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카이든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분명히 정신적 내상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약제국에서 조용히 연구만 하던 민간인이 갑자기 괴한들에게 습격을 받고, 캄캄한 골목길에서 채찍질을 당하며 끔찍한 일을 겪었다. 게다가 유일한 가족이었던 고모의 과거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되었고, 본인은 담담히 굴었지만 일기장을 읽었다면 그 감정이 고스란히 전이되었을 것이다. 평소 같았으면 자신보다 더 냉철하게 상황을 분석하고 복수를 위해 이를 갈았을 리젠이 알 수 없는 연구에 매진하는 것은, 그녀가 모든 일을 받아들일 수 있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서인 것 같았다.
제 버릇 어디 못 주고, 그 모든 정신적 타격을 감추고 있는 리젠을 부축하며 마차에서 내렸다. 카이든이 마부에게 값을 지불할 동안 리젠은 그새 추웠는지 배낭에서 코트를 꺼내 입고, 주변을 둘러보며 탄성을 내질렀다. 벌써 산 중턱이었다. 얼마 멀지도 않은 곳에 눈이 쌓여 있었고, 입김이 하얗게 흩어질 정도로 추웠지만 넓게 펼쳐진 산맥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정신없이 주변을 둘러보는 리젠에게 카이든이 털모자를 쑥 눌러 씌워 주었다.
“얼마 안 걸리지만, 조심해서 걸어.”
“카이든! 여기 너무 좋다. 어머, 여기 시람초가 있네? 안 그래도 찾고 있었는데. 아메니티에서는 구하기 힘드니까.”
리젠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팔짝팔짝 뛰어다니며 카이든의 눈에는 순전히 잡초같이 생긴 풀을 소중히 채집해 배낭에 넣었다.
“세상에! 이건 스트림의 붉은 흙!”
이틀 밤을 제대로 못 잔 것이 무색할 정도로 노루처럼 뛰어다니는 그녀를 보면서 카이든이 피식 웃었다.
“와, 고도가 높아서 그런가? 토끼발톱꽃풀이 이렇게 크게 피다니.”
“그런 이름의 풀도 있어? 대체 얼마나 작은 거야?”
정말 용한 의원에게 보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이렇게 기분 전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미소를 보면서 그는 언제까지나 이렇게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어느새 골짜기 끝까지 뛰어간 리젠에게 마음과는 반대로 툴툴대며 소리쳤다.
“의원 가야지! 풀떼기는 이따 캐! 도와줄 테니까!”
갈대처럼 생긴 토끼발톱꽃풀을 한 아름 안은 리젠이 환히 웃으며 다가왔다. 카이든은 순간 볼이 발갛게 상기된 그녀가 너무 예뻐 와락 안아 버릴 뻔했다. 짧게 자른 머리카락 아래로 목이 추워 보여서, 그는 자신이 했던 목도리를 벗어 그녀에게 둘둘 감아 주었다.
“그리고 함부로 돌아다니지 마. 지리를 잘 모르니 위험하고…….”
“카이든.”
리젠이 한숨을 쉬었다.
“잔소리하지 마. 은근히 잔소리꾼이야. 지금 여기서 네가 제일 위험해.”
카이든의 어이없다는 표정에 리젠이 깔깔거리며 웃더니 토끼발톱꽃풀을 와락 그에게 안겨 버렸다. 향긋한 풀 내음이 확 끼쳐 왔다.
“저기 흰색 깃발 단 오두막 맞지? 지리 잘 안다고.”
깡충깡충 뛰어서 의원으로 달려가는 리젠의 뒷모습을 보며 카이든이 피식 웃고 말았다.
수사국 직원들이 위험한 일을 하며 생기는 기이한 상처나 질병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의원인 그는 리젠의 상처를 보자마자 불법적인 약물이 포함되어 있다고 진단을 내렸다. 역시 단순한 찰과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흰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의원이 간단한 마법을 쓰며 리젠의 등을 훑었다.
“최대한 노력해 보겠지만, 흉터가 다 없어지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카이든의 표정에 참담함이 스쳐 지나갔다. 그토록 빠르게 달려갔는데도, 정신없이 뛰었는데도 늦었다. 더 빠를 수 없었다는 걸 알면서도 후회가 되었다. 자신이 조금 더 일찍 갔다면, 그런 끔찍한 기억도, 상처도 막을 수 있었을 텐데. 리젠은 카이든의 어두워진 표정을 보며 살짝 웃었다.
“괜찮아요. 누가 제 등을 보겠어요? 얼굴이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네요.”
“당분간 엎드려서 주무시고, 의자에 기대지 마십시오. 제가 상처도 봉합하고 해독도 했지만, 그래도 최대한 흉터를 옅게 하려면 꽤나 노력해야 합니다.”
“네, 알겠어요.”
리젠은 일부러 더 밝게 대답했다. 카이든이 리젠의 엉망인 등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 오전보다 더 상태가 심각했다. 의원이라도 더 빠르게 왔어야 했던 모양이다. 의원이 각종 약초를 우린 약을 상처에 바르며 계속 당부했다.
“다른 약들과 상성이 맞지 않으니 상처가 다 아물 때까지는 되도록 다른 약을 먹지 마십시오. 흉터가 더 짙어질 겁니다.”
“잠을 잘 못 자는데, 가벼운 수면제도 안 되나요?”
카이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의원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한 달 정도는 조심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의원의 손길이 상처에 닿을 때마다 미약한 마력이 살 속에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리젠은 새삼 자신이 정말로 많이 다쳤구나 싶었다.
“몸 상태를 보니 불면증이 확실하군요. 앞으로도 계속될 테지만, 그래도 수면제는 이 상황에서 독에 가깝습니다. 이 정도 정신적 내상은 시간이 지나면 점차 나아지기는 할 겁니다.”
조심스럽게 다시 옷을 입고, 카이든의 목도리를 둘둘 감고 의원을 나설 때에는 이미 석양이 지고 있었다.
“이 길로 조금 더 걸으면 산장이 하나 있어. 거기서 자고 가면 돼.”
배낭에 토끼발톱풀꽃을 꽂은 채 발걸음을 옮기는 카이든의 모습이 살짝 우스꽝스러워 리젠이 쿡쿡 웃었다. 함께 나란히 걷는데 그녀의 코 끝 위로 작은 눈이 내려앉았다. 리젠이 흥분해서 펄쩍 뛰었다.
“세상에!”
그녀가 장갑을 낀 손을 활짝 폈다.
“진짜 눈 와!”
눈을 몇 년 만에 보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리젠은 생각하며 빙글빙글 돌았다. 아주 어렸을 때, 기상 이변으로 진눈깨비가 휘날린 이후 처음인 것 같았다. 눈은 소복소복 쌓여 곧 그녀의 발자국이 모양을 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카이든! 좋지 않아? 눈이야, 눈!”
그녀가 나뭇가지에 쌓인 눈을 신기하다는 듯 훑자, 카이든이 어깨를 으쓱했다.
“루스 영지에서는 겨울마다 와. 서쪽 지역으로 분류되긴 하지만, 확실히 아메니티보다 북쪽이라.”
카이든은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느라 자꾸 풀어지는 리젠의 목도리를 다시 리본처럼 묶어 주며 말했다.
“그래서 어린 시절, 겨울마다 썰매를 타곤 했는데.”
“썰매?”
리젠이 눈을 반짝였다.
“책에서만 봤어. 언덕을 미끄러져 내려간다는?”
“엄청나게 재미있지. 잘 타는 건 은근히 어렵기도 해. 까딱하다가는 굴러떨어지니까 균형도 잘 잡아야 되고, 속도를 잘 내려면 공기 저항도 생각해야 하고.”
“세상에.”
그녀가 벙어리장갑을 낀 두 손을 마주쳤다.
“듣기만 해도, 난 엄청 잘할 것 같은데. 내가 또 체술에는 굉장한 일가견이 있지.”
“생각보다 어려울걸.”
“나 너무 타고 싶어. 지금은 안 돼? 여기도 눈이 오잖아.”
“안 돼. 막 치료 받고 온 애가 무슨 소리야? 그리고 여기보다…….”
카이든의 표정에 향수 비슷한 것이 스쳐 지나갔다.
“루스가 훨씬 더 낫지.”
“좋은 생각이 났어. 모든 일이 끝나면, 나 루스에 놀러 가야겠다. 썰매 타러.”
“누가 태워 준대?”
턱도 없는 소리 말라는 듯이 카이든이 고개를 젓자 리젠이 뽀로통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진심으로 짜증나는 것 같은 그녀의 눈빛을 보면서 그가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다.
“얌전히 치료 잘 받고, 의원 선생님 시키는 대로 잘 하고, 그래서 등에 흉터 더 안 짙어지면 생각 좀 해 볼게.”
“영지 없는 평민은 서러워서 살겠나.”
리젠이 입을 내밀었다.
“썰매 한번을 못 타고.”
“너 루스에 오면…….”
카이든이 미간을 찌푸렸다.
“다들 그 자리에서 결혼식 준비 시작할지도 몰라.”
“뭐?”
“지방은 수도보다 평균 결혼 연령이 더 낮다고. 이미 난 거기서 노총각이야. 형은 벌써 애가 둘인데. 엄청난 오지랖을 경험해야 할걸.”
그가 그녀의 코를 살짝 비틀었다.
“기억해라. 함부로 다른 남자 영지에 가겠다고 하면 안 돼.”
“와, 또 잔소리.”
리젠이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지만, 카이든이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남자는 착각을 잘해서, 그러면 가족계획부터 세운다고.”
별것 아닌 평화로운 저녁이었다. 숲 속의 밤은 빠르게 찾아왔고, 작은 산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카이든은 여기 오는 것이 처음이 아닌지, 냉동고에 저장된 고기를 찾아 바비큐를 해서 리젠을 먹이고, 씻을 수 있도록 물까지 데워 주었다. 리젠은 이불을 뒤집어쓴 채 창밖에 내리는 눈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카이든.”
리젠이 마실 수 있도록 따뜻한 우유를 준비하고 있던 카이든이 고개를 들었다. 리젠이 무릎을 안은 채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있으니까 모든 게 다 꿈같아.”
리젠은 이렇게 많은 눈을 본 것도 처음이었고, 사실 집 밖을 떠나 자 본 기억도 손에 꼽았다. 늘 북적이는 아메니티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이런 한적한 산에 올라와 산장이라는 곳에서 잔다는 것 자체가 새로웠다. 산속은 가끔 새가 우는 소리 빼고는 몹시 고요했고, 눈에 반사된 달빛이 하얗게 빛나 신비로웠다.
“누군가가 왕이 되기 위해 벌이는 싸움들도…… 미쳐 버릴 수밖에 없었던 고모도…… 정답이 보일 듯 보이지 않는 해독제도…… 멀쩡히 궁에서 숨 쉬고 있는 나쁜 사람들도…… 정말 나도 미쳐 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는데 그런 것까지 다 아메니티에 던져 버리고 온 것 같아. 그냥 이 세상에 너와 나만 아무 생각 없이 존재하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야.”
카이든이 조용히 머그컵에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건네고 옆에 앉았다.
“산다는 게 한 해 한 해 어렵기만 해. 대학생 때만 해도 삶은 힘들지언정 세상은 쉬웠는데. 공부 열심히 해서 수사국 들어간다는 마음밖에 없었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리젠의 시선이 먼 곳을 바라보았다.
“정말 삶이 이럴 때마다 어쩔 줄을 모르겠어.”
그녀는 작은 어깨에 얼마나 무거운 삶을 지고 있는 걸까.
“한 발짝 한 발짝 디디는 것이 무서워. 조금만 방향을 잘못 틀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서. 나도 고모처럼 되면 어떡하지. 결국엔 고모처럼 약제국에 왔고, 고모처럼 약물에 관한 실수를 했는데. 이미 나는 한순간의 실수로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거면 어떡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