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65/256)

65화.

“그래?”

뭔지는 모르겠지만, 카이든은 피식 웃으며 턱을 괴었다.

“축하해.”

그의 무성의한 대답에도 리젠은 설레서 함박웃음을 지었다. 됐다. 이제 그가 잠입수사에서 돌아오면, 해독제와 함께 모든 것을 털어놓고, 정말로 좋아한다고 고백해야지. 정말 염치없게도, 네 마음 역시 이 모든 일에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빌어 봐야지. 해독제를 건네며, 진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꿈같은 것이 연결되지 않는 상태에서 현실을 언제까지나 함께하자고 암팡지게 말해야지. 자꾸만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카이든.”

“왜?”

“나 집에 안 내려 줘도 돼.”

“어?”

“약제국에 내려다 줘.”

“거긴 왜? 주말이야. 아무도 없을걸?”

“상관없어. 내가 약초 건조기를 써야 해서 그래. 우리 집 것보다 훨씬 빠르게 되니까. 아무래도 계량도 약제국에서 하는 것이 더 정확하고…… 오히려 아무도 없으니 더 잘됐다.”

“좀 쉬라고 해도 내 말 안 들을 거지?”

“당연하지.”

그녀가 씩씩하게 말했다. 눈동자에 생기가 가득 돌아와 있었다. 르엘라의 일기장을 얻은 이후 계속해서 공허해 보이는 표정이었는데, 마치 그 이후 처음으로 좋은 일이 생겼다는 듯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알았어. 너 내려 주고 갈게.”

“너는…….”

“난 이제 출장 가야지.”

마부를 의식하며, 카이든이 에둘러 말했다.

“며칠을 그곳에 있어야 해. 그래도 최종 재판 때까지는 돌아올 수 있을 거야.”

“조심해야 해.”

“정말로 끝을 낼 수 있는, 모든 증거를 가지고 돌아올게.”

“……꼭 조심해야 해.”

“필요 없는 소리를 하네.”

그가 피식 웃었다.

“원래가 뛰어난 인재인데다가 특별 훈련까지 받았어. 걱정 마.”

마차는 열심히 달려서, 주말이라 한가한 약제국 앞에 리젠을 덩그러니 내려다 놓았다. 마차에서 내리는 순간,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는 듯이 리젠이 자꾸만 카이든의 얼굴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 표정을 보고 카이든이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한 번 쉬고, 그녀의 상기된 볼에 입술을 짧게 가져다 대었다.

“잘 다녀올게.”

리젠의 표정이 풀리지 않았다. 자꾸만 어느 날 밤, 피투성이가 되어 그녀의 집 문을 두드렸던 그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는 정말 카이든이 그런 모습으로 오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플 것이다.

“걱정하지 마. 이제 길의 끝이 보여. 현장을 멋지게 덮치고, 최종 재판 때에는 정말로 재판을 받게 해 줄 수 있어. 다 끝났다고.”

“그래도…….”

“힘들겠지만 기다려. 수많은 사람들 목숨값을 다 갚게 할 테니까.”

리젠은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르엘라의 죽음을 생각하기만 해도 속에 가득 차는 분노를 갈무리해야 했다. 카이든도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그의 손을 잡고 걸어가면 될 테니까. 말을 못 잇고 카이든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이는 그녀에게 그가 다시 짧게 볼에 입을 맞췄다.

“너도 조심하고.”

이미 피를 뺏긴 이상, 리젠은 딱히 조심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괴한들의 습격을 받을 때 한순간에 제압해 버리던 그의 실력을 떠올리면 걱정할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조심해.”

그의 체온이 남겨진 볼에 손을 대고, 그녀는 멀어지는 마차를 한동안 끝까지 바라보았다. 카이든이 마차 안에서 뒤를 돌아보면 그녀를 확인할 수 있도록. 꼬박 삼 일간 붙어 있다가 헤어지자 또다시 혼자 남은 기분이 들었다. 허전함에 몸을 떨던 그녀가 입 안에서 중얼거렸다.

“돌아와서…….”

마차가 아주 작은 점이 되어 저 멀리 길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꼭 나랑 연애해 줘.”

* * *

“그렇단 말이지…….”

테스티가 호위 무사의 보고를 들으며 턱을 괴었다.

“경험의 부족은 어쩔 수 없어. 어린애들이 다 그렇지.”

그녀의 입술이 부드러운 호를 그렸다. 테스티는 루벤이 태어났을 그때부터 이 아이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왕위에 올리겠다 마음먹었다. 온갖 정치적 술수와 공작을 부려 온 지 30년이 훌쩍 넘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크게 실수한 부분도 있었고, 계획과 어긋날 때도 있었으며, 미숙하여 일을 그르친 적도 많았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다면 이토록 야심을 남들 앞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는 대신, 테스티에게는 30년간의 경험과 촘촘하게 얽힌 부하들이 있었다. 왕비궁 안에서 앉아만 있는 것 같아도 그녀에게는 수많은 정보가 흘러 들어왔다. 얼굴에 하이힐 자국이 단단히 찍힌 호위 무사가 말한 정보는 굉장히 새롭고 중요했으며, 그만큼 테스티의 귀에 들어왔다는 것 자체에 상대의 미숙함이 읽혀졌다.

“분명히 마력증폭약을 먹고 마력을 모아 준다는 제안에 응했던 마법사 중 하나였습니다. 변장이 워낙에 훌륭하고 연기가 그럴듯해서 전혀 몰랐습니다. 하지만 리젠 하카트의 피를 추출할 때 그놈의 눈매를 봤죠. 그렇게 새까만 눈동자는 흔치 않아서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리젠 하카트가 그놈의 이름을 중얼거려서 그때야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얘기네.”

테스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흑마법이 들킨 것이다. 큰일 날 뻔했군.”

“그렇게 판단해야 할 것 같습니다.”

“카이든 루스는 유인해서 없애. 어차피 상점으로 기어 들어올 테니.”

그녀는 맨 처음 졸업 앨범에서 보았던 까만 머리의 청년을 기억하며 가볍게 말했다. 다니엘의 최측근이자 전무후무한 수사국의 인재라고 들었다. 그 쥐새끼 같은 놈이 여기까지 파고들어 있었을 줄이야.

“리젠 하카트는 어떡할까요?”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모르겠군. 하지만 혹시라도 르엘라의 일까지 들켜 버리게 되면 골치 아파져. 그래도 죽일 수는 없다. 서로 사랑하고 있어야 하니, 흑마법이 시행될 때까지는 살려 둬야 해.”

“그럼…….”

“대충 납치해서 아무 데나 감금시켜 놔.”

간단하게 대답한 테스티가 덧붙였다.

“아, 그 계집애한테 감정이 안 좋은 건 알지만…… 그래도 건드리지는 마. 흑마법에 대해 알고 있을 확률이 커. 괜히 험한 일 당하면 다니엘을 원망할지도 모르니까.”

리젠은 주말이라 아무도 없는 약제국에서 혼자 분주했다. 몇 시간 동안 쉬지도 않고 약초를 건조시킨 다음 우려내고, 각종 재료를 쓸어 넣었다. 끼니도 챙겨 먹지 않고, 대체 얼마나 시간이 흐른 지 알 수도 없는 채로 집중하던 그녀의 얼굴에 긴장감이 역력했다.

“제발…… 아마 맞을 테지만, 제발…….”

리젠이 한숨을 쉬고, 옅은 노란색을 띄는 액체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뽑아 조심스럽게 넣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비커 안에서 뽀글뽀글하는 기포를 생성하더니, 시약의 색깔이 투명하게 변했다.

“아아!”

온몸에 긴장이 풀려 그녀는 털썩 주저앉았다. 약제국에 들어오고 나서, 쉬는 날 없이 꾸준히 르엘라의 온갖 노트를 뒤지며 연구하는 동안 이 순간을 언제나 상상했다. 대학 시절, 철없던 자신의 실수를 수습할 수 있게 되는 바로 이 순간.

“됐다.”

그녀가 비커의 시약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드디어 됐어.”

소중히 비커의 시약을 시약 보관함에 넣으며 리젠은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로 가슴을 진정시켰다. 모든 것이 다 잘 되어 가고 있었다. 이렇게 딱 맞춰서, 생각하지도 못한 곳에서 정답이 되는 약초를 찾을 줄도 몰랐다. 모든 일이 예상대로 잘 맞춰서 진행될 것 같은 예감에 리젠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흑마법의 현장을 덮친 카이든은 온갖 증거와 증인들을 끌고 오겠지.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은 며칠 뒤의 최종 재판, 모든 귀족들과 산하기관 직원들이 참석한 바로 그 자리에서 모든 진실은 밝혀질 것이다. 지금 리젠이 속으로 눌러 담고 있는 분노, 슬픔, 허탈함의 대상들이 조금만 더 기다리면 세상 앞에 공개되며 모두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조용히 지켜보고, 카이든에게 해독제를 주고, 모든 것을 말하고,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오게 되면, 르엘라의 무덤 안에 일기장을 함께 묻으며 다시 일상을 살아가면 된다.

카이든은 분노할지도 모르지만, 자신이 차근차근 설명한다면…… 그리고 너를 정말 좋아한다고, 다니엘을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옛날부터 네게 마음이 있었다고, 진심과 함께 전달하면…… 그러면 어쩌면 용서할지도 모른다. 용서하지 못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그게 대가라면 자신도 받아야 할 테니까.

“……비가 오네.”

동이 터 오르는 새벽녘, 아메니티에는 비가 흩뿌리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카이든과 어느 지역에 갔는지 이름도 물어보지 않았다. 그만큼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눈이 소복하게 쌓이던 북쪽 어느 지역의 작은 산장이 떠올라 리젠은 한참 동안을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디 있는지 모를 카이든의 길에는 비가 오지 않기를 바라며, 둘이 함께 또다시 눈을 맞을 수 있는 날이 제발 다시 오기를 바라며.

리젠은 천천히 일어서 기지개를 폈다. 이제 최종 재판 때까지 그녀가 할 일은 없었다. 그녀는 신을 믿지 않았지만 마음 같아서라면 아버지가 있는 수도원이라도 가서 카이든이 제발 무사하기를 기도하며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제야 카이든이 자신보고 수사국에 안 오길 잘했다는 말을 한 마음이 이해가 갔다. 그건 리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한 말이었다. 소중한 사람이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에 처하는 것이 너무나 싫은 마음. 카이든이 조금이라도 걱정하지 않게, 집에서 조용히 있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약제국 밖을 나섰다.

“그냥 맞을 만하네.”

주말 아침의 약제국은 한산했다. 다른 산하기관과는 다르게 뚝 떨어져 위치도 궁과 가까워 한산한 약제국은 정원에 둘러 싸여 있어 경관이 좋고 한적하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지나가는 사람이 극도로 드물다는 단점도 있었다. 빨리 집에 갈 생각에 우산도 펴지 않고 가방 속에 실험복을 둘러쓴 그녀는 순간 느껴지는 기척에 빠르게 몸을 피하며 한 바퀴 굴렀다.

“……여기 있었군.”

리젠의 등 뒤로 소름이 죽 끼쳤다. 눈 밑에 자신이 만든 하이힐 자국. 등이 시큰하게 아파 왔다. 며칠 전의 습격이 떠올라 그녀의 온 세포가 긴장했다. 정신없이 일어나는 그녀의 팔을 남자의 완력이 재빠르게 꺾었다.

“그러니 집을 아무리 뒤져도 안 나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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