되돌린 다음에, 그때에 찬찬히…… 말하려고…….”

“그럼 그 꿈들…… 너도 다 알고, 기억하고…….”

순간 리젠은 맨 처음 꿈을 꿨을 때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기억이 났다. 카이든은 지금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 자신의 무의식을 완전히 들킨 기분에 속았다는 생각이 들어 배신감을 느끼겠지? 점점 더 몸이 떨려 왔다.

“……어…… 미안해. 정말 실수였고, 그래서 되돌리려고 한 거야…….”

애초부터 상상하지 못했던 시나리오였다. 조금 더 찬찬히, 차분하게 모든 진실을 전달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그의 꿈에 들어가 대충 사실만 소리치고, 소란스러운 분위기에서 울컥하는 감정을 절제 못 한 채 그의 차가운 눈빛을 마주하게 될 줄 몰랐다. 장내는 점점 더 시끄러워지고, 리젠은 말을 고르려고 머뭇거렸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머리가 멍했다. 일단 지금은 아닌 것 같았다. 이런 분위기에서, 언제 이브나석에서 내려가야 될지 타이밍조차 모르는 시점에서 다짜고짜 그가 좋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사실은 너랑 내가 운명, 뭐 그 비슷한 거라서…… 어젯밤에도, 정말 운명같이 네가 날 구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바보 같았네. 원래부터 운명 같은 건 믿지도 않았는데.”

“……카이든.”

“네게는 되돌려야 할 실수 같은 거였겠지만…… 나는…… 나는 진심이었거든.”

리젠은 순간 숨이 막혔다.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어떻게, 어떻게 그런 상처 입은 눈으로…… 머릿속이 하얘져서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정말 미안해…….”

“……리젠, 너는 결국 계속 내게…… 미안했을 뿐이야?”

그가 손에 든 해독제를 단숨에 마셔 버렸다. 리젠은 순간 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가 해독제를 마시게 되면 속이 후련할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 안타까웠다. 그리고 다니엘의 이름이 나오자 더 차가워진 그의 표정을 보니 리젠은 무언가 두려워졌다. 아주 오랫동안, 이 시간을 두려워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카이든의 표정이 다시 차갑게 변하고, 그녀에게 살갑게 대하던 그 말들은 모두 거짓말인 것처럼 그녀 앞에서 입을 다물고, 또다시 예전처럼 속을 모르는 남자로 돌아가는 것.

“카이든, 잠깐만.”

그녀가 급히 카이든의 팔을 잡으려고 할 때, 밑에서 법무국장이 소리를 질렀다.

“이브나석의 두 사람! 내려오세요! 이제 투표를 하겠습니다!”

“리젠.”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살려 줘서 고마워. 그러니 미안해하지 마. 그걸로 다 됐으니까. 사실 네 실수는 전혀 마음 쓰이지 않아.”

그 말이 너무 단호해서, 리젠은 또 말문이 막혀 버렸다. 아, 맞아. 카이든 루스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지. 존재만으로도 위압감이 있어서 순간 움츠러들게 만드는, 키도 크고 몸도 탄탄한 데다가 인상 자체가 차가운 그런 남자.

“꿈 내용은 다 잊어. 아무리 꿈이라도, 추하게 굴어서 내가 미안해.”

“뭐?”

“다 고마워. 여기까지 온 건 다 네 덕분이야.”

“……너…….”

“나중에…… 나중에 얘기해.”

카이든이 주저하지 않고 뒤를 돌아 이브나석에서 내려갔다. 리젠은 잠시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가 왜 그렇게 미안하다는 말을 싫어했는지 알 것 같았다. 고맙다고 하는데, 미안하다고 하는데, 그녀에게 선을 긋는 것 같아 하나도 좋지 않았다. 저 뒷모습에 상처받았던 적이 있었다. 예전에, 다니엘의 궁에서 자신과 다니엘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적에게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카이든은 자신을 놔두고 차갑게 돌아섰다.

그땐 자신도 그 뒷모습에 화가 나기도 하고, 또 살짝 당황하기도 해서 다니엘의 궁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리젠은 심호흡을 했다. 다니엘 얘기까지 했으니, 카이든은 지금 당연히 그녀가 그를 기만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동안의 모든 시간이 헛된 것이라고 느낄 정도로 오해한 것 같았다.

설명해야 한다. 그에게 단순히 미안하고 고마워서 곁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이 모든 일이 실수라고 생각한 건 아니라고, 전하지 못한 마음을 어쨌든 모두 말해야 한다. 그때처럼 가만히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 어떻더라도 지금은 그녀가 카이든을 따라가야 할 때 같은데…… 서둘러서 짐을 챙겨 내려가려는데, 갑자기 앙칼진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윌리엄은!”

윌리엄의 부인, 아직도 상복을 입고 있는 로즈리였다.

“윌리엄은 어떻게 된 건데요?”

갑자기 소란스러웠던 장내가 다시 조용해졌다.

“5년 전 르엘라 하카트가 죽고, 또 그 유골을 이용해 다니엘 왕자님을 죽이려고 했다가 실패했다면, 그렇다면 윌리엄 태자 저하는 어떻게 되신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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