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카이든은 리젠의 멍한 표정을 보고, 차마 질문을 하지 못했다. 르엘라의 일기장에 대체 어떤 절절한 내용이 있었기에 저렇게 충격을 받은 얼굴이고, 해독제는 뭐고 약물에 관한 실수는 뭔지…… 조용히 듣고 있는 카이든을 옆에 두고 리젠이 말을 이었다.
“만일 내가 어떤 선택의 기로에 선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리젠.”
카이든이 한숨을 쉬었다.
“미안하지만,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야, 수사국 직원 티 좀 내지 말라니까.”
“그럼 나도 추상적으로 대답할 거야.”
그가 일어서서, 딸깍 하고 불을 껐다.
“인간의 판단은 틀릴 수 있지만, 어쨌든 진실은 하나뿐이야. 어떠한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진실이 이끄는 대로 걸어가. 네가 그러고 싶지 않을 때라고 해도.”
“……알았는데, 왜 불은 꺼?”
“너 자라고. 내일도 마차 타야 하는데.”
카이든은 그녀가 엎드리는 것을 조심스럽게 도와주며 말했다. 리젠이 베개 옆으로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
“근데 왜 너는 옆에 누워?”
“같이 자려고.”
창밖에서 은은히 쏟아지는 달빛에 리젠의 동그란 눈이 그대로 보였다. 카이든이 씩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차에서…… 내가 옆에 있으니까 잘 잤잖아. 수면제도 못 먹이는데 이런 방법이라도 써야지.”
“그건, 단순히 밤을 새서 그런 걸 수도 있잖아.”
“그럼 그냥 밤새 말동무라도 해 줄게.”
카이든이 옆으로 누워 리젠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아메니티에 던지고 온 나쁜 생각이 찾아오지 않게.”
리젠과 카이든의 눈이 한동안 서로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엎드려서 양손 위에 머리를 올리고 있는 리젠과, 옆으로 누워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카이든의 거리가 몹시 가까웠다. 리젠은 침을 꿀꺽 삼키고, 자신도 모르게 속삭였다.
“카이든.”
“응?”
“난생처음으로…… 혼자라는 기분이 안 들어.”
리젠이 눈을 깜빡거리며 말했다.
“고모가 있어도 난 혼자 같았어. 고모에게 나는…… 짐이 아닐까 늘 생각했거든.”
카이든이 쏟아지는 그녀의 짧은 머리를 귀 뒤로 넘겨 주다가, 천천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 하나하나가 얽히며 깍지를 꼈고, 손가락 끝에서 서로의 체온이 느껴져 몸 전체에 전기가 오는 것 같았다.
“리젠.”
그의 검은 눈에 리젠의 얼굴이 가득 담겼다.
“너는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정말로 좋아해.”
창밖으로 눈이 소복소복 내리고, 작은 산장의 침대 맞은편에는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장작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정말로 세상에 둘밖에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리젠이 눈을 깜빡거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네가 이토록 힘들 때에, 곁에 있어 줄 수 있어서 다행이야.”
“카이든, 나는 네게 너무 미안한 일들이 많아.”
리젠의 눈에 살짝 눈물이 고였다.
“너는 괜찮다고 해도, 우리 고모만 아니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사건들인데…… 그렇지만 우리 고모도 정말 불쌍하기 그지없는 사람이라…….”
“한번 사고가 일어나면, ‘만일’ 같은 건 소용없어. 그냥 현재를 봐야 돼. 자꾸 뒤를 보지 말고 앞을 봐. 앞만 보고 가는 거야.”
카이든의 눈에 리젠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나도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정말 슬프고, 억울했어. 남들보다 받아들이지 못했으니 수도까지 와서 수사국에 들어갔지. 그렇지만 계속 슬퍼하고만 있을 수는 없어. 정말…… 정말 슬픈 일이지만 슬픔도 결국엔 잊혀져. 슬픔에 매몰되어 과거에 머무르는 건 우리 부모님이나 네 고모도 바라지 않을 거야.”
이미 리젠이 겪은 슬픔을 온전히 겪어 본 그가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앞을 보고 가야 해. 원망이나 분노에 나를 잠식시키지 말고, 진실을 밝혀 그 사람들이 죗값을 치르도록 하면 돼.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야. 나한테 미안해하지 말고, 모든 일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지.”
“그뿐만이 아니고…….”
카이든이 다른 쪽 손으로 그녀의 볼을 감싸서 리젠의 말을 멈췄다.
“나쁜 생각은 하지 마. 나 내일은 이렇게 네 곁에 못 있어 줘. 말했잖아. 캐서린의 상점에 잠입해야 된다고. 그리고…….”
그가 작은 한숨을 쉬었다.
“좋아하는 여자한테 미안하다는 말 듣는 거 정말 싫어.”
리젠은 눈물을 억지로 삼켰다. 이 남자에게 모든 걸 다 말하고 싶은 욕망이 마음속에 솟구쳤다. 그 어느 때보다 더, 이렇게 세상에 단둘이 있는 것 같고, 영원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있어도 좋을 만큼 평온한 때에는 더더욱. 한 번도 카이든과 이렇게 여유롭고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이 없다. 항상 심각했고, 자꾸 터지는 사건들을 숨 가쁘게 추리해 가며 감정을 숨기기에만 급급했었다.
“특히나 이런 상황에서.”
말하고 싶었다. 모든 진실을 말하고 싶었다. 사실은 학창 시절 때, 너무나 철없을 때 네게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했다고.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지금까지 숨겨 왔다고. 너무나 미안했지만 어떻게든 수습하기 위해 약제국에 가서 죽어라고 해독제를 연구해 왔으니 제발 용서해 달라고. 르엘라의 일기장을 보고 더 생각이 굳어졌다. 비밀이나 거짓말 같은 것은 갖고 싶지 않았다. 카이든의 말처럼, 그렇게 하고 싶지 않더라도 진실을 직면하고 싶었다. 모든 것을 털어놓고 나서 반드시 전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나도 너를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좋아하는 것 같다고.
“카이든.”
그러나 그녀는 그 모든 말을 속으로 삼켰다. 카이든의 말대로, 내일 그는 정말로 중요한 잠입 수사를 하러 가야 한다. 딱 봐도 위험천만한 일인데 괜히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그의 컨디션에 나쁜 영향을 끼칠 순 없었다.
“……나 안고 싶어?”
그녀가 속삭였다. 카이든의 숨이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 이 순간, 너라면…….”
깍지 낀 손에 힘을 주며 리젠이 말을 이었다.
“정말로, 정말로 괜찮을 것 같은데…….”
정적이 흘렀다. 저 멀리서 산짐승이 우는 소리와, 장작불이 타는 소리만 작은 산장 안에 가득했다. 카이든이 살짝 한숨을 쉬고,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리젠 하카트.”
“응?”
“네 마음을 말해 줘.”
그가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금 네가…… 그저 정서적으로 불안해서 내게 기대는 거라면…… 혹시나 내게 미안하거나 고마워서 이러는 거라면…… 나중에 너, 후회할지도 몰라.”
“…….”
“내게 숨기는 것 하나도 없이…… 정말로 내가 좋아? 순수하게 그런 마음으로 너, 그런 말하는 거야?”
리젠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숨기는 것 하나도 없이……’ 그 말이 걸려 대답하지 못하는 리젠을 바라보며 카이든이 싱긋 웃었다.
“너를 안고 싶은 마음이야 당연하지만, 그런 건 너와 내가 같은 마음일 때, 그때.”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카이든이 살짝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댔다.
“나 정도의 자제력 있는 남자 아니면, 이렇게 단둘이 밤을 보내면 안 돼. 거의 대다수의 남자가 이러지는 못할 거야. 난 수사국에서 별별 훈련 다 받은 남자라.”
“카이든.”
리젠이 속삭였다.
“꼭 무사히 돌아와. 다치지 말고, 위험에 빠지지도 말고, 정말 안전하게…… 지금 이 모습 그대로, 꼭 멀쩡하게 돌아와.”
네가 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수사를 마치고 돌아오면, 모든 진실 앞에 증거를 가지고 무사히 내 앞으로 돌아오면, 그때 모든 것을 말할게. 내가 숨긴 비밀, 의도와 다르게 저질러 버린 잘못, 네게 품은 진심, 그 모든 것을 네게 말하고, 숨기고 싶었던 진실 앞에서 네 마음이 떠나지 않게 끊임없이 기도할게. 손에 맞닿은 체온이 따뜻해서 리젠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등이 하나도 아프지 않아서 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밖에 눈이 가득 내려 창문 중간까지 쌓여 있었다. 리젠은 눈을 크게 뜨고 한참 동안이나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새하얗게 쌓인 눈은 난생처음 보았다. 창문에 하얗게 입김이 서리고, 창틀에 서리가 육각형 모양으로 내려앉은 것이 신기하여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데 등 뒤로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안 추워?”
그녀를 뒤에서 꼭 안고 카이든이 귓가에 속삭였다.
“네가 안아 줘서 괜찮아.”
리젠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은 그의 팔에 얼굴을 기대며 대답했다. 하얗게 김이 서린 창문에 리젠의 손가락이 글씨를 썼다.
[카이든 루스]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잠시 멈칫거리던 리젠의 손가락이 망설이며 다음 문장을 썼다.
[미안해]
“……왜?”
그가 리젠을 안은 팔에 힘을 더 주었다.
“왜 미안해?”
“……숨 막혀.”
“미안하다고 하고…….”
리젠이 콜록거리자 그는 안고 있던 리젠을 침대에 그대로 눕혔다. 리젠을 양팔 사이에 가둔 채로 그가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하고, 가 버리려고?”
“아니야, 그건 아닌데…….”
“곁에 있어 봐도 도저히 다니엘을 잊을 수 없다고 하고…….”
그의 검은 눈이 더 깊게 가라앉았다.
“미안하다고 한 뒤에, 다니엘에게 가려고?”
“카이든.”
“그러지 마. 그냥 이대로 있어.”
그녀의 위에 있던 카이든이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리젠은 차분하게 눈을 깜빡거리다가, 양손을 들어 그의 볼을 감쌌다. 천천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
뭐라고 더 속삭이는 그의 입술에 리젠이 천천히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그의 눈이 커지다가 서서히 감겼다. 리젠은 그의 어깨에 양팔을 감고, 조심스럽게 혀를 밀어 넣으며 온몸에 힘을 뺐다.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며 카이든도 적극적으로 키스하기 시작했다. 서로의 몸을 매만지던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엉켜서 침대 위를 뒹굴었다. 카이든이 그녀의 몸을 번쩍 들어 자신의 몸 위로 올렸다. 긴 키스가 끝나고 둘 다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마지막 꿈이 뭐였더라. 그가 싫다고 하는데, 강제로 자신을 탐하려던 꿈이었다. 리젠은 싫다고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고, 그는 자신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며 털썩 주저앉았었다. 그런 꿈이 아니더라도, 보통 패턴이 비슷했다. 카이든의 애무에 정신을 놓은 채로 반응하고, 수수께끼 같은 대화만 나누던 꿈들. 무의식이 표출해 내는 욕정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던 밤들.
“네게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어.”
리젠이 자신의 밑에 있는 카이든에게 작게 말했다.
“그때가 되면…….”
카이든이 그녀의 허리를 감고, 그녀를 당겨 안아 어깨에 뜨거운 입술을 댔다.
“화내지 말고 들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