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69/256)

69화.

만일 다니엘이 남들의 눈에 비친 것처럼 착하고 온순한 남자였다면 이렇게 빠른 시간 내에 정치권을 휩쓸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는 미혼인 자신의 위치를 정치적으로 굉장히 잘 이용함과 동시에 윌리엄과 비슷한 정치 노선을 따름으로서 윌리엄의 세력을 포섭하는 것에 성공했다.

“아셰.”

아셰가 눈을 가늘게 뜨고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요즈음 다니엘은 너무 바빠서 아셰와도 제대로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저런 목소리로 부른다는 것은 자신에게 또 다른 부탁이 있다는 뜻이었다.

“리젠을 무사히 찾고, 또 모든 것이 끝나면, 나 리젠에게 청혼할 거야.”

“어머, 역시나.”

별로 놀랍지도 않다는 듯 아셰가 무성의하게 호응했다.

“그렇게 되면 나 좀 시집 안 보내면 안 돼? 늙어 죽을 때까지 여기 살면서 리젠이랑 놀게.”

“그런데…….”

아셰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며 다니엘이 중얼거렸다.

“받아 줄까?”

“……그건 모르는 일이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아셰가 어깨를 으쓱했다.

“말했잖아. 난 이제 리젠 마음을 잘 모르겠어. 옛날엔 너무 눈에 보여서 문제였는데 말이야. 다니엘, 이런 데 신경 쓸 여유가 없다는 건 알지만 내가 누누이 말했듯이 여자의 마음은 기다려 주지 않아.”

“별로 걱정되지 않았는데 말이야…….”

다니엘이 초조한 듯 팔짱을 끼고 시선을 먼 곳으로 돌렸다.

“너무…… 괜찮은 놈이 라이벌인 것 같아서.”

“세상에. 누구? 누구?”

“남자가 봐도 좀 멋있는 놈.”

“설마…… 카이든 루스?”

아셰가 벌떡 일어서서 두 손을 입에 가져다 댔다.

“오빠가 인정할 만한 남자가 카이든밖에 더 있어?”

“…….”

“큰일 났네. 완전 막강하네. 세상에, 오빠, 카이든이 학창 시절에 얼마나 인기가 많았는데…… 잘생기고, 몸도 좋고, 체술도 기가 막히고, 모든 면에서 우수하잖아. 그 뿐이야? 요새 수사국 제복 입은 거 가끔 보면 더 멋있어졌던데.”

“유치하게 들리겠지만…….”

호들갑 떠는 아셰에게 미간을 찌푸리며 다니엘이 낮게 말했다.

“만일 내가 왕이 되면, 리젠에게 훨씬 더 많은 것을 해 줄 수 있어. 그 애를 위해 며칠씩 무도회를 열고, 그 애를 위해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궁을 지어 줄 수도 있겠지. 원한다면 약제국에서 계속 근무도 하게 해 줄 거야. 그 애가 그렇게 존경한다는 이브나 왕비의 계보를 잇는 산하기관 출신 왕비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다니엘.”

아셰가 한숨을 쉬었다.

“우리야 그런 게 최고라고 교육받고 자랐지. 남들 위에 군림하고, 다스리고, 권력을 잡아 대의를 실현하고, 어리석은 형제의 밑에서 고통 받는 백성들을 외면하지 말라고…… 그렇지만 리젠은 달라. 걔는 그냥 평민이야. 르엘라를 생각해 봐. 과연 르엘라가 그런 걸 원했을까? 우리의 기준으로 그 애를…….”

“나도 알아. 그렇지만 내가 줄 수 있는 그런 것으로라도 잡아 두고 싶어.”

다니엘이 아셰의 두 손을 잡았다.

“……도와줘.”

아셰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다니엘의 인형 같은 얼굴을 쏘아보았다. 다니엘에게서 이런 표정을 본 것이 처음이라, 그녀는 차마 깔깔대며 놀릴 수 없었다.

“넌 리젠의 가장 친한 친구잖아. 날 좀 도와줘. 그 애가 내 곁을 떠날 수 없게…… 나는 카이든과 입장이 달라. 궁에 매여 있다고. 리젠의 곁에 계속 있어 줄 수 없어.”

“음…….”

“나라고 리젠의 옆에 있고 싶지 않겠어? 하지만 난 너무 바쁘고, 궁에서도 쉽게 나갈 수 없어. 지켜보기만 할 수는 없어. 카이든과 그 애가 궁 밖에서 뭘 하고 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타오를 것 같아. 그 애를 잡아 두고 싶어, 이 궁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동생의 손을 잡은 다니엘의 팔에 힘줄이 섰다.

“도와줘.”

“카이든이 어지간히 신경 쓰이나 보네. 이렇게까지 하고.”

아셰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도와줄게. 과연 사랑이라는 게 누군가가 도와준다고 해서 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그리고 말이야, 다니엘, 질투에 눈이 멀어 지금 아무것도 안 보이나 본데…….”

그녀가 그의 손을 토닥이고 나서 애를 달래듯 말했다.

“리젠부터 찾아.”

* * *

카이든은 허름한 여관방 침대에 누워,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다들 자신의 정체를 들키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이해하시죠?”

“다, 당연하지요…… 저만 해도, 절대 남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걸요.”

“그러니 서로의 보안을 위해서 각자 방에서 나오시지 마시고, 그냥 저희가 준비한 식사만 드시며 기다리시면 됩니다.”

캐서린의 말에 따르면, 이 여관의 방마다 모두 한 명씩 마법사들이 들어가 있다는 뜻이었다. 마력증폭에 귀가 솔깃하지 않을 마법사는 없었다. 예전에 마력이 대륙에 충분했을 때에는, 마법사의 위상이 지금보다 말도 못하게 높았다고 하니 당연히 구미가 당길 것이다. 사실 옆방에 어떤 마법사가 들어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상당히 신분이 높은 귀족이 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산하기관의 직원이 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마력의 유혹은 마법사에게는 그만큼 대단한 것이니까.

리젠 역시 선택 과목이 마법이었고, 그래서 마법을 쓸 때마다 달리는 마력 때문에 짜증난다고 학창시절부터 투덜거렸다. 마법사가 아니었던 리젠이 그럴진대, 정말로 마법에 미친 마법사들은 당연히 이런 불법 임상 실험에 참여하고 싶어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캐서린이 정말 악랄하다고 느낀 것은, ‘부작용이 있을 수는 있는데 아직 밝혀진 바는 없다’라고 뭉뚱그려 얘기할 뿐 마력 역류에 의한 급사 증상이 6개월 이내에 나타난다는 말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마법사들을 다 익명에 감추어 서로의 존재를 모르게 함으로써 각자 흩어서 혼자 죽어 버리고, 자연히 증거를 없애는 효과가 있었다.

가만히 누워 있자니 리젠의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이 끝나고, 최종 재판에서 모든 진실을 밝히고 나면…… 정말로 루스 지역에 초대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입사 후 휴가는커녕 제대로 휴일에 쉬지도 못했으니 긴 휴가를 받아서, 오랜만에 집에 가고 싶었다. 생각해 보니 고등학생 때부터 아메니티에 올라와 정말 악에 받쳐 살았다.

슬프게도, 열일곱 때 가슴을 타오르게 했던 분노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 열기가 많이 가라앉았다. 시간 앞에 카이든 역시 부모님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사춘기 때부터 낯선 환경에서 어두운 성격으로 혼자 자랐다. 이제 진실을 다 밝히고, 범인들에게 죗값을 치르게 하면 과거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행복하게 살 것이다. 말이 없는 그가 유일하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눌 수 있던 밝고 명랑한, 그러면서도 깊은 어둠을 감추고 있던 그 여자애와 함께.

다니엘의 곁에 머물겠다고 졸라도, 이제 곧 겨울이니 루스에는 눈이 잔뜩 내릴 것이고, 썰매도 하루 종일 가르쳐 주겠다고 하면서 설득해야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썰매뿐인가. 운동신경이 좋은 리젠은 분명 루스 지역 아이들이 저수지가 얼면 종종 다 같이 타는 스케이트도 좋아할 것이다. 눈을 맞으며 강아지처럼 흥분했던 리젠을 생각하는 그의 입꼬리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작은 산장에서의 하룻밤도 좋아했던 그녀인데, 루스 성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아늑하고 전망 좋은 손님방을 내준다면 얼마나 좋아할까.

그렇게 좋아하던 약초를 잔뜩 캐라고 뒷산에도 한번 데려갈 것이다. 그때에는 조금 더 큰 배낭을 가져가서, 코트 주머니에 흙 묻은 약초를 쑤셔 넣고 가는 꼴은 보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식사입니다.”

온통 풀로만 이루어진 접시가 문 앞에 탁, 하고 놓여졌다. 카이든은 대충 먹는 척하고 잘게 찢어 화장실에 버린 다음, 망토 속에 숨겼던 건빵만 몇 개 먹었다. 어쨌든 적이 주는 음식은 먹지 않고, 무슨 상황에서도 경계를 풀지 않는 것이 잠입의 기본이었기 때문이다. 이틀 밤은 더 여기서 묵고 이동하는 것 같았으므로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주의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안 먹는데요.”

여관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수면제를 탄 식사를 제공했는데도 불구하고 불빛 아래 그의 실루엣이 멀쩡하게 움직이는 것을 본 캐서린과 그의 일당들이 수군거렸다.

“그래도 들키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얌전히 저기 있는 걸 보면.”

“정면으로 붙었다가는 열 명이 달려들어도 안 돼. 괴물 같은 놈이라고 들었어.”

캐서린이 마른침을 삼키면서 중얼거렸다.

“먹는 걸로 안 된다면 다른 방법을 써야지. 한 번에 죽일 수는 없어도 습격 전 기운을 뺄 수는 있을 거야. ‘리파드의 숨결’을 제작해야겠어.”

“아, 저놈도 숨은 쉬긴 할 테니까…… 그래도 그건 유색 기체라 바로 눈치챌 텐데요.”

“아무리 수사국 출신이라고 해도, 이런 식으로 방심시키면 잠을 자지는 않더라도 눈은 잠시 붙일 수밖에 없을 거야. 그때를 노린다.”

리젠은 눈을 떴다. 얼마나 실신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시간도, 위치도 알 수 없었다. 어느 정도 다시 마력이 찬 것 같아 불을 붙여 보았더니, 저 멀리 건빵과 물이 있는 것을 봐서 그렇게 많이 이동하지도 못하고 쓰러진 것 같았다. 다시 사그라지는 불꽃으로 황급히 길을 비추었지만 기대했던 발자국의 흔적은 제대로 찾을 수 없었다. 갈림길 한 번만 나오면 헤매게 될 것이 뻔했다.

“안 돼…… 안 돼, 카이든…….”

그녀는 끙끙대며 몸을 일으켰다.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등의 상처는 더 심해져서 거의 등을 세울 수조차 없었고,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분명히 너무 많은 생각 때문에 암흑 속에서 미쳐 버릴 것 같았는데, 지금은 그저 카이든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함정이야…… 거기서 나와…….”

비틀거리며 일어나다 다시 쓰러진 리젠은 숨을 몰아쉬고 왔던 길을 기어서 되돌아가, 물을 마시고 건빵을 아그작, 아그작 씹기 시작했다. 배는 하나도 고프지 않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죽어라고 중얼거려 봤자 어디서 뭘 하는지 모르는 카이든에게 전달될 리가 없었다. 길을 헤매다 죽더라도, 이렇게 가만히 앉아 아무것도 안 하다가는 정말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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