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66/256)

66화.

카이든과 의원에 갔다 오고 바로 약제국에 왔다. 집을 비운 사이에 왔다 간 것이 틀림없었다. 르엘라의 일기장을 서랍에 넣고 잠가 둔 것이 떠올라 순간적으로 안심이 되었다. 그녀가 그의 배를 팔꿈치로 세게 가격한 뒤 힘이 풀린 사이에 발을 돌려차기 위해 몸에 힘을 주었다.

“……아악!”

몸이 체술은 충분히 기억하는데, 상처 입은 등에서 순식간에 느껴지는 통증 때문에 리젠은 발을 내딛다가 중심을 헛디뎠다. 

“하여간 성가신 계집애군.”

화끈거리는 등의 상처가 눈물이 날 정도로 아파서 리젠은 자신도 모르게 자세가 흐트러지며 급소를 내보이고 말았다. 괴한은 순식간에 그녀의 목 뒤를 내려쳤고, 억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기절한 그녀를 들쳐 업었다. 새벽녘 비 오는 약제국에 누가 있을 리 없었지만, 더 이상 소란스러우면 남의 눈에 띌 위험성이 있었다.

리젠이 병가 중이라고 들었기 때문에, 그는 당연히 집에서 그녀를 납치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이렇게 궁의 한복판, 약제국에서 그녀를 찾을 수 있을 줄은 몰랐다. 궁에는 보는 눈이 많아 밖으로 나가는 움직임이 쉽지 않다. 다만 어디 눈에 띄지 않을 곳에 감금만 해 두면 된다고…… 그의 발걸음이 바삐 궁 쪽으로 향했다. 정신을 잃은 리젠의 짧은 단발머리가 힘없이 흔들렸다.

8. 함정

리젠이 눈을 떴을 때에는 캄캄한 암흑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앉았다. 이 흙의 질감, 이 완전하고 캄캄한 어둠, 한 번 겪어 본 곳이었다. 절반의 확신을 가지고, 리젠은 조심스럽게 주문을 웅얼거려 작은 불꽃을 피웠다. 드디어 보이는 좁은 시야에 리젠은 마른침을 삼켰다. 왕궁 밑에 있다는 지하 미로였다. 카이든과 함께 걸어 본 적이 있었다.

벌써 마력이 달리기 시작해서, 불꽃이 점차 희미해지고 있는데 그녀의 다른 쪽 손에 접시 하나가 잡혔다. 들여다보니 건빵 몇 조각과 물 한 병, 그리고 쪽지 하나가 있었다. 그녀가 마법을 써서 빛을 밝힐 것까지 예상한 듯했다. 쪽지에는 괜히 잘못 움직였다가는 길에 잘못 들어 여러 가지 함정 때문에 죽을 테니 가만있으라는 내용이 성의 없이 적혀져 있었다.

“나 감금당했구나.”

힘없이 죽어 가는 불꽃을 쪽지에 던졌다. 종이를 만난 불이 조금 더 타오르기는 할 테지만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딱 하루 버틸 만큼의 먹을 것을 보고 그녀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살아만 있으라는 거네.”

그녀는 벽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 다시 찾아올 암흑을 기다렸다. 등을 다치니 제대로 앉을 수도 없어 괴로웠다. 무리를 해서 그런지 상처가 화끈화끈했다. 어차피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된다는 것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카이든의 손을 잡고 한 번 걸어 보았던 왕궁 지하 미로는 길을 완벽히 알고 있지 않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기에 딱 좋았다. 일단은 무슨 가치가 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목숨은 살려 주고 있는 듯하니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해 봐야 했다.

방법을…… 강구…… 그러니까 어떻게?

그나마 마음의 안정을 주던 불꽃이 사그라졌다. 그녀는 무릎에 팔을 얹고 암흑 속에서 눈을 깜빡였다. 언제까지 이렇게 갇혀 있어야 할까…… 대체 그녀를 이렇게 의미 없이 가둬 둔 이유는 뭘까…… 적이 너무나 명확했기 때문에 누군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어쨌든 그녀가 무언가 방해가 될까 봐, 혹은 뭔가를 알아낼까 봐 격리시키고, 흑마법에 영향을 줄까 봐 살려 둔 거구나. 어렵지 않게 정답을 찾아낸 그녀는 숨 막힐 듯한 정적에 한숨을 쉬었다.

“이러다 곧 미치겠네. 독방에 가둬 두면 그렇게 다 미친다더니.”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아무런 자극이 없으면 정말 시간이 너무 안 갈 것 같아서 그녀가 건빵을 주워 먹었다. 분명히 한 번 더 올 것이다. 그녀에게 하루치 식량을 더 주고, 멀쩡히 살아 있는지 관찰하기 위해서. 그때 무언가 방법을 강구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긴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잠이라도 왔으면 좋겠는데, 편안한 잠자리에서도 안 오던 잠이 이런 곳에서 올 리가 없었다. 카이든과 함께 한 밤이 특별한 것이었고, 그녀는 어쨌든 불면증을 공식적으로 진단 받은 환자였다. 어지럽게 떠다니는 생각이 그녀를 괴롭혀서, 리젠은 뭐라도 생각해 보려고 처음부터 시간 순으로 사건을 정리해 보기 시작했다.

기억 저편에서 르엘라의 일기장의 문장 하나하나를 되짚고, 사건 하나하나를 떠올려 보고, 그러다가 이브나가 서술한 수사국의 행동 강령을 떠올려 보고…… 모든 기억을 섞어서 재구성해 보고…… 단순히 시간을 보내고, 미치지 않기 위해 시작된 리젠의 생각은 끝없이 계속될 듯했다.

누군가 자신이 실종된 것을 알아줄까…… 병가를 내고 왔으니 출근을 하지 않아도 약제국 직원들은 아무도 자신을 찾지 않을 것이다. 카이든은 잠입 수사를 하러 떠났으니 구하러 올 수 없다. 생각해 보니 자신이 위험에 처할 때마다, 거짓말처럼 카이든이 나타나 다친 곳을 어루만져 주고 집에 데려다주었다. 왜 그런 것들이 항상 고마우면서도 이렇게 엄청난 것인 줄 몰랐을까…….

모든 일이 착착 진행된다고 믿었다.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닥친 이상, 카이든은 괜찮은 것이 맞는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불안함이 올라왔다. 만일, 무언가가 잘못된 거라면 어떡하지…… 카이든에게는 아무 일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손톱을 깨물다가 그녀는 손등에 얼굴을 묻었다.

“그래서…….”

다니엘은 눈을 내리깔고 차분하게 말했다.

“지금 소재를 모른다고?”

그의 어조는 평탄한 것 같았지만, 찻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리젠을 담당하고 있던 호위무사 대표인 켄타는 면목 없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예. 카이든 루스 님이 자신과 있을 때에는 딱히 경호하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저희는 원칙적으로 수사국보다 아래에 있기 때문에…….”

별다르게 문책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다니엘은 켄타에게 카이든과 자신을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그의 명령에 무조건 따르라고 일러 둔 적도 있었다. 다니엘은 그밖에도 많은 일에 신경을 쓰고 있어 너무 바빴기 때문이다.

한 번도 왕위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가, 갑자기 왕관을 쓰려고 하니 그는 몹시 힘들었다. 윌리엄의 기반을 모두 흡수하고, 아직 미혼이라는 위치를 이용해 귀족들의 수많은 지지를 받아 내서 주변의 평가는 좋았지만 정작 그는 굉장히 힘들었다. 그동안 윌리엄과 루벤에 가려져 있어 그의 가치를 몰라 봤다는 인사말이 쏟아졌고, 어릴 적부터 온화한 성품과 정의로운 가치관을 가진 그를 오랫동안 알아 온 이들의 충성의 맹세도 꽤나 많이 받았다. 

영특하고 다정하며 정치적 감각이 있고, 루벤보다는 윌리엄에 가까운 침착한 성정의 다니엘은 테스티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세력을 키웠다. 중도를 지키며 사태를 관망하던 사람들까지 포섭하기 위해 회의에서 합리적이고 현명한 모습을 보이느라 밤새 수많은 학자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카이든이 모든 일을 밝혀내지 못하더라도 루벤에게 왕위를 넘겨주지 않기 위해서 그는 나름 그의 위치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중이었다.

“게다가 리젠 아가씨의 집에 습격이 있어서, 당연히 집 근처에 잠복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집에 바로 오시지 않더라도 워낙에 체술이 뛰어난 분이셔서 어디에 숨어 계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소재가 밝혀지지 않았을 줄은…….”

“어차피, 찾을 수 있는 데까지 찾아봤겠지?”

다니엘이 차분하게 물었다. 켄타가 면목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카이든에게도 아메니티에 돌아오기만 하면 바로 리젠의 호위를 계속하겠다고 말해 뒀는데, 그녀의 집에 괴한들이 찾아오는 바람에 언제 그녀가 아메니티에 도착했는지 파악도 하지 못했다. 

“시간을 더 주면 찾을 수 있나?”

“찾아보겠습니다.”

“의지 말고, 가능성.”

푸른 눈이 켄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켄타는 자신에게 화를 내지 않고, 다만 앞으로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한 주군에게 진심으로 충성심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노력하겠지만……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예 실마리조차 잡히지 않아서…….”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다니엘이 천천히 일어섰다.

“노력해 줘.”

그가 켄타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나서, 재킷을 걸쳐 입었다. 

“어디…… 가십니까?”

단정히 외출 준비를 하는 다니엘을 보고 켄타가 물었다. 다니엘은 단순한 외출 준비 외에도 무언가 마음의 준비를 하는 듯했는데, 그의 입매가 무표정한 인형처럼 굳어 있었다.

“나도 노력해야지.”

“예?”

“리젠은 내게 소중한 사람이야.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어.”

“하지만 왕자님…….”

“게다가 카이든이 아메니티에 그녀를 두고 떠났다는 건, 나를 믿는다는 뜻이기도 해. 그가 맘 놓고 수사를 떠난 건 내가 너희를 리젠에게 붙였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 리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그를 볼 면목이 없다.”

켄타는 다니엘이 궁을 벗어나 사라지는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원칙적으로 그는 다니엘의 호위를 맡지 않았다. 얼른 리젠의 행방을 찾으러 뛰어 다녀야겠지만, 다니엘이 평소에 한 번도 가지 않은 곳으로 가는 것이 왠지 마음에 걸려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잠시 지켜본 리젠 하카트라는 여자는 확실히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다니엘이 저렇게 힘든 발걸음을 하는 것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그가 긴장된 걸음으로 향하고 있는 그 길은 바로 루벤의 궁으로 이어져 있었다.

단연코 다니엘이 루벤의 궁에 온 것은 처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들은 서로를 형제 취급도 하지 않았다. 공적인 자리에서 몇 마디 나눈 것 외에는 대화다운 대화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루벤과 다니엘은 나이 차이가 꽤 나는 편이었는데, 그가 태어났을 때에는 이미 윌리엄과 루벤이 대립각을 세운 정치판이 모두 짜여 있는 상태였다. 그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없이 어머니인 스잔나와 친형인 윌리엄의 편이었고, 실제로 루벤과 얽힌 적도 없었다. 루벤은 그를 미워하거나 싫어한다기보다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윌리엄과 아셰, 다니엘이 셋이 어울리는 동안 그는 항상 혼자 연무장에서 땀을 흘리고 있거나 어디론가 떠나 있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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