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아…….”
사랑 앞에 사람이 얼마나 미치고, 얼마나 추잡해질 수 있는지. 이미 그녀는 카이든 외에는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한시가 급한 상황에 그녀는 더 이상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다리에 힘을 주고 빠르게 걸었다.
아셰는 잠을 자고 있다가 바깥이 소란스러워 눈을 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침대를 박차고 일어난 그녀는 자신의 궁 밖에서 시녀들이 웅성거리고 있는 것을 보고 가운을 여미며 다가갔다.
“……리젠?”
시녀들은 거의 쓰러지다시피 한 리젠을 부축하며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종종 본 얼굴이니 아셰의 가장 친한 친구, 약제국의 리젠 하카트라는 것은 파악했지만 이 밤에 이런 꼴로 이렇게 불쑥 들이닥친 그녀를 어찌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아셰가 흙투성이인 그녀를 억지로 부둥켜안았다.
“리젠! 이게 무슨 일이야? 정신 들어?”
“……너무 또렷해서 미칠 지경이야.”
리젠이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아셰…….”
그녀는 자신이 학창 시절 때처럼,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반말을 쓰고 있다는 것조차 의식 못 한 채로 간절하게 말했다.
“수면제.”
“……어?”
“수면제…… 수면제 좀. 나 자야 돼.”
“뭐라고?”
어안이 벙벙한 아셰의 얼굴을 보며 리젠이 피를 토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절규했다.
“얼른! 빨리! 정말 급하단 말이야! 제발…… 제발…… 지금 당장…….”
“너, 지금 얼른 수면제 가져와.”
아셰가 시녀에게 빠르게 지시하는 것을 보고 난 후에야 리젠이 툭, 고개를 떨궜다.
눈을 떴을 때에는 아셰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보일 뿐이었다. 리젠은 기운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 몇 시간 잤어?”
“몇 시간이지? 여덟 시간?”
“……나 수면제 좀.”
“뭐? 너 이제 일어났어. 또 무슨 수면제야?”
“나…… 나, 자야 돼.”
아셰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손톱을 깨물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리젠이 정말 고통스럽다는 얼굴로 말했다.
“얼른, 얼른! 제발…… 정말 몇 분만이라도, 몇 초만이어도…… 잠시 눈을 붙일 수도 있으니…… 얼른!”
아셰는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일어서서 수면제가 든 컵을 건네주었다. 리젠이 망설이지 않고 꿀꺽꿀꺽 마신 뒤 침대로 쓰러졌다.
“리젠! 천천히 마셔!”
“……아셰…….”
리젠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아셰는 알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면 이렇게 학창시절처럼 자신을 대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반대로, 리젠이 자신에게 그렇게 대했기 때문에 아셰는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리젠!”
“……미안해…….”
순식간에 리젠의 시야가 흐릿해졌다.
“가시지요.”
나람은 망토를 뒤집어쓰고, 테스티의 수하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 조심스럽게 걸었다. 테스티는 절대 흑마법을 궁에서 하는 건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궁에 물건을 들여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며, 5년 전과 비슷한 방식으로 했다가는 들키기 좋으니 반드시 다른 곳에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람은 순간 무슨 문제가 생긴다면 그 자리에서 자신을 처분하기 좋도록 밖으로 보내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었지만 그래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재료는 다 준비가 되었나요?”
“예. 저희가 이동할 동안, 마법사들이 돌에 마력을 집어넣어 줄 겁니다. 그때처럼, 돌이 하얗게 변할 때까지 마력이 필요한 것이지요?”
“네. 흑마법을 다 하고 나면 돌아오는 건가요?”
“아마 돌아오시면 다음 날 아침에 최종 재판에 참여하셔야겠죠. 시간이 딱 맞을 겁니다.”
나람은 고개를 끄덕이고, 망토를 여몄다. 사막 출신인 그녀는 아메니티가 참 추웠다. 별도 하나 뜨지 않는 아메니티의 밤하늘을 보며, 나람은 이게 과연 내가 원하던 모습이 맞는지 혼자서 생각해 보았다.
‘걔 나한테 보내.’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나람은 그때 그 순간을 생각하기만 하면 여전히 마음이 떨렸다.
‘나한테 보내라고.’
그때 그의 그 성의 없는 말들이 얼마나 자신에게는 구원 같았는지.
‘야, 너.’
그의 대충 했던 말들을 자신은 토씨 하나 빠트리지 않고 모두 기억하고 있는데, 루벤은 단 한마디도 기억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때 그 순간이, 나람에게는 인생을 바꿀 정도로 소중했는데 루벤에게는 그저 지나치는 사건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저기 들어가. 지금.’
어떤 기억은 너무 강렬하여 삶을 멈추게 만든다. 나람은 그때 그 기억 속에서 인생 전체가 머물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 어떤 가치나 슬픔도 기억 앞에는 무력했다. 기억이 자신을 자꾸 앞으로 몰아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때 그 순간만 생각하면, 자신도 모르게 걸어갈 수밖에 없는 길이 있었다. 그런데 그 기억은 자신에게만 있다. 공유하지 못한 기억이 그녀를 외롭게, 자꾸만 더 외롭게 만들었다.
‘동트면 나가.’
그 말에, 그녀는 나가지 않았었다. 열다섯 살 그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의 곁에 머물겠다 결정했다. 스무 살이 넘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그의 곁에 머물기 위해 그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었다. 이미 너무 먼 길을 걸었다. 찬바람에 그녀의 입김이 흩어졌다.
몇 시간 후면 소집 시간이 된다. 카이든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무기력하게 갇혀 있는 건 긴장만 될 뿐 시간도 안 가고 정말 최악이었다. 차라리 얼른 시간이 흘러 흑마법 현장이나 덮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너무 시간이 가지 않아서, 카이든은 창밖을 바라보다 살짝 눈을 감았다. 벌써 며칠째 제대로 자지 못했다. 지금까지 별일 없었으니, 아주 조금 눈을 붙이는 건 혹시 모를 격투에서도 좋은 컨디션을 만들어 줄 테고, 시간을 보내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살짝 눈을 붙이는 와중에도 그는 늘 몸에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았기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일어날 자신이 있었다. 그가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살짝 눈을 감았다. 아주 조금만, 조금만 뇌에 휴식을 줄 참이었다.
“카이든!”
배경이 흐릿했다. 리젠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나야! 나라고! 리젠 하카트!”
“아, 어…… 리젠.”
카이든은 어리둥절하여 저 멀리서 뛰어온 리젠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리젠이 울고 있었다.
“일어나, 일어나. 함정이야.”
“어?”
“다 들켰어. 넌 지금 격리당하고 있어. 다른 마법사들하고 다른 곳이라고! 거기가 어딘지 모르겠지만, 얼른 일어나서 탈출해! 일어나! 무조건 뛰어나가!”
“무, 무슨 소리…….”
“그동안 네가 꾼 꿈! 다 네가 꾼 거 아니야! 네 의지가 아니었다고! 내가 들어간 거야. 그러니 제발 내 말 믿어…… 얼른, 얼른 일어나. 탈출하라고!”
리젠이 그의 몸을 정신없이 흔들었다.
“함정이란 말이야, 빨리 일어나!”
카이든은 눈을 번쩍 떴다. 지금 무슨 꿈을 꿨는지 생각할 시간조차 없었다. 열쇠 구멍 사이로 분홍색 기체들이 자욱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재빨리 숨을 참았으나 순간 시야가 핑 돌았다. 그는 벌떡 일어나 의자로 창문을 깨고, 단검을 집어 들어 문을 벌컥 열었다.
“……함정이었군.”
살짝 당황한 것 같았지만 거세게 달려오는 괴한들을 맞이하며 카이든이 중얼거렸다. 시야를 흐리고 사람의 균형 감각을 조종하는 무취의 기체 리파드의 숨결은 어둠에서도 빛나는 그 선명한 분홍 색깔 때문에 암투에는 잘 쓰이지 않으나, 이처럼 사람이 잠시 잠이 든 틈을 타서 흘려보내기는 나쁘지 않았다. 정말로 몇 분만 더 있었다면 굉장히 힘든 싸움에 말려들 뻔했다. 그가 핑 도는 시야 때문에 원래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면서도 천천히 한 명, 한 명 해치울 동안, 시간은 공평하게 흐르고 있었다.
싸움이야 문제가 될 것이 아니었다. 대체 어디서 흑마법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시간 안에 흑마법을 막을 수 있을까. 균형을 살짝 잃어 호흡을 고르면서 그는 초조하게 고민했다.
‘일어나, 일어나. 함정이야.’
귓가에 리젠의 다급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울리는 것 같았다.
‘네 의지가 아니었다고! 내가 들어간 거야.’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그가 꾼 꿈이,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고 한다.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이야기였다. 그는 어지럽게 몰려드는 잡념을 억지로 몰아내며 단검을 휘둘렀다. 그러면서도 가장 비틀거리는 한 명을 일부러 놓아주어, 뒤를 쫓을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게, 준비된 피인가요?”
나람은 병에 보관된 붉은 피를 보며 물었다. 테스티의 수하들은 흑마법을 보는 것이 난생처음이라, 거의 입을 벌리면서 그녀를 구경하고 있었다. 곱게 가루를 낸 르엘라의 유골로 복잡한 진을 그리고, 다니엘의 이름을 쓴 종이와 온갖 재료들이 바쳐진 불꽃이 파랗게 타올랐다.
“예.”
나람이 심호흡을 하고, 주문을 중얼거리면서 병의 피를 불꽃에 뿌렸다. 불이 확 꺼졌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바라보았다.
“된…… 겁니까?”
“뭔가 이상한데요.”
사그라든 불꽃의 재를 보며 나람이 고개를 갸웃했다. 5년 전에는 재조차 남지 않고 깨끗하게 모든 것이 사라졌는데, 영 마무리가 너저분했다. 죽지 않은 것은 분명하고, 어느 정도의 타격을 입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흔적이 많이 남으면 남을수록 흑마법의 효용이 덜한 것인데, 너무 그대로 흔적이 남아 나람은 실패를 예감했다.
“피를 잘못 가져오신 거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분명히 그 계집의 피인데…… 일단은 몸을 얼른 피하십시오. 뒷정리는 저희가 하겠습니다.”
어쨌든 나람은 궁의 사람이다. 아무리 그 누구의 관심도 받고 있지 못하더라도, 너무 오랫동안 궁을 비우면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실패했다고 테스티에게 어떻게 말하나 정신이 아찔했다.
다니엘이 다치거나 죽었다는 소문을 기다리고 있던 테스티는 무언가 일이 틀어졌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녀는 나람의 흑마법이 실패했으며, 거의 아무도 모르는 지하 미로에 가둬 둔 리젠이 행방불명되었다는 보고를 듣고 찻잔을 던져 깨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