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256)

68화.

‘카이든.’

서로의 능력을 믿고 등을 대며 의지하고 있는 동료이면서, 서로의 상처를 품어 주는 친구이면서, 무방비하게 잠들 수 있는 가장 편안한 사이이면서, 서로를 이성으로 어쨌든 원하고 있다. 단순히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정의하기에도 부족한 관계.

‘난생처음으로…… 혼자라는 기분이 안 들어.’

절대 포기할 수 없다. 이 세상이 모두 리젠과 다니엘을 연결시킬지라도, 리젠이 그에게 확답을 절대 해 주지 않다고 하더라도.

“로이스 프람 님 되시죠?”

약속 시간이 되어 캐서린의 상점으로 가니, 과연 사전에 말이 된 대로 어린아이가 명단을 든 채 아는 척을 했다.

“일찍 오신 분들이 많아서 먼저 이동하셨어요.”

로이스 프람은 카이든이 쓰고 있는 가명이었다. 명단에서 야무지게 ‘로이스 프람’이라는 이름을 지우는 아이를 보며 카이든은 아무 의심 없이 기다렸다.

“주의 사항은 다 들으셨을 거예요. 숙소에서 이틀간 채식만 하시고…… 마력 모으는 데에 협조만 해 주시면 돼요. 아, 마침 사장님 오셨네요. 따라가시면 될 거예요.”

카이든은 눈을 훨씬 더 작게 보이게 만드는 안경을 밀어 올리며, 덥수룩한 밀짚 색깔 머리카락을 황급히 매만지는 척을 했다. 등까지 구부정하게 만들어, 누가 봐도 음침해 보이는 약해 빠진 마법사였다.

“로이스 프람?”

마법사들의 숙소에서나 볼 줄 알았던 캐서린이었다. 화려한 보석으로 온몸을 치장한 캐서린이 그를 보고 깔깔대며 웃었다. 그의 어깨에 손을 두르고, 캐서린은 그의 뺨을 톡톡 쳤다.

“예, 예…….”

“다른 마법사들 모이길 또 언제 기다려? 지금 나랑 같이 갑시다. 가는 길에 태워다 줄게.”

“예에…….”

구부정한 자세로 카이든은 일어서서 캐서린의 뒤를 따랐다.

“야, 야!”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가 없었다. 툭, 툭 치는 발길질에도 리젠은 반응할 수 없었다. 화르륵 횃불이 붙고, 찍힌 자국이 선명하게 얼굴에 흉터로 남은 남자가 풀어져 있는 리젠의 동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뭐예요? 죽은 건 아니죠?”

그는 혼자 온 것이 아니었다. 두 명이었다. 축 늘어지는 리젠의 몸에 대고 횃불을 가까이 해 보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을 보고 조금 더 가는 목소리가 기겁해서 물었다.

“아니야.”

가벼운 발길질에 다시 그녀의 몸이 땅바닥에 형편없이 굴렀다.

“정신을 놓은 거야. 살아는 있어.”

물통을 새로 갈고, 건빵을 우르르 쏟는 소리가 들렸다. 리젠은 사실 희미한 의식이 있었으나, 정말로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토록 반사 신경이 좋던 몸이 횃불이 지척에 왔는데도 반응하지 않았다.

“제 고모 닮아서 정신이 약한가 보지, 뭐.”

“미쳤으면 어떡해요?”

“그러게. 표정 보아하니…….”

남자의 거친 손이 그녀의 턱을 들고 자세히 살폈다.

“뭔가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은데…… 물 좀 줘 봐.”

그가 리젠의 마른입에 억지로 물을 부어 놓고, 철썩 뺨을 때렸다. 리젠의 텅 비었던 눈에 어느 정도 초점이 돌아왔다. 의식과 무의식 속에서 헤매던 리젠의 시야가 흐릿하게 밝아져 왔다.

“야, 야! 무슨 말이라도 좀 해 봐!”

리젠은 입술만 달싹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고, 답답한 듯이 그가 리젠의 뺨을 한 대 더 쳤다. 쿨럭, 하며 물을 쏟아 낸 리젠이 중얼거렸다.

“가치 판단 위에 항상 진실을 둘 것.”

가늘게 이어지는 리젠의 목소리에 두 남자가 미심쩍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람의 특성을 믿지 말고, 결론을 정해 둔 뒤 일을 시작하지 말 것.”

“뭐라는 거야?”

“어떠한 외부 압력이 있더라도 사실을 은폐하지 말 것.”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목소리가 괴기스러워서 그는 리젠을 툭, 하고 던져 버렸다. 그나마 입에 고여 있던 물이 바닥에 주륵 흘렀다.

“진실은 하나이고 사람의 생각은 오류가 가능하므로, 보고 싶은 것만 보며 멀쩡한 증거를 외면하지 말 것.”

“이거 뭐예요? 수사국 강령 비슷한 거 아니에요?”

발을 뒤로 끌면서 조금 어린 남자가 섬뜩하다는 듯 물었다. 마치 정말로 미친 사람처럼, 리젠은 가냘픈 숨소리 위로 말을 이었다.

“……벽에 부딪혔을 때에는 정보가 부족한 것이므로, 최대한 정보를 더 모으고 합리적으로 연결고리를 찾아 퍼즐을 맞춰 볼 것.”

“쟤 계속 이러는데요? 진짜 미쳤나 봐요.”

캄캄한 길 안에서, 여자 하나가 눈에 초점을 잃은 채 영혼 없는 목소리로 다른 것도 아닌 수사국의 강령을 읊고 있는 광경을 보는 것은 상당히 소름 돋는 일이었다. 전문 훈련을 받은 것처럼 날래던 젊은 여자가 횃불 하나 다가오는 것도 피하지 못한 채 알 수 없는 말만 중얼거리고 있었다.

“범인 선상에 사건으로 인해 이익을 보는 사람을 올리되…….”

이 캄캄한 어둠 속에 혼자 있으면 미칠 수도 있겠지. 집안 내력이 있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판단한 그들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리젠은 가느다랗게 이어지는 의식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끊임없이 되뇌었던 수사국의 강령을 중얼거렸다.

“……수사하는 자가 모든 것을 알 수 없음을 명심할 것.”

“가자. 어쨌든 살아 있으니. 멀쩡히 제자리에 있는 걸 보면, 제정신 돌아오면 뭐라도 주워 먹고 있겠지.”

발자국이 천천히 멀어졌다. 거의 실신의 경계에 놓여 있던 리젠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돌아온 것은, 그들이 멀어지며 나눈 대화가 귀에 들리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저 계집애는 저렇게 계속 두고…… 그 수사국 남자는요? 마법사로 위장해서 들어왔다는.”

“캐서린한테 이미 얘기 다 했지, 뭐.”

조용한 길에 발자국에 가려 잘 들리지 않았지만, 민감해진 리젠의 귀는 ‘수사국’이라는 단어에 순식간에 반응했다. 떠돌고 있던 의식이 천천히 돌아왔다. 그녀는 흙을 움켜쥐며, 온갖 힘을 이끌어 마력을 귀로 보냈다. 청력을 높이는 것은 굉장히 효율이 안 좋은 마법이어서 곧 기절할 테지만, 그래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 수사국 남자’가 뜻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너무나 명백했기 때문이다.

멀어지는 목소리를 필사적으로 따라잡으려던 리젠은 마력이 부족해지자 결국 등의 상처를 봉합하고 있던 의원의 마력까지 끌어 올렸다. 타오르는 듯이 등이 아파 왔다.

“대충 다른 마법사들이랑 격리시키고, 따로 해결하라고 했어.”

“함정이군요.”

“어, 수사국에서도 전무후무한 능력자라고 평가받는 놈이야. 정면 돌파하면 승산이 없어. 함정을 파 놓고 기다렸다가 조용히 죽이면 돼.”

“그것도 쉽지 않겠는데요. 그렇게 능력자라면.”

“그래서 그럴듯하게 꽤 오래 속여야 해…….”

리젠은 등 뒤의 상처가 너무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나왔으나 그런 걸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무의식을 헤매던 정신이 ‘수사국 남자’라는 말에 바로 돌아왔다. 함정이다. 더 어울리는 단어도 없다. 캐서린의 약초 상점에 마법사로 위장하여 들어간다던 그의 말이 생각났다. 이미, 이미 다 들킨 것 같은데!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들이 멀어지는 발걸음을 쫓아가면 밖으로 나갈 수 있을지 몰랐다. 축 늘어진 팔다리를 힘겹게 일으켰지만 부들부들 떨렸다. 오랫동안 굳어 있던 근육은 비명을 질렀고, 마력을 뺏긴 등의 상처가 화끈화끈 불타오르는 것처럼 통증을 호소했다. 그래도 리젠은 이를 악물고 엉금엉금 기었다. 이쪽으로 가다가, 시간을 지나 마력이 좀 회복되면 불을 켜서 발자국을 추적해 보자…… 팔꿈치에 흙이 쓸려 아팠다.

“안 돼…….”

마른 입술 사이로 절망적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안 돼…… 안 돼, 카이든…… 안 돼…….”

젖 먹던 힘까지 쏟아 내어 앞으로 기어 나갔으나, 온몸에 있는 마력을 극도로 끝까지 소진한 탓에 리젠은 얼마 가지 못하고 실신했다.

“너도 전혀 짐작 가는 곳이 없다고?”

다니엘의 표정에 참담함이 자리 잡았다. 심각한 다니엘의 표정에 아셰 역시 손톱을 깨물며 눈에 띄게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혹시 먼저 몸을 피한 건 아닐까? 리젠의 집이 습격당했지만 결국 못 찾았다며.”

아셰가 절박하게 말했지만, 그럴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는 것은 두 남매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만일 리젠이 몸을 피하려고 작정을 했다면 당연히 궁으로 왔을 것이다. 르엘라 외에 일가친척이 없는데다가, 가장 안전한 궁에서 왕족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데 대체 다른 곳 어디에 간단 말인가?

“약제국에서는? 별말 없어?”

“병가 중이라는 말만. 괜히 걱정만 끼칠까 봐 더 물어보지는 않았지.”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당연히 아셰의 궁에 왔어야 했다. 아셰는 사실 전혀 바쁘지 않은 날들을 보내고 있었으며, 리젠이 온다면 두 팔 벌려 맞아 주고 언제까지나 신변 보호를 해 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빠, 나…….”

아셰가 아랫입술을 깨물고 생각에 잠겨 중얼거렸다.

“내 궁으로 오는 모든 길을 개방할 거야. 그렇게 알아.”

아메탄에서 궁의 구조는 몹시 복잡했다. 자신의 이익 관계를 위해 형제를 살해하는 것을 공공연하게 인정하는 왕족 교육을 받은 만큼, 다들 자신의 궁 보안을 철저히 여겼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길이 연결되어 있었으나 자의에 의해 막거나 은폐할 수 있었고 대다수의 왕족들이 대다수의 길을 막아 놓곤 했다.

“혹시나 리젠이 쫓길 때에, 조금이라도 헤매지 않도록.”

“그래.”

다니엘이 그제야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중얼거렸다.

“그걸 부탁하러 온 것이기도 해.”

“어머.”

아셰가 한숨을 쉬었다.

“사랑에 정신 팔려서 여동생의 보안 같은 건 보이지도 않나 보지?”

“그렇게 느꼈다면 미안하네.”

다니엘이 싱긋 웃었다. 아셰는 경험상 그 웃음은 그저 공기와도 같은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습관, 버릇,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하는 행동. 온화하고 다정한 그의 미소에 넘어가는 여자들이야 많았으나, 아셰가 판단하는 다니엘은 전혀 착한 남자가 아니었다. 애초부터 왕족 교육을 받고 자란 왕족들 중에 착하고 온순한 사람이 있기나 할까. 그것은 어렸을 때부터 주입된 가치관이기 때문에 선악을 떠나 특성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래도 내 궁을 그렇게 만들 수는 없으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