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법무국장이 엄숙하게 재판 시작을 선언했다. 또다시 지루한 시간들이 이어졌다. 선왕의 죽음, 이어진 태자의 죽음, 그로 인해 선언된 의심의 기간…… 최종 재판을 거쳐 계승된 왕위에는 정당성이 있으며 그 이후 어떠한 문제 제기도 할 수 없다는 원칙을 말하는 법무부장의 목소리가 엄중하게 울려 퍼졌다. 그 뒤, 루벤과 다니엘이 각각의 정치 지향점과 어떤 왕이 되기로 하였는지 설명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의심의 기간’ 선포 당시에도 말했지만…….”
루벤은 씩 웃으며 말했다.
“선왕과 태자의 죽음은 저와 관계가 없습니다. 관계가 없으니 내보일 증거도 없지요. 다만 아바마마의 죽음이 자연사라는 의료국 및 약제국의 보고서와, 윌리엄 형님이 죽던 날 제 하루의 알리바이를 증명하는 수사국의 관찰일지를 제출합니다.”
아무도 죽인 적이 없으니 걱정 말고 결백을 주장하라…… 테스티가 루벤에게 지시한 내용이었다. 루벤은 짧게 끝내고 자리에 앉았다. 다니엘은 미소를 지으며 일어섰지만, 사실 모든 증거를 가지고 돌아오겠다던 카이든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다소 긴장한 상태였다.
“선왕과 태자가 하루 만에 죽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의구심을 품었고, 수사국에 이 모든 사건을 정식으로 의뢰했죠. 그리고 지금 사정상 도착하지 않았으나, 수사국 직원 카이든 루스가 남기고 간 수사 노트를 제출합니다.”
“이의 있습니다.”
루벤의 편에 선 귀족이라고 알려진 랜턴 자작이 손을 들고 발언했다.
“수사 노트의 내용을 우리가 다 사실이라고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카이든 루스는 평소 굉장히 꼼꼼한 성격으로, 수사 노트에는 본인의 기록뿐만이 아니라 각종 증거가 함께 철해져 있으므로 사실 여부는 직접 보시고 판단하시죠.”
다니엘은 차분하게 대답하였으나, 속으로 카이든 한 사람에게 너무 많은 역할을 맡겼나 싶어 속으로 후회하고 있는 중이었다. 6년간 카이든과 고등학교와 대학을 함께 다니며, 그의 능력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은 아닌지 뒤늦게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맨 처음 의심의 기간을 선언할 무렵에는 주변에 믿을 사람이 없었고, 기반도 전혀 없다시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의심의 기간’ 중 정치는 자신이, ‘최종 재판’ 준비는 카이든이 하기로 했지만, 너무 많은 것을 그에게 맡겨 버린 것은 아닐까. 카이든 역시 그저 그와 동갑내기인, 아무 기반 없는 사람이었을 뿐인데. 카이든은 과연 무사할지, 마음속 깊숙이 걱정이 밀려왔다. 마지막에 리젠을 두고 신경전을 하느라 제대로 합심하여 최종 재판에 대해 준비하지 못했다. 당연히 무사히 돌아올 줄 알았다. 그래서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줄 알았다. 그 동안, 계속해서 그래 왔듯이.
“아니, 이 수사 노트만 보고 우리가 뭘 어떻게 판단하라는 겁니까?”
랜튼 자작에 이어 다른 루벤의 편이었던 귀족, 스엘 백작까지 한마디 거들었다. 어쩔 수 없이 다니엘이 한마디 더 하려고 입을 열었을 때였다.
“발언을 신청합니다.”
저 멀리, 산하기관 말단 직원석에 앉아 있었던 여직원이 손을 들고 벌떡 일어섰다.
“야! 미쳤어? 지금 여기가 무슨 자리라고! 뭐하는 거야!”
리젠의 당돌한 발언에 옆에 있었던 그녀의 선배, 지트가 사색이 되어 그녀를 끌어 앉히려고 했으나, 리젠은 얄미울 정도로 그의 손을 쉽게 쳐 내며 낭랑하게 말을 이었다.
“약제국의 리젠 하카트입니다.”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저 위에 잔뜩 굳은 얼굴로 앉아 있는 루벤, 너무나 놀라 양손을 입에 가져다 댄 아셰, 다 필요 없다는 듯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로즈리, 그리고 차갑기 그지없는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는 테스티의 눈빛을 온몸으로 받아 내며 그녀가 마지막으로 힘없이 리젠의 옷을 잡아당기던 지트의 손을 찰싹 쳐 냈다.
“의심의 기간 중 카이든 루스와 함께 6년 전 히람궁 대화재에 대하여 조사했으며, 카이든 루스가 사정상 나타나지 않는 지금 그와 함께 한 조사 내용에 대하여 발언을 하고 싶습니다. 존경하는 법무국장님께서는 제 요청을 받아들여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사람이 우글우글했던 강당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법무국장은 가만히 그녀를 쏘아 보았으나, 속으로는 이러한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수 없는 법조항을 검토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무리 기억을 뒤져 봐도 수사국이 아닌 다른 산하기관의 직원이, 아무런 사전 협의 없이 최종 재판에 공개적 발언을 한 경우가 없었다.
“법무국장님.”
법무국장의 고민을 눈치챈 다니엘이 부드럽게 말했다.
“리젠 하카트가 비록 약제국 직원이기는 하지만, 저의 개인적인 부탁으로 카이든 루스를 도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녀의 발언을 들었으면 합니다.”
“……사전 협의되지 않았습니다. 대체 저 아이가 무슨 자격으로…….”
테스티가 말을 시작하자, 리젠이 배에 힘을 주고 또렷하게 소리쳤다. 그녀의 시선이 루벤과 정면으로 부딪혔다.
“저는 5년 전 죽은 르엘라 하카트의 조카이자 유일한 가족입니다. 저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6년 전 히람궁 대화재와 르엘라 하카트, 그리고 지금 카이든이 잠입 수사를 나가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것까지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르엘라 하카트를 포함한 히람궁 화재의 희생자들을 대표하여, 부디, 제게 발언권을 허락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순식간에 장내가 시끄러워졌다. 히람궁 대화재에서 서쪽 지방 영주들이 대거 죽었기 때문에, 친척이나 가족들과 연관된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귀족들 역시 웅성거리기 시작하고, 테스티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기 시작했다. 그녀는 눈앞의 리젠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알 수 없어서 모골이 송연할 지경이었다. 모든 예상을 깨고 죽은 줄 알았던 리젠이 최종 재판에 나타났을 때부터 사실 그녀는 무언가가 천천히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는 것 같았다.
“아, 아무 신빙성 없는…….”
테스티의 말을 가로막은 것은 천천히 일어서 뚫어지게 리젠을 바라보기 시작한 루벤이었다. 둘의 시선이 팽팽하게 얽혔다.
“존경하는 법무국장님.”
최종 재판 내내 여유와 호탕함을 잃지 않았던 그의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고, 그새 목소리가 잔뜩 쉬어 있었다.
“리젠 하카트의 발언을 들어보죠.”
그의 옆에, 간밤에 거의 잠을 자지 못해 파리한 눈으로 모든 상황을 바라보고 있던 나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루벤이 ‘르엘라 하카트’라는 이름에 여전히 저렇게 단번에 반응할 줄은 몰랐다. 지금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 줄 알고…… 이미 죽어 버린 지 5년이나 지났는데, 그 이름 한마디에 누가 아군이고 적군인지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뭐, 왕위 계승 후보자 두 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법무국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럼, 약제국의 리젠 하카트를 이브나석으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리젠은 심호흡을 하고, 잔뜩 지고 왔던 상자를 다시 번쩍 든 채로 이브나석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브나석은 원래 카이든이 섰어야 하는 자리로, 진실과 객관성을 항상 강조했던 전 여왕 이브나의 이름을 땄으며 왕족의 좌석 바로 밑에 위치하고 있었다.
‘카이든 루스, 무사한 것 맞지?’
한 발짝 한 발짝 앞으로 걸어 나가며, 그녀는 마른침을 삼켰다. 혹시 몰라 모든 증거를 집에서 가져오면서도 빌었다. 이 모든 것이 소용없어지기를, 최종 재판에 가면 카이든이 이미 도착해서 준비 중이기를. 그의 빈자리를 확인한 뒤로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아서 그녀의 마음은 타들어 가는 것 같았지만, 거꾸로 그가 없다고 해서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에, 모든 일을 망쳤다고 자책하지 않을 수 있게.
‘고모, 나를 도와줘.’
어느 날 아침, 눈을 떠 보자 그녀를 보고 아무 생각 없이 배시시 웃고 있던 약제국의 천재 르엘라 하카트. 그녀가 아마 미치지 않았더라면, 반드시 모든 일을 바로잡고 싶어 했을 것이다. 순간 판단력이 흐려져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 했을 것이다. 진실을 알고 루벤에게 바로 헤어지자고 말했던 것이 그녀의 최종 선택을 가리키는 것 아니었을까.
‘이브나 행정국장님.’
이브나석에 도착할 때까지 그녀는 카이든을 기다렸으나 그는 오지 않았다. 이브나석에 도착하여 한숨 고른 리젠은 고개를 들어 역대 왕과 왕비의 초상이 걸려 있는 한쪽 벽면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가장 존경하는 100년 전의 왕비, 객관성과 전문성을 중심으로 산하기관의 존재 이유를 명시한 역사 속의 인물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다.
‘인간의 판단은 틀릴지 몰라도, 진실은 언제나 하나이니까…….’
마지막으로 그녀가 기절해 있을 동안 정성들여 그녀를 간호했을 것이 분명한 아셰를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고 나서야, 리젠은 입을 열었다.
“6년 전의 히람궁 화재 사건을 모두 기억하실 겁니다. 스잔나 전 왕비 마마를 비롯해 연회에 참여했던 수많은 서쪽 지역 영주님들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그렇게 큰불이 순식간에 붙어 한 명도 탈출하지 못했다는 점에 모두 다 의구심이 드셨을 겁니다. 그러나 마력이 거의 사라진 지금, 인위적으로 그런 화재를 내지 못한다는 합리적인 추론과 그 당시 제펠탄 선왕 전하의 수사 종료 명령으로 이 사건은 모두에게 잊혔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모두의 시선을 감당하며, 그녀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저희 고모, 약제국의 천재로 유명했던 르엘라 하카트를 기억하실 겁니다. 히람궁 화재 사건이 일어나고 6개월 후, 광증이 나타났고 이어 사망했습니다. 이 두 사건이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셨을 겁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루벤의 눈이 벌써 충혈되고 있었다. 그의 눈에 핏줄이 벌겋게 서고, 두 손은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이미 비밀리에 퍼진 소문을 알고 있던 귀족들 몇몇이 루벤의 모습을 보고 수군거렸다. 테스티는 거의 시체가 된 것처럼 굳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할 수 있는 도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