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60/256)

60화.

전혀 기뻐하지 않는 것 같은 리젠의 얼굴을 보며 카이든이 씁쓸하게 웃었다.

“네가 다니엘을 좋아한다는 건 아는데…….”

“아…… 음…….”

“네 피를 뺏긴 이상…… 나를 좀 이용해 보면 어때?”

“……뭐?”

“내가 너무 싫지만 않다면, 나랑 같이 있자.”

리젠은 예상하지도 못한 말에 너무 당황하여,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카이든이 그녀의 어깨에 양손을 올리고 씩 웃었다.

“혹시 알아? 나랑 계속 같이 있다 보면…… 내가 좋아질지. 내가 좋아져서, 다니엘을 안 좋아하게 되고, 그럼 다니엘도 살 수 있을 것 아니야.”

“카이든…… 음…….”

“너는 다 나중에 생각하자고 했지만, 우리에겐 시간이 없어. 다니엘을 살리고 싶으면 얼른 마음 접어. 그러기 위해 나를 이용해 달라고. 내가 네게, 정말 잘할게.”

르엘라의 일기장 중 이런 내용이 있었다. 단번에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눈빛이 있다고. 리젠은 카이든의 깊은 눈매를 보며 그 문장을 되뇌고 있었다. 이 남자는 정말로 나를 사랑하고 있다. 의심 같은 것을 도저히 품지 못할 것 같은 진심이 눈빛에서 뚝뚝 떨어졌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는 리젠에게 카이든이 말을 이었다.

“나는…… 이렇게 비굴한 부탁을 할 정도로…… 이딴 걸 기회라고 생각할 정도로 네가 절실하니까…….”

“어, 그, 그러니까…… 나는…… 카이든, 나는 지금 사실 그런 건…….”

“대단한 거 아니야. 그냥 내가 곁에 있는 것뿐이니까.”

뭔가 찝찝함을 혼자 품고 있으면서도 루벤이 기다리고 있던 정원에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던 르엘라처럼, 리젠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명확히 설명할 수 없지만 이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자신을 원하고 있는 절절한 눈빛에 무력해진다. 리젠은 일기장을 읽고 루벤과 르엘라가 둘 다 너무 어리석다는 생각을 했으나, 사랑 앞에 질질 끌려가는 그 어쩔 수 없음을 이해할 것 같기도 했다. 다시 르엘라의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진 그녀를 바라보던 그가 자신의 이마를 리젠의 이마에 살짝 댄 뒤 싱긋 웃었다.

“등에 약 바르자.”

“아, 아니야. 괜찮아.”

“거짓말하지 마, 소파에 기대지도 못하면서.”

그가 벌떡 일어나 약병을 챙기며 말했다.

“나랑 약속해.”

“뭘?”

카이든은 조심스럽게 리젠을 엎드리게 한 다음, 그녀의 옷을 들어 올렸다. 피딱지가 앉아 어제보다 더 끔찍해진 상처들이 등에 가득했다. 상처 하나하나에 공들여서 약을 바르며 그가 말을 이었다.

“아프면 아프다고 하고, 절대 괜찮다며 웃지 않는 거. 내 앞에서는 절대 그러지 마.”

“……아파. 좀 더 살살 발라.”

“잘하네.”

리젠이 냉큼 말하자 카이든이 피식 웃었다.

“슬프면 슬프다고 하고, 힘들면 힘들다고 하고, 억지로 밝은 척하지 않는 거.”

“내가 그래?”

“내가 괜히 널 바보라고 부르냐?”

“그래, 너 말 잘했다.”

리젠은 엎드린 채로, 볼멘소리로 말했다. 순간, 지금 카이든이 곁에 없었다면 그녀는 고모의 생각에 매몰되어 정말로 제정신이 아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있어서, 이만큼이라도 다른 생각을 하고 정신을 붙들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그런 생각.

“왜 자꾸 바보 같다는 거야? 너 졸업 시험 성적 다 까 봐. 내가 우리 고모만큼 천재는 아니지만…….”

“성적이라든가, 뭐 그런 뜻이 아니야. 너는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 손꼽힐 정도로 영리한 사람이니까. 그런데 바보같이, 혼자 너무 고군분투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

“사람이 어떻게…… 아무한테도 의지 안 하고 사냐? 어떻게…… 슬프고 힘든 걸 혼자 삭이면서 사냐? 어떻게…… 누구한테도 징징거리지 않고 사냐? 미련하게 다 혼자 안고 왜 벼랑길을 걸어?”

대답 없는 리젠의 등 위로, 소독 가루를 뿌리며 카이든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적어도 나한테만은…… 힘들다고도 해 주고, 징징거리기도 해 줘. 원하는 걸 말하면서 떼라도 써 봐. 그러면 안 할게.”

“나한테…… 대체 나한테 왜 그래?”

리젠이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카이든이 조심스럽게 붕대를 감아주며 대답했다.

“몰라.”

성의 없는 대답에 리젠이 부아를 내려고 할 때, 그가 씁쓸하게 말을 이었다.

“너무 좋아해서 그런가 봐.”

아무런 논리도, 아무런 개연성도 없는 대답이었지만 리젠은 순간 심장이 누군가 쥐어짜는 것처럼 가슴에 피가 몰리는 느낌이 들었다.

“……뭐라고?”

다니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카이든이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

“리젠의 피를 뺏겼고, 그래서 리젠보고 날 좀 좋아해 보라고 했어.”

카이든의 간결한 보고를 듣고 있던 다니엘은 마지막 말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카이든은 다니엘의 굳은 표정에 대충 상황을 짐작했다. 다니엘 역시 리젠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을 짐작한 그가 천천히 말했다.

“친구 살리려면 리젠에게 더 잘해야겠군.”

“……농담이지?”

다니엘이 단정하게 앉아 물었다. 그는 카이든이 여자를 좋아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아는 한, 카이든은 학창시절 내내 단 한 명의 여자에게도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리젠 하카트라니? 아셰와 자신이 계속해서 라이벌이라고 엮어 댔어도 소 닭 보듯 하며 별 관심도 보이지 않았었다.

“수하들을 시켜 반드시 리젠의 피를 찾아오게 할게. 굳이 그럴 필요까지…….”

“그렇게 쉽게 찾아올 수 있으면 뺏기지도 않았겠지. 그리고 난 진심이야.”

카이든은 평상시처럼 무뚝뚝하고 짧게 대답했다.

“나 리젠 좋아해.”

마치 오늘 학생 식당 메뉴가 마음에 든다는 것처럼 무미건조한 어투였지만, 오랫동안 그와 친구였던 다니엘은 그가 한 말이 어떤 무게를 가지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다니엘은 살짝 한숨을 쉬었다. 가뜩이나 갑자기 왕위가 눈앞에 다가오자 처리해야 할 일들과 생각해야 할 변수도 많은데,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꿈에도 몰랐다.

이 세상에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한 단 한 사람, 가장 친한 친구이자 무조건 한편이라고 생각했던 카이든과 같은 여자를 좋아하고 있다니. 웃어 보이려고 해도 차마 웃음이 지어지지 않았다. 그를 향해 밝게 웃어 보이던, 붉고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있던 눈부시게 아름다운 리젠의 얼굴을 떠올리니 더더욱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어차피 이 모든 일과 무관해. 나는 그 애를 좋아해서, 어떻게든 나를 좀 보게 하고 싶었어. 내 연애 사업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어떻게 신경을 안 쓰지?”

다니엘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리젠을 마음에 두고 있는데, 어떻게 신경을 안 쓸 수 있지?”

“리젠은 물건도 아니고, 네 것도 아니니 너무 열 내지 마.”

카이든은 그 어떤 감정의 동요도 내보이지 않고 천천히 말했다.

“그냥 각자 최선을 다해 보고, 결과를 기다리는 거지. 어차피 리젠의 마음이야.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웃기지 마. 그게 가능해? 너랑 리젠, 둘이 어떤 감정을 품을지 그저 지켜보면서, 내 마음 내가 알아서 표현하든지 하라고?”

“가능하더라고.”

차갑게 묻는 다니엘의 반응에 카이든이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그동안 내가 하던 짓이니까.”

다니엘은 가만히 그의 친구를 바라보고 있다가, 씩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 어차피 선택은 리젠이 하는 거겠지.”

카이든은 조용히 차를 마셨다. 다니엘이 다시 웃기 시작했다는 것은,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뜻했다.

“시간은 많고, 나도 리젠을 놓치고 싶지는 않으니까 양보하지는 않을게.”

다니엘이 다시 여유를 되찾은 표정으로 턱을 괴었다. 사실상 전달하고 싶은 말은 다 했으므로, 카이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양보 같은 건, 너도 못한 것 같으니.”

리젠은 약제국에 병가를 신청하고 나서, 오랜만에 주어진 자유 시간에도 놀지 않고 꿈 연결 시약의 해독제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재료를 찾았기 때문에 완성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조금만 더 적절한 약초를 찾고, 몇 번의 실험만 거치기만 하면 완벽한 해독제를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녀가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모든 생각을 중지하고 해독제 제작에 나선 것은 어쨌든 과거의 일보다는 현재에 해결하지 못한 일이 더 급했기 때문이고, 또 계속해서 르엘라 생각을 하다가는 본인이 미쳐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미쳐 버린 르엘라와 자다가 죽어 버린 그녀의 표정이 생각나서, 지금 당장 루벤에게 쫓아가 멱살을 흔들 것만 같아서 그녀는 다른 집중할 곳을 찾는 중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테스티도 나람도 모두 그녀의 손으로 죽여 버리고 루벤에게 일기장을 넘겨주어서 괴로움에 몸부림치게 하고 싶었다. 일개 약제국 직원인 무력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니엘과 카이든이 모든 진실을 최종 재판 때 알리는 것을 도와주는 일뿐이었지만.

카이든도 정당하게 진실을 밝히겠다고 위험을 무릅쓰고 있는데, 그녀가 감정에 휩싸여서 모든 일을 그르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신중하게 계량하고 있는데, 현관문의 벨이 울렸다. 빼꼼 내다보니, 검은 제복을 입은 카이든이었다.

“너는 병가 중에도 연구야?”

카이든은 딱 떨어지는 검은 제복과는 이질적이게, 시장을 돌고 왔는지 식재료를 잔뜩 사 가지고 왔다.

“이게 다 뭐야?”

리젠이 눈을 끔뻑이며 카이든이 사 온 온갖 식재료들을 집어 들었다.

“너 저녁 먹이려고.”

“뭐?”

“맨날 네가 해 준 것만 먹었으니까.”

“그건 해 준 거라고도…… 못하는데. 매일 토스트랑 커피랑 샐러드였잖아.”

“여하튼 환자한테 해 줄 거니까 넌 연구나 하고 있어.”

리젠이 더 이상 말리지도 못할 정도로 단호한 어조였다. 리젠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결국 다시 거실로 나와 약초들을 뚫어지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런 리젠의 모습을 보며 카이든은 피식 웃었다. 짧은 머리를 기어코 묶고 나서 순식간에 무언가에 열중하는 표정이 인상 깊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수업 시간에도 항상 저 표정이었던 것 같다. 바르게 앉아 있는 자세, 어딘가에 몰두하고 있는 눈빛, 잔뜩 힘이 들어가서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입매, 길게 뻗은 목선, 석양빛을 머금은 흔한 갈색 머리카락, 그리고 악바리 같은 저 모습 뒤에 길게 늘어져 있는 짐작하지 못할 그림자……. 르엘라의 일기장을 보고 난 뒤 리젠은 확실히 더 우울해하는 것 같았다. 대체 어떤 내용이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우울함을 말로 표현할 리젠이 아니었기 때문에 카이든은 그저 곁에 있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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