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그런데 며칠 전, 카이든 루스가 저희 집에 와서 유골 몇 개를 주며 성분 분석을 요청했고, 저는 성분 분석 이후 아주 놀라운 사실을…….”
“리젠 하카트!”
벌떡 일어나 그녀의 말을 막은 것은 놀랍게도 약제국장, 벨린 카스티스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중년의 여인인 벨린은 옆자리의 사파엘이 막는 것을 뿌리치고 흥분하여 소리 질렀다.
“정식 공문도 없이, 아무런 사전 절차 없이, 맘대로 성분 분석이야? 약제국에 일언반구도 없이 감히 그런 공적인 일을 자택에서 사적으로…….”
약제국 직원인 르엘라가 죽었을 때, 사파엘이 정식 공문과 절차 없이 시약 분석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정직 일주일을 내렸던 벨린은 국장 자리에 올라간 사람답게 몹시 원칙주의자였다. 다만 몹시 다혈질이었는데,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약제국 직원이 제멋대로 중요한 실험을 몰래 실시했다는 것이 곧 직원 관리와 이어져서 굉장히 수치스러웠다. 리젠도 그에 대해서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넌…… 넌 감봉이야! 아니, 정직…… 아니, 정식으로 위원회에 회부…….”
벨린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는데, 더 큰 소란이 뒤에 있는 문에서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아오, 진짜! 이 미친 자식아! 이런 젠장, 너 들어가면 나 완전 깨진다고!”
자신이 들어왔던 뒷문이 다시 활짝 열려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말문이 막혀 있던 리젠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산하기관 특별법 21조 43항에 따르면 서로 다른 산하기관의 직원들 간 쌍방의 과실이 인정될 경우, 협의에 의해 직원 징계의 비율을 정할 수 있으니…….”
문을 벌컥 열고, 검은 머리의 남자가 한쪽 팔에 욕설을 지껄이는 유진을 매달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수사국 직원인 제가 직접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의뢰한 것이 맞으므로, 그 건에 대해서는 제 100% 과실로 처리해 주십시오.”
“이 개자식아! 들어가지 말라고!”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다가,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려 있음을 깨닫고, 다른 욕설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푹 숙이고 문을 닫은 채 사라져 버렸다.
“어…… 원래 이브나석에 설 카이든 루스가 돌아왔으므로…….”
진행을 맡은 행정국의 직원, 아린스가 천천히 말을 꺼냈지만, 그녀의 말을 막은 것은 왕족들이 모여 있는 높은 자리에 있던 루벤이었다.
“아니.”
그의 목소리가 얼마나 단호한지, 그가 왕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다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다니엘마저도 그의 잔뜩 굳은 표정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지경이었다.
“리젠 하카트가 계속한다.”
눈물도 고인 데다가 저 뒤에 있는 카이든은 너무 멀리 있어서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카이든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꽤 많이 비어 있는 수사국의 자리 중 하나에 앉았다.
‘무사했구나…….’
리젠은 눈을 몇 번 깜빡여 눈물을 간신히 참았다. 그가 돌아왔다. 그가 살아 있다. 그것 하나만으로 그녀는 아까부터 그녀를 괴롭히던 불안감에서 드디어 해방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아린스가 거의 덜덜 떠는 수준으로 말했다.
“이브나석의 리젠 하카트, 계속해 주세요.”
카이든은 멀리 앉아 이브나석에 선 리젠이 차분하게 하나하나 사건의 경과를 읊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리젠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복잡함이 가득했다. 이 많은 사람들을 앞에 두고 계획에도 없던 사건 전개를 설명하는 그녀의 당당한 모습을 바라보며 새삼 대단하다고 느끼기도 했고, 자신이 늦었는데도 불구하고 사태를 책임지고 있는 것에 고맙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저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어도 꿈결 같았다.
그러면서도 간밤에 자신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이상한 꿈을 생각하면 머리가 복잡했다. 꿈에 들어온다고? 그게 가능이나 한 말인가? 그럼 리젠은 누구의 꿈에도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그럼 왜 하필 어느 날부터 자신의 꿈에? 그렇다면 왜 지금까지 그에게 숨겼단 말인가? 분명히 자신의 꿈속에 그녀가 나온다고 이미 말한 것 같은데…….
“흑마법에 필요한 재료 중에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인 이성의 피가 필요하며…….”
카이든의 생각이 복잡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용한 장내에 리젠의 목소리만 울려 퍼졌다. 르엘라의 수많은 낙서 중에 있던 마력증폭약 배합과 유골의 성분이 같았다는 것, 습격을 몇 차례 받아 피를 뺏긴 것, 이유를 찾던 와중 흑마법까지 추론할 수 있었던 것, 한스팀 왕국의 지한 왕자가 말한 흑마법의 조건과 필요한 마력 등…… 논리 정연하게 시간 순으로 이어지는 리젠의 말을 들으며 루벤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르엘라가 죽은 지 5년 되던 날, 유골의 일부가 또 다른 흑마법의 재료가 되기 위해 사라진 것을 알았고…….”
‘제 궁에 거미가 많이 나오는데, 약을 치기보다는 소소하게 취미 삼아 거미를 죽이는 흑마법을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 주문에는 남자의 피가 필요합니다.’
루벤이 벌떡 일어섰지만 리젠은 르엘라 생각에 목메어 시선을 아래로 깔고 숨을 고르느라 알아채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르엘라 하카트는 나람의 독단적인 질투에 의해 흑마법의 첫 번째 희생자로…….”
‘왕자님의 피를 조금만 주실 수 있으신지요?’
“으아, 으아아아아아!”
카이든이 순식간에 저 뒷자리에서 달려 나온 것과, 루벤이 자신의 옆에 앉아 있던 새파랗게 질린 나람의 목을 조르기 시작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리젠의 말을 들으며 일어나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앉아 있던 나람은 고통에 일그러진 루벤의 모습을 보며 드디어 끝이 왔다는 생각을 했다.
‘걔 나한테 보내.’
시야가 순식간에 흐려지면서, 어느 사막의 밤에 보았던 무심한 남자의 눈빛만이 남았다.
‘나한테 보내라고.’
그 말이 내게는 세상에서 유일한 구원이라 놓을 수가 없었어.
‘필요 없어. 그냥 지금 보내.’
내 사랑에 눈이 멀어 당신의 사랑을 볼 수 없었어.
‘저기 들어가. 지금.’
나람은 손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미, 미, 미안…… 미안해요.”
그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람이 그 자리에서 축 늘어지고, 로즈리가 지젤의 눈을 가리며 비명을 질렀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테스티만이 그 자리에 얼어 있을 뿐이었고, 이 상황을 전혀 모르던 아셰와 다니엘 역시 놀라서 그 어떤 반응도 하지 못했다.
“안 됩니다!”
모든 것이 정지한 것 같은 그 찰나에, 저 뒷자리에서 달려온 카이든이 왕족들이 앉아 있던 자리로 테이블을 딛고 도약하여 루벤이 뽑아 든 칼을 발로 찼다. 장내의 모든 사람들이 루벤의 칼끝이 다름 아닌 자신의 목을 향하고 있다는 걸 보았다. 카이든의 도약 때문에 나람의 시체가 귀족들 자리를 향해 굴러 떨어지며 귀족 영애들의 비명이 강당을 울렸다. 그 와중에 다니엘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자결은 안 돼! 막아!”
카이든은 자결을 하려던 루벤의 두 손을 붙들고, 여전히 짐승과도 같은 포효 소리를 내뱉으며 울부짖고 있는 루벤을 억지로 앉혔다.
“죽지 마십시오.”
카이든이 낮게 말했다.
“언제까지 눈을 감고 계실 겁니까. 끝까지 보세요. 계속 모르실 셈이십니까?”
그의 시선이 옆에서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테스티를 향했다. 그가 이를 갈며 그녀에게 말했다.
“자결하지 마십시오.”
그녀가 희번덕한 눈으로 카이든을 노려보았다.
“살아 계셔야 루벤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실 수 있지 않으시겠습니까?”
“건방지게…….”
“그리고 그렇게 쉽게, 편하게 돌아가시면 안 되지요.”
루벤의 자결을 막은 그가 천천히 돌아 나가며 중얼거렸다.
“희생시킨 목숨이 몇인데.”
카이든을 포함해서 얼마 없던 수사국 직원들이 나람의 시체를 옮길 동안, 진행을 맡은 행정국의 아린스가 떨리는 숨소리조차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그, 그럼…… 계속하겠습니다…….”
리젠은 아직도 어수선한 장내를 둘러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르엘라의 죽음 후 받았던 습격과 납치, 카이든의 잠복근무와 함정, 그리고 이 자리에 자신과 카이든이 어떻게 설 수 있었는지. 모든 설명을 마친 리젠은 당장이라도 죽어 버릴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루벤을 힐끗 보고 고개를 숙였다.
“증거로는 지금, 리젠 하카트 양이 가져온 르엘라 하카트의 일기장, 약제국이 보관하고 있던 그녀의 연구 노트와 몇 구의 유골 성분 분석 결과뿐인 것이지요?”
법무부 직원이 열심히 필기를 하고 있다가 질문했다. 리젠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그렇습니다.”
“개인의 기록물은 정당한 근거로 처리되기가 힘든 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이해하시지요?”
“예, 이해합니다.”
“르엘라 하카트는 자연사라는 결론이 이미 있고, 지금 흑마법을 썼다는 당사자가 사망하여…… 단독 범행인지 배후가 있는지도 알 수 없는데다가…….”
“그렇지만 방금 나람이 미안하다는 유언을 남긴 것은, 어쨌든 흑마법이 개입되었다는 것을 인정한 것 아닙니까?”
옆에 있던 다른 법무부 직원이 지적했다. 리젠의 말이 다 끝났으므로, 이제 자신들끼리의 토론을 시작한 것이다. 사상 초유의 사태에 귀족들 역시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테스티가 목을 다듬고 발언권을 신청했다.
“르엘라의 일기장 내용에 대해서는 더 이상 제가 드릴 말씀은 없군요. 제가 르엘라 하카트를 따로 불러 루벤과 헤어지라고 한 것에 앙심을 품고 이런 글을 남긴 것 같습니다. 나람의 흑마법에 대하여 저와 루벤은 아는 바가 없습니다.”
불신을 가득 품은 루벤의 눈빛이 그녀를 향했지만, 테스티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이 자리에 앉았다. 리젠이 자신도 모르게 한마디 하려고 주먹을 불끈 쥘 때였다. 수사국장 루카스가 손을 천천히 들었다.
“발언 신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