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화 (70/256)

70화.

물 한 병을 다 마시고, 허겁지겁 건빵을 모두 다 먹자 온몸에 피가 도는 것이 느껴졌다. 경험했듯이, 기어서 이동하는 것은 속도도 나지 않을뿐더러 팔과 무릎에 상처만 생긴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며 팔다리에 힘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천천히, 발끝과 손끝부터 움직이고, 딱딱하게 굳어 있는 근육에는 미약한 마력이라도 불어넣고…… 언제 실신했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또렷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의식과 무의식을 헤매던 그때, 정말 내가 미쳐 버리는구나 하고 생각했던 그때와는 다르게 머리가 팽팽 돌았다.

카이든이 위험해.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숨을 몰아쉬며 냉정하게 생각했다. 일단 밖으로 나가야 한다. 어떻게든 카이든과 연결되어야 한다. 길을 잃지 않도록 한쪽 벽을 계속 짚어 가면서, 마력이 돌아올 때마다 불을 붙여 시야를 확인하며 걸어 나가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심호흡을 하고 다리에 힘을 주자 이제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았다. 몸이 따르지 않으면 정신력으로라도 걸을 셈이었다. 마력이 살짝 돌아오는 것 같아 마음이 급해진 그녀가 황급히 불을 붙였다. 다리를 질질 끌며 그녀는 벽에 손을 짚고 등의 고통을 견디며 걸었다.

“카이든…… 안 돼…… 절대 죽으면 안 돼…….”

분명히 그들이 사라진 길로 죽 걸어 나갔는데, 어렴풋한 불빛으로 살펴보니 갈림길이 세 갈래나 나왔다. 고민하고 있는 동안 희미하던 불빛이 사라져 버렸다.

“좋아해…… 좋아한단 말이야.”

그녀는 히끅거리며 중얼거리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마력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금이라도 시야가 확보된 다음에 갈까, 아니면 그냥 아무 곳이나 전진할까. 머리로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카이든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생각이 들자 다리를 멈출 수가 없었다.

“죽으면 안 돼…… 절대 안 돼…….”

리젠은 자신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아무렇게나 닦고, 비틀거리며 가장 왼쪽의 길을 선택하고 암흑 속을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질질 끌리는 발걸음 소리가 암흑 속에 울렸다. 울기 시작하자 머리가 띵하고, 등의 고통 때문에 다른 감각이 무뎌졌다. 그토록 많았던 생각은 사라지고, 오로지 카이든의 눈빛과 맞잡은 두 손의 체온만 생각났다.

‘너는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정말로 좋아해.’

네가 좋아. 네가 위험하다는 생각에, 이런 미친 짓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네가 좋아. 너는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나도 너를 정말로 좋아해.

‘네가 이토록 힘들 때에, 곁에 있어 줄 수 있어서 다행이야.’

그때에 네가 없었으면 나는 아마 버틸 수 없을 거야. 네가 내 곁에 있어 줘서, 다 괜찮다고 말해 줘서, 내 곁에서 사랑해 주고 걱정해 줘서, 그래서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는데.

이제 네가 없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데…….

“어이, 꼬맹이.”

리젠은 순간 자신이 정말로 미쳐서, 헛것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 길 아니야.”

그녀는 천천히 뒤를 돌았다. 감각이 무뎌져서 누군가 자신의 곁에 온 줄도 몰랐다.

“지하 미로에서 그렇게 함부로 돌아다니면 안 돼. 진짜 죽는다고.”

아무렇게나 기른 수염, 대충 묶은 짧은 금발 머리, 날카로워 보이는 푸른 눈. 한쪽 손은 주머니에 불량스럽게 꽂아 넣고, 한쪽 손으로는 횃불을 든 루벤이 건들건들 걸어오고 있었다.

다니엘이 그의 궁에 왔다 갔을 때만 해도, 루벤은 그의 이복동생의 방문에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가 다니엘에게 품고 있는 감정은 무관심과 적대감 사이 어딘 가였는데, 아마 리젠의 이름만 아니었어도 그는 그날 밤 술을 진탕 마시고 다니엘의 방문조차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보내고 나서도 괜히 찝찝했던 것은 리젠이 르엘라의 조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르엘라가 보살피고 있던 꼬맹이이자, 그녀가 유일하게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 가족이었다. 갈색 머리 외에는 르엘라를 조금도 닮지 않았지만, 그래도 왠지 무심하게 그냥 넘겨 버릴 수가 없었다.

“잠시…….”

그가 침대에 누워 있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갈색 머리?”

루벤은 재빠르게 기억을 뒤졌다. 이틀 전 새벽녘에 비 오는 소리에 깨서, 자신도 모르게 약제국과 연결된 길을 걷고 있다가 사실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는 데다가 요즘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시야는 흐릿했지만, 아무도 없는 정원에서 저 멀리 누군가가 흰 실험복을 입은 여자를 둘러메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그는 짧은 갈색 머리와 실험복을 보고 순간 떠오르는 사람이 있어 그 자리에 한동안 못 박힌 채 서 있었다.

그러나 르엘라보다는 머리가 길고, 또 예전에 보았던 그녀의 조카보다는 머리가 훨씬 짧았기 때문에 그 어떤 누구와도 연결하지는 못했다. 갈색 머리는 대륙에 굉장히 흔하고, 실루엣밖에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루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약제국에서 또 누가 새벽부터 쓸데없는 실험을 한 모양이라고 제멋대로 추론하며 그는 순식간에 그 장면을 기억 속에서 지웠다. 약제국 내에서는 해독제가 통하지 않기에 실험이 잘못되면 저렇게 둘러메고 고대 마법 범위 밖에서 해독제를 먹이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주말 아니었나?”

아무래도 이상했다. 누가 주말 새벽부터 약제국에서 위험한 실험을 한단 말인가? 그 여자가 리젠이라는 보장은 없었지만, 그래도 뭔가 찝찝했다. 최종 재판이 얼마 남지 않았다. 테스티에게 문안 인사도 꾸준히 가지 않았지만, 인사를 받지 못할 정도로 바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사실 루벤은 아무것도 몰랐으므로 최종 재판을 위해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있었고,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며 걱정 말라는 어머니의 말을 반쯤만 믿는 상태였다.

그는 술수에 능하지 않았으므로, 테스티가 리젠을 납치해 다니엘에게 왕위를 포기하라고 협박할 모양이라고 대충 추론했다. 요즈음 다니엘의 행보를 보아하니 최종 재판에서 순순히 투표만으로도 왕이 될 수 있을 듯했기 때문이다.

“……짜증나는군.”

그가 벌떡 일어났다. 그 여자가 리젠만 아니었어도, 르엘라의 조카만 아니었어도 그는 정말 무심하게 모든 일을 넘겼을 것이다. 그러나 몇 년 전 르엘라의 집에 몰래 찾아갔을 때, 강아지처럼 뛰어다니던 그 꼬맹이를 생각하니 술에 취했는데도 정신이 놓아지지 않았다.

“어쩌다 또 다니엘하고 엮여서…… 그냥 대충 대학에서 건실한 애 잡아서 결혼하고 평범하게 잘살 것이지…….”

르엘라가 유일하게 걱정하던 여자애였다. 그녀의 손으로 키워서 그런지, 너무 엄격하게 키운 것 같다고 늘 한숨이었다.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지만, 그래도 테스티가 리젠을 납치했다는 심증이 생긴 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여자가 납치당했다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고, 또 테스티가 그녀를 배려하여 정중하게 감금하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천천히 일어서서 침대 밖으로 나섰다. 이 궁 안에서 몰래 누군가를 감금할 수 있는 곳을 다 찾아봐야 잠자리가 편할 것 같았다. 그는 어린 시절 매일같이 궁 밖을 빠져 나가느라 대다수의 비밀 장치들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꼬박 하루를 온갖 비밀스러운 공간과 지하로를 다 뒤진 후에야 그는 비틀거리며 잘못된 길로 접어드는 흰 실험복 차림의 여자애를 발견할 수 있었다.

“머리 잘랐네.”

어깨 위로 댕강 올라온 구불구불한 갈색 머리카락을 보며 루벤은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리젠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엄청난 타격을 받아 사실 제대로 걸을 수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루벤은 혹시 몰라 주머니에서 챙겨 온 약초를 하나 건넸다. 리젠이 천천히 그 풀을 받아 단숨에 먹었다. 약제국의 직원답게, 각성 효과가 있어 짧게나마 체력을 회복시켜 주는 약초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본 모양이었다.

“나가게 해 줄 테니까, 따라와.”

약초의 효능이 나타나 리젠이 벽을 짚지 않고서도 천천히 걸을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을 확인한 그가 횃불을 들고 뒤를 돌았다.

“너 말이야.”

말을 할 기운까지는 없는지,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데에만 전력을 쏟고 있는 리젠에게 루벤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내가 다니엘을 위해서 이러는 건 아니라는 걸 알아 둬.”

만일 리젠이 한마디라도 할 수 있는 기력이 있었더라면, 어쩜 그렇게 뭐든지 잘못 짚냐고 한마디 쏘아 줬을 것이다. 그러나 리젠은 카이든이 위험하다는 생각 때문에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고, 오로지 정신력에 의지해 그의 뒷모습을 좀비처럼 따라가고 있을 뿐이었다.

“염치가 있으면 다니엘한테 쪼르르 가서 이르지 말고, 나가서 조용히 숨어 있어. 괜히 또 납치당하지 말고. 최종 재판 끝날 때까지 그냥 얌전히 감금당한 척 있으란 말이야.”

리젠은 마른침을 삼키며 발을 질질 끌었다.

“고…… 고맙…….”

“이 계단 올라가서 직진하면 약제국이 나올 거야. 눈치 봐서 남들 몰래 빠져나가. 난 여기까지만 도와줄 테니. 다시 말하지만, 괜히 개입할 생각하지 말고 왕궁에서 멀어져서 숨어 있어. 괜히 다시 험한 꼴 당하지 말고, 내 뒤통수치지도 말고.”

루벤은 계단 앞까지 그녀를 안내한 다음, 다시 뒤를 돌아 어둠 속으로 휘적휘적 걸어가기 시작했다. 리젠은 그를 뒤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다. 그를 만나게 되면 정말 많은 말을 하게 될 줄 알았는데, 막상 그의 앞에서 원망하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제정신이 아닌 머릿속에 이미 한 사람으로 가득했고, 또 그의 정돈되지 않은 얼굴을 보니 절대 차오르지 않을 것만 같았던 연민이 차올랐다.

카이든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신도 이토록 제정신이 아닌데, 르엘라가 죽었을 때에 이 사람 기분이 대체 어땠을까…… 모든 말을 삼키고, 그녀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계단을 올랐다. 아무것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문을 열고 나가니 서늘한 밤바람이 느껴졌다. 저 멀리 호수를 건너면 약제국이 나온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약초의 효능이 떨어져 몸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루벤은 그녀가 부상 중일 것이라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해서, 이토록 체력이 바닥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시간이 없는데…… 조금이라도 빨리…….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약제국보다 훨씬 더 가까운 곳에 아셰의 궁이 보였다. 한 번도 몰랐지만 눈을 가늘게 뜨고 살펴보니 가늘게 오솔길이 이어져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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