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나람이 눈물을 닦고, 종이에 ‘르엘라 하카트’라는 이름을 떨리는 글씨로 썼다. 루벤, 당신은 르엘라가 죽어 없어져야 그 사랑을 끝낼 작정인 셈이지? 그가 르엘라를 보던 따뜻한 시선, 그리고 자신에게 향하던 귀찮다는 눈빛이 번갈아 떠올랐다. 용기 내어 고백한 마음에 헛소리 말라고 단호하게 쳐 내던 목소리를 상기하며 나람이 굳게 마음을 먹고 종이를 불꽃에 던졌다. 조금만, 조금만 더 루벤이 그녀를 배려해 주었다면. 여행 중 딸려 온 귀찮은 짐덩어리 취급만 하지 않았더라면. 외로운 궁에서 차곡차곡 쌓은 사랑과 원망이 활활 타올랐다.
나직하게 주문을 외우는 그녀의 목소리가 아무도 모르게 궁 안에 울렸다. 불길이 더 거세게 타오르자, 나람은 눈을 질끈 감고 찻잔에 담긴 루벤의 피를 흩뿌렸다. 불이 확 꺼졌다.
다음 날 아침, 리젠은 조용히 자신의 침대에서 자다가 숨진 르엘라의 시신을 발견했다.
테스티는 나람의 뺨을 후려갈기고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리고 싶었으나 꾹 눌러 참았다. 어떻게 모은 재료들인데, 배은망덕한 계집애가 질투심에 눈이 멀어 이미 미쳐 버린 여자에게 흑마법을 쓰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람을 죽여 버리기는커녕 잘했다고 웃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일이 이렇게 된 이상 5년 후에 르엘라의 유골을 사용하여 윌리엄을 죽이는 흑마법을 쓰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었기 때문이다. 나람이 수가 틀려 자신을 배신하면 안 되는 일이니, 5년 동안 어르고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 5년을 기다리면 되지.”
테스티는 분노를 안으로 감추며 중얼거렸다. 윌리엄만 해치우고 나면 정말로 없애 버릴 것이다.
“5년 후에, 5년 후에 윌리엄을 죽이면 되지. 급할 것은 없다.”
다만 제펠탄에게는 지병이 있었는데, 그전에 제펠탄이 죽으면 모든 일이 허사가 되는 셈이었다. 그 하나의 변수를 불안하게 마음에 안은 채로, 테스티는 모든 계획을 5년 뒤로 미뤘다. 그러나 나람이 생각보다 심약하고 감정적이라는 것을 알았으므로, 5년 동안 그녀를 달래고 루벤을 사랑하는 마음을 더 부추겨야 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속이 후련하십니까.”
루벤이 테스티에게 본격적으로 날을 세우게 된 것은 르엘라의 장례식 때부터였다. 르엘라의 장례식 때 오열하는 사람들이 워낙에 많아 루벤이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고 넋이 나가 있는 것에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약제국의 가장 친했던 동료였다는 사파엘은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무시한 채 이대로 죽을 리 없다며 본격적인 성분 분석은 5년 후부터 가능한데도 불구하고 온갖 시약 반응을 그 자리에서 다 해 보았던 것이다. 제대로 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시약을 함부로 사용했다는 죄로 그녀는 일주일 정직 처분까지 받았다.
“한 번만 얼굴을 보게 해 달라고 사정했는데, 그조차 들어주시지 않으셨죠.”
테스티는 정말로 르엘라가 죽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에, 아들의 그러한 반항심을 내심 이해할 수는 있었다. 루벤이 왕이 된다면 그깟 순하게 미친 애 정도 하나는 궁에 같이 둘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진심이었다.
“사랑하는 여자의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걸어야 하는 그 피에 물든 왕도…….”
루벤은 이를 갈며 천천히 말했다. 테스티는 루벤이 그저 르엘라의 얼굴 한번 보지 못하게 했을 뿐인데 이 정도면, 이 모든 일을 알게 되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 뒷골이 섬뜩해졌다.
“……잘 준비해 주십시오.”
그의 눈이 살짝 광기에 번쩍거렸다. 그는 르엘라의 마지막 편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나의 세상을 보고 싶다고. 네 무덤 앞에 나의 세상을 보여 주겠다. 그게 네가 남긴 마지막 말이라면, 어느 비 오는 날에 붉은 장미꽃과 나의 세상을 바칠게. 루벤은 자신의 세상을 보여 주겠다고 어린애처럼 다짐했으나, 르엘라에게 속삭이던 그의 세상은 그녀의 죽음과 함께 이미 모두 무너져 있었음을 아주 먼 훗날에야 알게 되었다.
그 시기의 모든 기록인 르엘라의 일기장은 사파엘의 책상 서랍 속에 고이 잠들었다. 그 모든 진실을 덮은 채로, 장마가 다섯 번 지났다. 누렇게 변한 일기장을 넘기며 리젠은 밤새도록 하염없이 울었다.
7. 연애
“……리젠?”
카이든은 리젠과 함께 있겠다며 리젠의 집에 돌아와서 그녀의 상처를 봐 주다가 자신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고, 그가 잠에서 깼을 때에는 리젠이 밤을 꼬박 새고 멍하니 소파에 앉아 있었다. 이미 해는 떠 있었고, 리젠의 옆에 몇 권이나 되는 르엘라의 일기장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것을 봐서 밤새 일기장을 읽은 듯했다.
“깼어?”
리젠은 살짝 웃으며 돌아보았지만 전혀 얼굴에 생기가 없었다. 간밤에 쥐 파먹듯이 잘렸던 그녀의 머리는 어느새 단정한 단발이 되어 있었다. 카이든이 잠이 든 새 아예 혼자 자른 듯했다. 어깨 위로 살짝 올라온 단발머리를 한 그녀는 훨씬 더 어려 보였으나, 정말로 나이가 많이 든 사람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머리 잘랐네.”
“응. 아무래도 어젯밤의 그 스타일은 좀 아니잖아.”
얼마나 울었는지 퉁퉁 부은 눈을 한 채 리젠이 억지로 쿡쿡 웃었지만 카이든은 도저히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간밤에 그녀에게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다. 습격을 받았고, 한밤중에 도망을 치다가 등이 다 찢겨 나갈 만큼의 채찍질을 당했다. 그 와중에 사파엘에게 가서 르엘라의 일기장까지 받아 왔으니, 모르긴 몰라도 간밤에 어떠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이 분명했다.
“이거 다 읽었어?”
“응. 다 읽었어.”
“별다른 내용이 있었어?”
카이든의 물음에 리젠은 한동안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그 누구에게도 이 일기장의 세세한 내용을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카이든이 ‘같은 편’이라고 해도 고모의 사생활까지 적나라하게 공유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아직 리젠에게도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다.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어도, 파도처럼 몰려온 과거의 진실이 그녀에게도 내적인 충격을 안겼던 것이다.
“아, 그냥 우리가 예상했던 것이 맞아.”
“예상했던 것?”
그녀는 사실만을 골라서 힘겹게 말했다.
“마력증폭약은 고모가 만들어 테스티에게 넘긴 건 맞지만…… 의도와는 다르게 히람궁의 화재 사건에 쓰인 것을 알고 죄책감에 미쳤던 것 같아. 히람궁 화재 사건은 테스티가 나람의 흑마법을 위해 꾸민 거고. 루벤과는 연인 관계였고, 일기장엔 안 나와 있지만 나람이 질투심에 흑마법으로 우리 고모를 죽인 것 같아.”
“……그래.”
카이든이 생각에 잠겨 중얼거렸다. 어느 정도 가닥을 잡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연결고리가 명확해진 것 같았다.
“대충 짐작했던 것들이 다 맞네. 이제 결정적인 증거를 하나 더 잡아 최종 재판 때 내면 되겠어. 나는 지금 캐서린의 마법약 상점에 뜨내기 마법사로 변장해서 다니고 있는 중이니…… 마력을 뽑아내는 현장을 덮쳐서 다 죗값을 치르게 하고 말겠어.”
모든 가설이 맞아떨어진 것을 확인했지만, 리젠의 표정이 워낙에 우울해 보여 카이든의 기분은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정제된 사실만을 명확하게 전달해 들은 카이든과, 직접 고모의 기록을 읽은 리젠의 충격은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억지로 올려보이던 입꼬리마저 축 늘어진 리젠의 얼굴을 보며 카이든이 그녀의 짧아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주었다. 리젠이 텅 빈 눈동자로 중얼거렸다.
“……다 죽여 버리고 싶어.”
“뭐?”
카이든이 흠칫 놀라 반문했다.
“테스티도…… 나람도…… 루벤도…….”
리젠이 허공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가슴이 답답해서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의 가슴을 쿵, 하고 쳤다.
“왜 우리 고모만 죽어야 하지?”
“리젠.”
카이든이 그녀의 양 볼을 잡고 자신의 눈을 바라보게 했다. 부은 눈에 천천히 초점이 돌아왔다. 리젠이 눈을 몇 번 깜빡거리고, 떨리는 숨을 한 번 내쉬었다.
“……미안, 네 앞에서.”
그녀는 말을 잇는 것도 힘들어 보였지만, 가까스로 감정을 추스르는 것 같았다.
“내가 염치도 없이…… 네 앞에서 이런 꼴을…….”
“리젠.”
“……어?”
“먹고 싶은 것 없어? 매일 네가 아침을 차려 줬잖아. 내가 뭐라도 만들어 줄게.”
“됐어. 여기 우리 집이잖아. 왜 우리 집에서 네가 요리를 하니?”
“뭐라도 먹이고 싶어서 그렇지.”
그녀는 피식 웃었지만 카이든의 걱정스러운 표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리젠의 표정이 불안정했다. 카이든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가 말문을 열었다.
“어젯밤에 내가 했던 얘기, 기억나?”
“……어?”
“내가 널 좋아한다는 거.”
리젠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르엘라의 일기장 내용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카이든이 그런 얘기를 했던 것도 잊고 있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미칠 듯이 설레면서도, 이 모든 것이 꿈 연결 시약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니 너무나 두려웠다.
‘예를 들어, 저는 꿈 연결 시약 같은 것을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외국의 스파이와 증거 없이 연결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을 것 같아서요. 그러나 그 약이 시판된다고 가정해 볼게요. 개인적인 감정으로 합의되지 않은 누군가에게 몰래 먹이면, 당하는 사람은 꿈에서 무방비인 자기 모습을 보여 줄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당하는 줄도 모르게 당하는 또 하나의 폭력이죠. 이제 이런 것이 세상에 풀리면 사람들은 누군가가 주는 음료를 믿지 못하게 될 겁니다. 약을 개발한다는 것은, 목적 외에 쓰일 수 있는 수많은 부작용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에요.’
르엘라의 일기장에 잠시 언급된 꿈 연결 시약에 대한 내용을 상기하며 리젠은 침을 꿀꺽 삼켰다. 당하는 사람은 꿈에서 무방비인 자기 모습을 보여 줄 수밖에 없다……. 그런 생각을 해 보지 못했다. 그 때만 해도 학생이었기 때문에, 그것도 수사국으로 진로를 정하고 있었고, 약물 연구 윤리에 대하여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자신은 대체 무슨 일을 한 것일까. 르엘라가 세상에 내놓지 않았을 때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텐데. 남에게 알려지지 않은 시약을, 심지어 제대로 만들지도 않고 몰래 먹이려고 했다. 연구 윤리를 알게 된 지금 생각해 보면 범죄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