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내가…… 그 계집애 죽이지는 말라고 했지?”
지하 미로에서 정확한 길을 알아내 탈출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아마 헤매고 있다가 죽었을 확률이 크다고 판단한 테스티는 흑마법의 실패를 그 원인으로 추론했다.
“영리한 계집애라…… 그리고 그 쪽지도 읽었는데…… 게다가 정말 몇 발짝 걸을 기운조차 없어 보였습니다.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고, 정신도 온전치 않아 보여서…….”
“근데 걔가 어떻게 없어져!”
테스티는 한동안 제 분을 못 이기고 씩씩거렸다. 최종 재판이 몇 시간 남지 않았다. 원칙상 ‘의심의 기간’을 거치고 올라온 왕은 더 이상 과거의 일로 문제 제기를 받지 않는다. 다니엘이 맨 처음 ‘의심의 기간’을 선포했을 때 테스티가 담담하게 받아들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편하게, 탄탄한 왕도를 루벤에게 주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지.”
테스티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그쪽은 이제 증거가 없어. 귀족원들의 표는 다니엘 쪽이 조금 우세하다고 치면, 산하기관 사람들은 별다른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 어차피 루벤의 손을 들어줄 수도 있을 거야. 어쨌든 걔네들은 심정적인 선호도와는 별개로 원칙적으로 투표하니까. 가능성은 반반이군. 리젠 하카트는 죽었을 테고, 카이든 루스는 어떻게 됐지?”
“아직 연락을 받지 못했으나, 격리에는 성공했고 흑마법 장소까지 나타나지 못한 것을 봐서 신경 쓰시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동이 트고 있었다. 곧 이 모든 시간을 마무리할, 최종 재판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셰는 리젠이 위험에 처해 있으며, 몸 상태가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리젠의 행방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판단했다. 시녀들의 입단속도 단단히 했으며, 자신의 침실에 재웠기 때문에 다니엘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다. 당장 리젠이 행방불명인데 자신을 도와 달라는 말을 한 것이 내심 괘씸해서였다. 더 마음 졸여 봐야 한다고 생각한 그녀는 죽은 듯이 자는 리젠을 건드리지 않았으며, 그래서 최종 재판 아침까지도 깨우지 않았다.
그녀는 이 모든 일에 사실 큰 역할을 맡지 못했고, 알고 있는 정보도 없었기 때문에 리젠이 꼭 최종 재판에 참여해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리젠이 산하기관 직원이기는 하지만 병가 중인데다가 굳이 몸도 안 좋은데 한 표를 행사하라고 재판에 끌고 가기도 좀 마음에 걸려서, 아셰는 쪽지를 하나 쓰고 먼저 혼자 궁을 나섰다. 최종 재판을 앞두고 있는 만큼, 왕족들끼리 아침 식사를 함께 하고 마지막 다과를 나눈 뒤 최종 재판에 함께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또 그 분위기는 얼마나 살벌할까, 어차피 제3자인 아셰는 별로 긴장하지도 않고 몸을 치장한 뒤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서 리젠이 깨어났을 때에는, 먼저 최종 재판에 간다는 쪽지 하나와 간단한 아침 식사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최종 재판!”
카이든은? 그는 무사할까?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자는 동안 아셰가 진통제라도 먹여 놓았는지 몸이 꽤 많이 회복되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시계를 보았다. 최종 재판까지 20분이 남아 있었다.
왕족도 귀족도 산하기관 직원들도 모두 최종 재판에 가 있을 지금, 궁은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리젠은 지금 알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다만 모든 계획이 틀어졌고 카이든은 흑마법의 현장을 덮치지 못했을 수도 있으며, 그래서 ‘의심의 기간’이 끝나면 진실이고 뭐고 모든 것들이 묻힐 수 있다는 판단을 했다.
“……안 돼.”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행정국의 유진은 자신이 행정국 막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세상 가장 지루하고 번잡스러운 일을 하고 있었다. 바로 ‘최종 재판’ 참가자들 명단을 확인하고 안내하는 일이었다.
“예, 솔 남튼 공작님. 확인되셨고요, 명찰은 여기, 투표용지는 여기, 펜은 여기에 있습니다. 자리는 D열 3석입니다.”
같은 말을 너무 반복했더니 이제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행정국의 동기들이 각각의 문 앞에서 다들 똑같은 대사를 하고 있었다.
“예,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트 비니탄 약제국 선배님. 확인되셨고요, 명찰은 여기, 투표용지는 여기, 펜은 여기에 있습니다. 자리는 E열 11석입니다.”
이제 이 지긋지긋한 안내도 끝이 보였다. 최종 재판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재판 10분 전에 우르르 몰려들던 사람들이 슬슬 줄어들고 있었다.
“예,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루카스 진 수사국장님. 확인되셨고요, 명찰은 여기, 투표용지는 여기, 펜은 여기에 있습니다. 자리는 G열 5석입니다.”
루카스 수사국장이 생각보다 늦은 것은 꽤 의외였지만, 유진은 수사국의 명단을 보고 카이든 루스를 포함한 대다수의 수사국 직원들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 수사국 직원들을 기다리다가 늦은 것 같았다. 숨을 좀 돌리고 있는데 행정국의 1년 선배인 아린스가 나타나 말했다.
“이제 다들 들어가서 투표함 준비해. 혹시 모르니 유진, 너는 여기 마무리하고 1분 전까지 사람 받고. 재판 안 봐도 되면, 입구 좀 지켜. 쓸데없는 사람들 못 들어오게.”
“예.”
함께 안내하던 동기들이 우르르 들어갔다. 유진은 의자에 털썩 앉아 한숨을 쉬었다. 한 시간 동안 접수받느라 정말 모든 에너지를 다 쓴 것 같았다. 그녀는 최종 재판을 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대체 누가 왕이 된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런 것 저런 것들을 다 떠나서, 그는 루벤이 스타람 섬과의 교역을 주장한다는 소문을 들어 그에게 투표를 할 생각이기는 했으나 기본적으로 윗사람들의 일에는 관심이 없어 재판을 볼 마음조차 없었다.
이제 테스티가 최종 재판을 선언한다는 개회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이제 올 사람들은 다 왔다고 생각한 유진이 명단과 명찰들을 정리하고 있는 중이었다. 저 멀리서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
너무 놀란 그녀는 아는 척을 하는 것도 잊어버렸다.
“유진, 나야. 약제국, 리젠 하카트.”
무언가를 상자에 잔뜩 짊어지고, 리젠이 헉헉대며 안내 테이블에 쓰러질 듯 뛰어왔다.
“아직…… 시작 안 했지?”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마시려던 물을 건네주었다. 리젠은 친하지 않은 그녀의 대학 동기로, 그저 눈인사만 하던 사이였다.
“개회사 중이기는…… 한데…….”
들여보내도 되나? 최종 재판이 너무 오랜만이어서 정해진 매뉴얼도 없는 듯했고, 아무도 그녀에게 늦는 사람에 대한 언질을 준 적이 없었다. 그러나 리젠의 엉망인 꼴과 간절한 눈빛을 보아하니, 매정하게 끊어 내는 것도 또 내키지 않았다.
“몰라. 얼른 조용히 들어가. 명찰은 여기, 투표용지는 여기, 펜은 여기. 자리는 E열 12석.”
에라, 모르겠다. 리젠은 그냥 일개 약제국 직원인 데다가 자신과 같은 말단일 뿐인데 무슨 큰일이야 있겠어? 그녀는 한번 혼나면 말지, 하는 생각에 그녀를 들여보냈고, 예상대로 득달같이 달려온 직속 선배 아린스에게 몹시 혼났다.
“앞으로 늦는 사람들 들여보내지 마!”
자신이 아린스에게 밉보이고 있는 중이라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아린스의 꾸중을 히스테리라고 믿고 거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개회식 연설 중에 쟤가 들어와서, 왕비 마마가 중간에 대본을 떨어트리셨단 말이야! 다 정숙하고 앉아 있는데 사람들이 하나둘씩 들어오면 행사가 뭐가 되니?”
왕비가 대본을 떨어트리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이람. 유진은 눈을 내리깔고 속으로만 삐죽거렸다.
“루벤 왕자님도, 다니엘 왕자님도, 아셰 왕녀님도 크게 놀라셨어! 이런 중대한 행사에서 행정국이 이렇게 허술하게 사람들을 들락날락시킬 줄 몰라서 그러셨겠지! 내가 정말 행정국장님 뵐 면목이 없다, 너 때문에!”
나 참. 놀랄 것도 많네. 그냥 산하기관 막내 직원 하나 5분 늦게 들여보낸 것이 그렇게 놀랄 일인가? 사람이 살다 보면 좀 늦을 수도 있지…… 그래서 저렇게 죽자 살자 뛰어오기까지 했는데…… 유진은 속으로 짜증을 내면서 반쯤은 그냥 리젠을 들여보내지 말걸 그랬나 후회했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것.’
행정국의 지침이었다. 행정국은 매뉴얼대로 일을 처리하는 부서였기 때문에, 무언가를 밝혀내는 수사국이나 연구에 주목적을 둔 약제국과는 존재의 이유 자체가 달랐다. 그냥 리젠을 들여보내지 않았더라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너, 또 저 문이 열리고 늦는 사람 들여보냈다가는…….”
아렌스의 세모꼴 눈매를 보면서 유진은 한숨을 쉬었다. 벌써 퇴근하고 싶었다.
“진짜 가만 안 둘 줄 알아. 알았어?”
9. 최종 재판
지루한 절차가 이어졌다. 새로운 왕을 맞이하는 기쁜 자리이기도 하다는 테스티의 개회사, 각종 선대왕들의 업적과 역사, ‘의심의 기간’ 및 ‘최종 재판’의 규칙 설명…… 지루하게 이어지는 말들 속에 다니엘의 시선은 갈색 단발머리 여자아이에게 못 박혔다.
“리젠…… 어떻게…….”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너무 급박하게 이루어졌다. 어떻게 일이 진행되는지 알 수조차 없었다. 잠입 수사를 간 카이든은 왜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는지, 수사국장 루카스는 왜 그 수많은 수사국 직원들도 대동하지 않은 채 거의 회의 직전에야 들어왔는지, 계속 행방불명 상태이다가 왜 개회식이 시작하고 나서야 리젠이 나타났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행사가 이미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당장 다가가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을 수도 없었다.
“망할 꼬맹이…… 그냥 숨어 있으라니까…….”
루벤 역시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이마를 짚었다. 현재 정사를 맡고 있고, 또 지금 행사 진행을 하고 있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지만, 테스티 역시 그녀의 등장에 대본까지 떨어트리고 표정 관리가 전혀 안 되는 것을 보면 분명 뭔가가 있다 싶었다.
“왜 왔지? 좀 더 푹 쉬어도 되는데.”
그나마 아셰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숨을 쉴 뿐이었다. 그러다가, 옆자리의 지젤이 칭얼거리는 것을 보고 귀엽다는 듯이 볼을 두드려 주었다. 지젤은 윌리엄의 딸로 이제 두 살이었으며, 지젤의 엄마이자 윌리엄의 비였던 로즈리는 국상 기간이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검은 드레스에 입술을 깨물고 앉아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법무국의 주관 아래 최종 재판을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