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1/256)

61화.

“간단한 것밖에 못해.”

“와.”

카이든의 멋쩍어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식탁에 온 리젠이 짧게 탄성을 질렀다. 먹음직스러운 찹스테이크와 따뜻한 토마토 스튜가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리젠이 부엌 근처에 있는 화분에서 허브를 뚝뚝 따서 샐러드를 하나 만든 다음 식탁에 앉았다. 따뜻한 토마토 스튜를 호로록 한입 먹어 본 리젠의 눈이 커졌다.

“맛있다!”

“다행이네.”

약간은 부끄러운지, 카이든은 똑바로 리젠의 눈을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숟가락을 들었다. 리젠이 호들갑을 떨면서 맛있다는 말을 반복했다. 찹스테이크의 간은 딱 맞았고, 스튜는 따뜻했으며 신선한 허브 샐러드는 언제나 맛이 좋았다.

“근데 뭘 그렇게 연구하는 거야?”

카이든이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리젠은 찹스테이크를 씹다가 눈동자를 한 번 굴리고 천천히 대답했다.

“뭐…… 이것저것?”

“네가 약제국에 간…… 이유랑 관계있는 거야?”

“음…… 뭐 그런 셈이지.”

“르엘라 하카트의 일이지?”

“으음…….”

리젠은 말없이 스튜를 먹다가, 샐러드를 뒤적거렸다. 약간 망설이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카이든.”

“왜?”

“날 좋아해?”

“……어.”

“우리 고모 때문에 너희 부모님이…….”

“리젠.”

카이든이 말을 잘랐다.

“내가 수사국에서 수많은 사건을 접하며 느낀 건 이거야. 그 수많은 변수들을 모두 다 원망하기 시작하면 끝도 한도 없어. 모든 범죄에는 기원이 되는 악이 있어. 그 악을 똑바로 직면해야 해. 어려워도 그게 현명한 거야. 그러니 내가 물어볼게.”

리젠은 마른침을 삼켰다.

“르엘라는 악한 사람이었어? 일부러 우리 부모님을 죽이려고 그런 약을 개발했나?”

“그건 아니지. 그래도…….”

“그럼 르엘라도 피해자야. 물론 나도 사람이니 르엘라를 탓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원망하지는 않아.”

이런 말을 할 수 있게 되기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어떤 생각을 해 온 걸까. 아마 르엘라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막연히 알게 되었을 때부터 혼자 정립한 생각일 것이다. 흔들리는 리젠의 눈빛을 바라보며 카이든은 말을 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널 안 좋아한다거나 하지는 않아. 그건 어차피 의지의 문제는 아니니까.”

“……그럼 내가 네게 큰 잘못을 해도?”

“무슨 질문이 그래?”

카이든이 미심쩍다는 듯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수사국 티 내지 마. 지금 수사하니?”

“지키지 못할 약속은 안 하고 싶어서 그래.”

리젠은 입을 삐죽거리다가, 다시 토마토 스튜를 한 스푼 떠먹었다. 우문은 우문이었다. 자신이 무얼 바라고 이런 말을 꺼냈는지 알 수 없었다. 따뜻한 스튜 위주로 식사를 하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카이든이 냄비에서 스튜를 한 국자 더 떠서 그녀의 앞에 놓아 주었다.

“많이 먹…… 야, 리젠.”

카이든은 무심히 다시 자리에 앉다가, 리젠이 숟가락을 입에 문 채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다시 벌떡 일어섰다.

“뭐야? 왜 울어?”

“아…… 미안.”

리젠은 자신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정신없이 닦으며 말했다.

“나…… 사실 누군가가 차려 준 밥을 먹은 게 고모 죽은 뒤 처음이라…… 고모가 생각나서……. 으음…… 고모의 삶이…… 도저히 한 단어나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나도 너무 혼란스럽고…… 내가 이렇게 밥을 먹고 있는 것조차 나를 용서할 수 없고…… 아, 나 정말 왜 이러니.”

카이든은 휴지를 뽑아 그녀에게 조용히 건넸다.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한 슬픔이 자꾸만 눈물로 넘쳐흘렀다. 일기장을 읽은 이후로 계속해서 그녀 속을 채우던 답답함, 분노, 슬픔, 억울함 등의 모든 감정이 억눌러져 있다가 이런 식으로 분출되고 있었던 것이다. 리젠은 세상에서 자기 자신이 가장 싫다는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카이든, 나 지금 정말 정서적으로 불안정해. 이렇게 밥 먹다가 갑자기 울고, 하루 종일 사실은 너무 우울하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네게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옛날처럼 씩씩하고 밝은 모습으로 널 대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너, 지금 내 곁에 있으면 그다지 네가 행복하지는 않을 거야. 지금은 사실 문득문득 고모도 싫고, 나도 싫고, 이 세상이 다 싫기도 해. 마음 같아서는 루벤도 나람도 테스티도 다 죽여 버리고 나도 죽고 싶어. 그러니까 지금은 내 옆에 있지 마. 이런 안 좋은 모습 너한테 보여 주기 싫어……. 나 지금 내가 너무 마음에 안 들어.”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건…….”

그가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를 다시 묶어 주며 말했다.

“너조차 네가 마음에 안 들 때, 곁에 있어 주는 건데.”

리젠은 카이든이 건넨 휴지로 눈물을 닦아 내며 심호흡을 했다. 왜 카이든에게는 이런 모습만 보여 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습격을 당해서 엉망인 모습이나, 엉엉 울어 못생겨진 얼굴이나, 우울해서 감정을 추스를 수가 없는 모습들. 사실은 예쁘고, 씩씩하고, 당차고 영리한 모습만 보여 주고 싶었는데.

“나, 어차피 계속 네 곁에 못 있어. 캐서린 마법 상점에 마력증폭약을 먹고 마력을 제공하는 마법사로 숨어 들어갈 거거든. 마법사들의 마력을 뽑아내는 곳에서 현장을 덮쳐서, 전부 체포할 거야. 일종의 미끼로 들어가는 거지만, 다른 수사국 직원들이랑 다 얘기해 놨어. 얼마 안 남았어. 최종 재판이 다음 주야. 아마 캐서린 말로는, 흑마법이 그 전에 이루어질 것 같아. 워낙에 다니엘이 생각보다 정치를 꽤나 잘 해서.”

그러나 거꾸로 생각하면, 자신이 약하고 힘들 때 언제나 곁에 있었던 사람이 카이든이라는 뜻 아닐까.

“하지만 곁에 있어 줄 수 있을 때 함께 있어 줄게. 이렇게 그냥 함께 있으면 되는 거지, 넌 왜 사람이 가장 필요할 때 거꾸로 너를 고립시키는 거야?”

카이든은 겨우 진정된 그녀의 앞에 앉아서, 그녀의 손에 숟가락을 다시 쥐여 주었다.

‘너의 우는 모습, 너의 어두운 내면, 너의 엉망인 얼굴을 사랑해 주고, 그 속에서 너의 매력을 알아주는 남자를 만나야지.’

르엘라가 그런 말을 해 줄 때에는, 너무 어려서 그 말뜻을 몰랐는데. 바보처럼 눈물이 다시 비죽비죽 나와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네가 나한테 큰 잘못을 할 일은 없겠지만…….”

카이든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땐 좀 징징거려 보든가. 혹시 알아? 네가 뭔가 나에게 요구한다는 것 자체에 내가 감동받을지.”

다음 날 아침에는 카이든이 우겨 그들은 의원에 가기로 했다. 리젠의 등 뒤에 난 상처가 생각보다 빠르게 아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러 분석 끝에, 그들은 채찍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약물이 발라져 있었고, 그 약물이 깊은 상처를 남긴 것 같다는 의견을 모았다.

“수사국 사람들이 가는 의원이 있어. 좀 멀긴 하지만, 이런 특수한 상처를 잘 보는 의원 선생님이 계시지. 아메니티를 벗어나야 하는데 그래도 갈 만한 가치가 있어.”

“그렇게 멀어? 아메니티도 아니라고?”

수도인 아메니티는 아메탄의 꽤나 큰 도시였기 때문에, 도대체 얼마나 먼 곳이라는 건지 리젠은 살짝 놀랐다. 마차를 타고 네 시간은 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리는 리젠에게 카이든은 정말로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의원이며, 분명히 불법적인 약물이기 때문에 제대로 치료를 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하루에 여덟 시간 마차는 못 타. 그럴 체력은 안 돼.”

“당연하지. 넌 환자인데.”

카이든이 당당하게 말했다.

“거기서 하룻밤 자고 와야지.”

“뭐라고?”

“시간이 딱 맞아. 난 내일 밤에 캐서린의 상점에 가기로 했거든. 지금 얼른 출발해서 치료 받고, 내일 점심 먹고 올라오자.”

리젠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야, 너 지금…… 나보고 남자랑 단둘이 1박을…….”

“이 바보가…….”

카이든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리젠의 머리를 꾹 눌렀다.

“내가 이 집에서 잔 밤이 며칠인지나 알아?”

그래도 리젠의 미심쩍다는 표정에 변화가 없자, 카이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를 뭘로 보는 거야? 밤새 붙어 있어도 너한테 손 하나 까딱 안 할 자신 있으니까 그냥 가자.”

리젠은 꿈속에서 그가 멀쩡히 대련만 하다가도 덮쳤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었다. 하지만 평소 칼같이 딱딱하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카이든의 모습을 보면 당연한 말이었다. 실제로 카이든은 그의 말처럼 리젠의 집에서 며칠을 보냈어도 리젠의 몸에 손 하나 대지 않았다. 말로는 곁에 있겠다며 살갑게 굴어 놓고도, 그 전에는 여러 위기 상황에 닥치며 안거나 업은 적도 많으면서 함께 있으면 손 한번을 함부로 잡지 않았다.

“……알았어.”

어떻게 보면 꿈속의 무의식과 현실의 괴리가 굉장히 큰 남자였다. 그의 무의식이 무방비로 리젠에게 들킨 건 르엘라가 말한 대로 또 하나의 폭력이려나. 리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간단하게 여행 짐을 챙겼다. 리젠의 마지막 여행은 중학교 때 르엘라와 함께 떠났던 렌토 지역이었고, 또다시 그 여행을 르엘라가 어떤 마음으로 갔는지 생각이 나 정신이 멍해졌다.

“북쪽으로 꽤 가야 하니까 겨울옷 챙겨. 산을 좀 타야 해서, 눈이 올지도 몰라.”

“눈?”

상대적으로 남쪽에 있는 아메니티에는 눈이 잘 내리지 않았다. 리젠은 눈이라는 말에 자신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차곡차곡 배낭에 짐을 싸는 리젠의 표정이 순식간에 설렘으로 가득했다. 생각해 보니 여행을 가 본 적도 얼마 없었다. 비록 상처 치료를 위해 가는 곳이라지만 어디론가 길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새삼 흥분되었다.

요 며칠간 많이 상한 리젠의 얼굴을 씁쓸하게 바라보던 카이든이 그녀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마차를 잡으러 나갔다.

마차를 타는 리젠은 바깥 풍경을 보겠다고 잔뜩 신나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도 않아 카이든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었다. 병원 앞에 도착할 때까지 한 번도 깨지 않고 색색 잠들어 있어서, 결국 카이든이 조심스럽게 깨워야 했다.

“이틀 동안 못 잤더니…….”

리젠이 하품을 하며 민망한 듯 눈을 비볐다.

“거의 기절하듯이 잤네.”

“못 잤어?”

“어.”

리젠은 짧은 단발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마차에서 조심스럽게 내렸다.

“그저께는 고모 일기장 읽느라 못 자고…… 어젯밤에는 자꾸 이상한 생각이 나서 잠이 안 왔어.”

“이상한 생각이라니?”

“그냥 습격 받던 날, 고모의 시신을 확인했던 날의 아침, 뭐 이런 기억들이 어지럽게 떠올라서 결국 한잠도 못 잤거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