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그래서 다니엘은 루벤과 마주 보고 있는 이 상황이 본인으로서도 굉장히 당혹스러웠으며, 그동안 루벤을 ‘테스티의 아들’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뭉뚱그려서 ‘테스티의 편’을 적으로 삼아 온 그는 루벤이 대체 얼마나 알고 있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자신이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것 또한 상대에게 정보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말을 꺼내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차 같은 건 없다.”
루벤이 성의 없게 말했다.
“그런 거 안 마시니까.”
궁에 방문한 손님에게 차와 다과를 내어 주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였지만, 루벤은 건성으로 앉아 무뚝뚝하게 말했다.
“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예법을 무시한 채, 퉁명스럽게 말하는 그의 눈빛에 귀찮음이 스쳐 지나갔다. 상대가 어느 정보를 갖고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자신의 정보는 뺏기지 않아야 하는 이상한 대화가 시작되려고 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단정하게 자르지 않아 대충 뒤로 묶은 금발 머리와 탁해진 푸른 눈을 바라보며 다니엘은 그와 새삼 형제라는 것을 다시 상기했다. 마치 테스티와 싸우고 있는 기분이었으나, 사실은 왕위를 놓고 다투고 있는 유일한 상대라는 것도. 다니엘이 그와 대조되는 깔끔한 얼굴로 다정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습관적으로 웃음을 띠고 말을 고르는 그의 단정한 얼굴을 바라보며 루벤은 거칠게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찾아오는 놈들 용건이야 다 뻔하지.”
분명히 왕족의 예법을 체계적으로 배웠을 것이 분명한데, 평민들이 쓰는 언어와 말투를 그대로 재현해 내는 것이 한두 번 궁 밖에 나가 본 품새가 아니었다. 그나마 그 동안 회의에서 만났을 때에는 자세는 불량해도 경어로 완전한 문장을 만들어 내곤 했는데, 이렇게 사적으로 만나니 쏟아 내는 말에 거침이 없었다.
“물어볼 것이나 부탁할 것이 있나 봐?”
“어쩔 수 없잖아.”
다니엘이 부드럽게 말했다.
“살다 보면, 당연히 누구한테 물어보거나, 부탁한 적이 있을 것 아니야?”
“난 그런 적 없다.”
그가 손을 내저었다.
“난 이제 남한테 궁금한 것도 없고 원하는 것도 없어.”
다니엘은 이런 유형의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었지만, 그래도 카이든이 종종 말하던 시정잡배들의 말투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너한테 딱히 대답해 줄 것도 없고, 무슨 부탁인지 궁금하지도 않으니 그냥 가.”
그래도 피가 섞인 동생이고, 게다가 왕위를 놓고 대놓고 경쟁하는 사이라면 어떤 말을 하는지 궁금할 법도 한데 루벤은 완전한 무관심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어릴 적부터 그의 시선은 항상 궁 밖으로 나돌고, 형제들에게 그 어떤 애착도 느끼지 않았다. 회의에서도 가끔씩 보이는 무료함과 가끔 보수파 귀족들에게 보이는 적대감이 그가 관찰할 수 있는 루벤의 전부였다.
“귀찮아하는 것 같으니 빠르게 끝낼게.”
다니엘은 결국 한숨을 한 번 쉬고 빠르게 본론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리젠 어디에 있어?”
“뭐?”
아무도 다니엘에게 루벤과 르엘라의 사이를 알려 주지 않았기 때문에, 다니엘은 리젠의 이름에 루벤이 반응하는 것에 살짝 놀랐다. 그의 무관심했던 눈빛에 순간 날카로움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분명히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 다니엘이 재차 말했다.
“왜 데려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연관 없는 애야. 돌려줘.”
“아하.”
루벤은 의자에 몸을 기대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다니엘과 리젠이 함께 있는 걸 본 적이 있다.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리젠의 어깨를 감싸며 자신을 경계의 눈빛으로 쳐다보던 다니엘의 표정이 문득 떠올랐다.
“너 그 꼬맹이 진짜 좋아하냐?”
어이가 없다는 듯한, 가볍기 그지없는 물음에 다니엘은 기분이 상했다. 마치 어린애들 소꿉장난을 지켜본다는 것 같은, 거리의 불량배가 장난을 치는 것과 같은 말투였다. 그러나 동시에, 흑마법에 대해서 모르는 척하는 건지 정말로 모르는 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다니엘은 일단 감출 수 있는 것은 모두 감추는 쪽을 선택했다.
“나한테 뭘 원해? 내가 뭘 하면 리젠을 돌려줄 거야?”
“미치겠군.”
루벤이 수염을 쓸며 대답했다.
“네가 나한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건 최종 재판 때 조용히 닥치고 있는 거야. 근데 넌 안 그럴 거잖아.”
다니엘이 거세게 항의하려는데, 차마 말을 꺼내기도 전에 루벤이 말을 이었다.
“뭐, 대꾸 안 해도 돼. 네가 사랑에 눈이 멀어 그러겠다고 대답을 하더라도, 어차피 난 그 꼬맹이가 어디 있는지 정말 모르니까.”
“거짓말 마.”
다니엘이 가장하고 있던 다정함을 차마 더 이상 유지하지 못하고 도전적인 눈빛으로 말했다.
“이미 리젠 하카트를 알고 있다는 표정인데. 형이 한낱 약제국 말단 직원을 어떻게 알고 아셰한테도 부르지 않았던 꼬맹이라는 호칭을 써?”
“나 참.”
루벤이 벌떡 일어나 휘적휘적 걸어 문을 열었다. 더 이상 대화하고 싶지 않으니 나가라는 뜻이었다. 예법에 따르면 굉장히 무례한 태도였지만, 일관적으로 불량스러운 자세였으니 다니엘은 더 이상 기분이 상하지도 않았다.
“첫째, 나는 정말 그 꼬맹이가 어디 있는지 몰라. 왜 나한테 이러는지 모르겠네. 그냥 어디 여행 간 거 아니야? 걘 일거수일투족을 다 너한테 보고하면서 사냐?”
그가 턱짓으로 밖을 가리켰다. 다니엘은 이토록 아무런 수확이 없을 줄 몰랐기 때문에 기가 찼다. 원래 개차반인 형제임은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로 자신에게 조금의 거래도 허용하지 않을 줄은 몰랐다. 그래도 형제니까, 반은 피가 섞였으니까, 테스티보다는 그래도 대화가 통할 것 같아 왔더니 정말 모르는지 아니면 그에게 정말로 원하는 게 없는지 조금의 여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둘째, 내가 혹시나 알더라도 너한테 알려 줄 만큼 네게 우애가 깊지 않아. 가슴에 손을 얹고 입장 바꿔 생각해 봐. 이런 상황에서, 넌 내가 뭘 부탁하면 들어줄 셈인가? 약점으로 잡고 뒤통수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왕족 교육 받았으면 알잖아?”
형제가 나를 죽일 수 있음을 항상 경계하고, 남들을 이끄는 위치에서 죽임을 당하지 않으려면 누군가를 죽이는 것에 대하여 개의치 말라. 나를 겨누는 칼을 되돌려 줄 수 없을 정도로 심약한 왕은 결국엔 누군가에게 잡아먹히고 만다. 결국엔 형제 살해를 당연한 인생으로 받아들이도록 이끄는 왕족 교육을 공통적으로 받은 그들 사이에는 불신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이제는 나가라는 듯 루벤이 문 밖을 눈짓했다.
“뭐, 여기까지 온 네 마음은 이해를 해 주지. 사랑하는 여자를 무사히 볼 수만 있다면 칼을 품은 이복형제가 아니라 악마에게라도 영혼을 팔 수 있다는 건 안다.”
모든 것이 예상대로였고, 절차 역시 순조로웠다. 카이든은 불법인 마력증폭약을 스스로 실험해 보고 싶어 안달이 난 비리비리한 마법사로 변장하여 캐서린의 신뢰를 쌓았다. 캐서린은 몇 번이나 그를 정말로 마력에 안달 난 무능한 마법사가 맞는지 확인해 보았으나 카이든의 뜨내기 마법사 연기는 그가 생각해도 완벽해서, 다른 마법사들과 함께 마력증폭약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물론 대가는 있어.”
캐서린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별거 아니야. 일단 약이 잘 드는지 우리도 좀 확인해 봐야 할 것 아니야? 그러니까 약을 먹고, 마력이 넘쳐나거들랑 그 마력 좀 한군데에 모아 줘. 우리도 다른 연구에 쓰려고 그래. 마법사가 아니니 마력을 그때그때 뽑아 쓰는 게 우리는 너무 어렵거든…… 다 같이 모여서, 진짜 마력이 넘쳐나는지 확인해 보고, 다른 곳에 잘 갈무리되는가도 보고. 잘 되면 약이야 계속 줄 테니까.”
불법이므로 관리와 약속이 철저해야 한다며, 캐서린은 복잡한 일정을 빠르게 알려 주었다. 마력을 잘 담기 위하여 외부의 접촉을 피한 채로 이틀간 꼬박 정해진 숙소에서 채식만 해야 하고, 정해진 날에 마법사들이 함께 이동해 모두 모여 약을 먹은 다음, 어딘가에 마력을 저장해야 한다고 그녀는 다소 멍청해 보이는 마법사들에게 단단히 일렀다.
정해진 날짜는 최종 재판의 하루 전으로, 어지간히 상황이 촉박했나 보다 싶을 정도로 급박한 일정이었다. 카이든은 주머니 속의 메신저를 자신도 모르게 꽉 쥐었다. 메신저는 수사국 직원들이 비밀리에 가지고 있는 마법 도구로, 동료들에게 단 한 번 위치를 알려 줄 수 있는 기능이 있었다. 카이든은 마법사들을 이동시킬 때 메신저를 작동시켜, 수사국 직원들로 하여금 현장을 덮치고 증거를 수집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웠다. 마력이 모이는 것을 멈출 수 있다면 흑마법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고, 다니엘도 다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카이든의 속이 또 한 번 착잡해졌다. 짧은 시간 안에 리젠의 마음이 자신에게 오지 않을 것은 알았지만, 결국엔 확답을 듣지는 못했다. 자신에게 안기겠다고 말을 한 걸 봐서 다니엘에게 마음이 깊은 것 같지는 않은데, 확실히 정서적으로 불안정할 때 한 말이라 의미 부여를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이 세상에서 자신만 빼고 리젠과 다니엘의 사이를 명확하게 확정 짓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노려봐 왔던 적들조차. 다니엘을 좋아하는 것이 너무 당연했던 학창 시절의 리젠과, 자신에게 리젠을 양보하지 못하겠다고 말한 다니엘이 어지럽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무도회에서 훔쳐본 그들은 사실상 정말 완벽한 커플처럼 보이기도 했다. 흰 옷을 입고 반짝반짝 빛나던 금발 머리의 왕족, 계획대로만 된다면 곧 왕이 되어 이 나라를 통치하게 될 남자, 아주 오랫동안 리젠의 짝사랑 상대였던 다니엘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꾸만 자신이 동화책의 주인공들을 방해하는 훼방꾼 같은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 너라면…….’
숨소리도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정말로 간절한 눈빛으로 리젠이 그 날 밤 속삭였었다.
‘정말로, 정말로 괜찮을 것 같은데…….’
모두가 다니엘과 리젠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말한다. 시기는 다르지만 리젠도 다니엘이 좋다 했고, 다니엘도 리젠이 좋다 했다. 그러나 리젠을 절대 놓을 수 없는 것은, 자신의 감정이 너무 크기도 해서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 세상에서 리젠과 카이든만이 아는, 몇 가지 단편적인 사실만 가지고는 절대 부인할 수 없는, 그들만이 공유하고 있는 어떠한 관계가 분명히 존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