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64/256)

64화.

어깨에 느껴지는 통증에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가 카이든의 잠옷 단추를 하나하나 푸르기 시작했다. 이토록 그녀가 적극적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녀가 그의 단단한 복근에 입 맞추자, 폭신한 이불 속에서 두 나신이 엉키기 시작했다.

“아…….”

그녀의 가슴을 움켜쥔 채로, 풀린 눈의 카이든이 중얼거렸다.

“그러지 마. 못 참겠어.”

카이든의 단단한 다리가 사이로 들어와 그녀의 다리를 벌렸다.

“지금 네게 듣고 싶은 말이 있어.”

그의 입술이 내려오며 그녀의 몸에 온통 붉은 꽃을 만들었다.

“알잖아.”

다리 사이로 완전하게 커진 그의 중심이 느껴졌다. 그의 숨이 더 거칠어졌다.

“너도 내가 좋다고…….”

“으으…… 으읏…….”

그의 손가락이 어느새 그녀의 다리 사이로 들어와, 허벅지 안쪽의 가장 여린 살에 빙빙 원을 그렸다.

“이틀간 이렇게 지내면서, 내가 다니엘보다 더 좋아졌다고…….”

“아…… 카이든…….”

그녀가 이를 꽉 악물었다. 숨이 탁, 하고 막힌 그녀가 침대의 끝을 잡고 엎드렸다.

“앞으로도, 내 곁에 계속 있고 싶다고 말해.”

아니야, 아니야. 리젠은 신음 소리를 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힘들 때 같이 있어 줬다고 네가 좋아진 것이 아니야. 나도 모르는 어느 순간부터, 나도 네 꿈을 꿔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기억도 안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네가 좋았어.

그 화려한 무도회에서 다니엘과 춤을 추면서, 너의 행방을 걱정할 때부터였을까.

“얼른…….”

르엘라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이유도 모르는 채로 내 집 소파에서 잠든 너의 얼굴을 한없이 보면서 꼬박 샜던 그 밤부터였을까.

“제발…….”

네가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는 말에, 혼자만의 질투심으로 아무런 관계없는 행정국의 유진을 가끔 마주치면 입술을 깨물던 그때부터였을까.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짜릿한 감각에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리젠이 발가락을 오므렸다.

“카이든…….”

그녀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축 늘어져 말했다.

“너, 너를…… 너를 가지고 싶은데…….”

“그런 말 말고…….”

꿈속에서 하고 싶지는 않아. 리젠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너의 눈을 똑바로 보고, 모든 진실을 다 담담히 얘기하고, 사실은 너를 좋아한 지 나도 오래되었다고, 그저 너무 많은 사건들이 있어서 알아채는 데에 너무 시간이 걸렸다고 차분하게 얘기할 거야. 너의 무의식에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마음을 갖고도 내 곁에서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은 현실의 너에게.

“제발…….”

카이든의 간절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서 부서지듯 전달되었다.

“……미안.”

그녀가 중얼거렸다. 지금 카이든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전달하는 건 의미가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어쩌면 모든 진실을 알려 주고 난 뒤에는 지금 털어놓는 이 감정마저 퇴색될지도 몰랐다. 지금 한 번만 참으면 된다. 이제 최종 재판도 얼마 남지 않았고, 이것이 마지막 잠입 수사다. 다음에 만날 때, 반드시 모든 것을 전달할 것이다.

모든 진실을 알게 되면 카이든은 자신을 어떤 눈으로 볼까. 사실은 무섭고 두려웠다. 그동안 말하지 못한 것은 그런 이유가 컸다. 하지만 르엘라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그녀는 자신이 괴롭더라도 꼭 진실을 알려 줘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그가 떠나고, 몹시 괴로워지더라도. 어쩌면 르엘라가 처음부터 루벤에게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했더라면 이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좋아하는 남자에게 이런 일들을 숨기고 싶은 건 당연하지만…… 두렵고 무섭더라도 말해야 했다. 그녀는 마음의 결정을 이미 내렸다. 진실과 진심을 함께 전하겠다고. 당장 좋아하는 마음도 즉시 전달할 수 없어서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리젠은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눈을 떴더니 먼저 잠에서 깬 카이든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잠든 건지는 모르겠는데, 그녀가 카이든의 팔을 베고 있었다. 그녀의 등이 바닥에 닿지 않도록 그가 단단히 다른 쪽 팔로 고정하고 있는 중이었다.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빛에 안기다시피 했던 리젠의 볼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잘 잤어?”

“어.”

리젠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그가 옆에 있어서 그런지 나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전에 잠들었다. 어젯밤의 꿈이 생각나 그녀의 다리 사이가 움찔움찔했다.

“너는?”

리젠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카이든이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모르겠네. 중간에 깼어.”

“어…… 그렇구나. 오늘 밤부터 잠입 수사라며. 잘 못 자도 괜찮아?”

“며칠 밤새는 건 이제 일도 아니야.”

천천히 리젠이 일어나는 것을 도와주며 카이든이 씁쓸하게 웃었다. 일어나자마자 창문 밖을 내다보았지만, 꿈에서처럼 눈이 한껏 쌓이지는 않았다. 아침 햇살에 거의 다 녹아 버린 눈들이 그늘진 음지에서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약속할게.”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리젠의 얼굴을 보며 카이든이 말했다.

“테스티도, 나람도, 꼭 죗값을 치를 수 있게…… 내가 다 밝혀서 올게. 정당하고, 정의롭게, 그들과 다르게, 진실만을 무기로, 최종재판 때 모든 걸 세상에 공개할게.”

리젠이 살짝 웃었다. 아침 햇살에 그녀의 짧은 갈색 머리가 반짝거렸다.

“힘들겠지만 조금만 참아. 복수가 눈앞에 있으니까.”

“……고마워.”

그녀가 빙글 돌았다. 카이든의 말에 이미 수많은 생각을 감춘 것 같은 그녀가 싱긋 웃었다.

“커피가 있네. 한잔 끓여 먹을까?”

잠옷 차림의 리젠이 주전자에 물을 올리며 콧노래를 불렀다. 또 속을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구나. 분명 저 작은 몸집 속에 분노가 가득할 텐데, 보여 주고 싶어 하지 않는구나. 카이든은 자신을 감추는 리젠이 안타까우면서도 동시에 사랑스러웠다. 그 누구에게도 속을 보이지 않는 그녀가 자신에게만큼은 그래도 우는 모습도 보이고, 간밤에는 안아도 괜찮다는 말까지 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카이든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약제국 도구들이 있으면 진짜 기가 막히게 끓여 줄 수 있는데.”

“아, 그 요란한 커피.”

카이든이 침대 맡에 몸을 기대고 피식 웃었다. 여러 시험관을 현란하게 거쳐 똑똑 떨어지던 커피가 떠올랐다. 그에게 그 커피를 비커째로 건네던 실험복 차림의 리젠도. 다니엘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이 너무 예뻐서 짜증났던 기억이 마치 엊그제 같았다.

“제대로 맛도 모르겠던데.”

“정말? 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리젠이 안타깝다는 듯이 물었다.

“그거 아무나 못 먹어. 진짜 타이밍 잘 맞춰야 먹을 수 있다고. 근데 맛을 모른다니.”

“네가 다니엘 얘기해서.”

카이든이 팔짱을 끼고 중얼거렸다. 너무 좋아서 너무 밉다는 감정을 리젠은 알기나 알까.

“……무슨 정신에 그걸 마시겠냐.”

“엄청난 기회 놓쳤네.”

리젠이 끌끌 혀를 찼다. 따뜻한 커피가 든 머그컵을 양손에 쥐고 그녀가 침대로 다가왔다.

“뭐, 언젠가는 또 끓여 줄 날이 오겠지.”

“너 혼자 야근하는 날, 놀러 갈게.”

카이든이 머그컵을 받아 들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커피 한잔 얻어 마시고, 집까지 데려다줄게.”

“그땐 굳이 우리 집에서 안 자도 되겠지. 곧 모든 일이 끝나 있을 테니까.”

리젠이 발랄하게 말했다.

“굳이 다치지 않아도, 여기는 다시 한번 오자. 너무 좋다. 아메니티에서 비싼 약초들도 많고.”

“여기뿐이겠어? 수사국 출장 다니면서 느낀 건데, 예쁘고 좋은 곳은 많더라.”

카이든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빙긋 웃었다.

“사실 난 아메니티 구경도 잘 못 했어. 고등학교 때 올라와서 공부만 하고, 수사국은 들어가자마자 업무 과다라.”

“하긴, 너 루스 출신이었지. 그럼 메니타 호수 물빛 축제도 못 가 봤겠구나. 항상 시험 기간이었으니까.”

리젠이 그의 옆에 앉아 발을 까닥거렸다.

“내가 같이 가 줄게. 등의 상처도 치료해 줬겠다, 닭꼬치 정도는 사 주지.”

“그러지 마.”

카이든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꾸만 그렇게 내 말에 장단을 맞추면, 나 진짜 다 그럴 거라고 생각하잖아.”

“그럼 가짜로 그러겠어?”

“꼭 데이트 약속 잡는 것같이.”

리젠이 커피를 마시다가 데이트라는 말에 깜짝 놀라 꿀꺽 너무 많은 양을 삼키고, 식도가 덴 것 같아 콜록거렸다.

“꼭 우리가…….”

그녀의 등을 살살 쓸어 주며 카이든이 씩 웃었다.

“연애라도 할 것처럼.”

약속한 시간에 마차가 다시 왔다. 리젠은 아쉬워서 한참을 뒤돌아보다가, 바위 밑에서 노란색 풀을 발견하고 팔짝 뛰었다.

“뭐야? 또 풀이야?”

카이든이 마차에 짐을 싣다가 한숨을 쉬었다.

“배낭 가득 풀이야. 이번엔 또 뭔데?”

“이건 정말…….”

리젠은 숨이 넘어갈 것처럼 제대로 말도 못하면서 급히 손으로 언 땅을 파헤쳤다.

“왜 내가…… 이 생각을…… 하긴, 흔한 약초가 아니니까…….”

웅크려 잔뜩 흥분한 리젠의 뒷모습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카이든이 다가와 직접 노란색 풀을 캐서 건네주었다. 카이든은 약초학에 옛날부터 딱히 흥미가 없어서, 시험을 보고 난 뒤에는 거의 다 잊었기 때문에 무슨 풀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니면 아예 자신이 배운 약초가 아닐지도 몰랐다. 리젠은 뿌리를 하나하나 다듬더니, 비장한 얼굴로 코트 주머니에 소중히 챙겼다.

“그렇게 중요한 거야?”

“어.”

리젠이 그를 보고 활짝 웃었다.

“드디어, 드디어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뭘?”

“아, 리젠 하카트! 타이밍 좋게, 너무너무 완벽하게, 이렇게 해결하는구나! 아, 나 자신, 정말 잘했다! 이제야, 드디어, 적절히!”

리젠의 얼굴에 넘쳐나는 환희가 쉽게 가라앉지 않아서, 그는 그녀를 번쩍 들어 마차에 태울 수밖에 없었다. 출발하는 마차 안에서도 그녀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뭔데 그래?”

“엄청 중요한 거.”

그녀가 그의 얼굴에 뽀뽀라도 할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몸을 한 번 떨었다.

“지금, 내가 약제국에 온 이유가, 하루도 제대로 못 쉬고 연구한 문제가 해결됐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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