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얼마나 속은 걸까. 마력증폭약도 나람이 먹은 것이 아니라, 마법사 여러 명에게 먹인 것 같던데 그 사람들은 자신이 죽을 거라는 것을 알고는 있을까. 화재를 일으킨 마법사들은 곧 모두 죽을 것이다. 자신이 만든 약의 부작용은 자신이 가장 잘 안다. 그 정도의 화재를 일으키려면, 못해도 열 명은 필요했을 것이다.
모두 거짓이었다. 처음부터 테스티는 마력증폭약 없이 히람궁의 사건을 일으킬 만한 힘이 없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거짓이었다. 세상을 속이라고 르엘라에게 조언한 사람이 테스티인데, 테스티가 르엘라를 속이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처음부터 없었다.
“어…… 뭐, 내가 치울게. 피곤한 것 같은데 그냥 누워 있어.”
르엘라의 눈동자에 초점이 없었다. 아무리 속았다고 해도, 그래도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한 사람은 결국 자신이었다.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을 죽였다……. 리젠과 함께 여행을 하며 돌아오는 길에서 만난 유가족들의 표정과, 스잔나의 장례식에서 오열하던 다니엘의 얼굴이 떠올랐다. 바로 잡아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어떻게? 이미 사람들은 모두 죽었고, 마력증폭약이 있는 한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을 수도 있다.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어머, 고모!”
리젠이 설거지를 하다가 또 한 번 깜짝 놀라 소리쳤다.
“타타니아 허브에 왜 잔뜩 커피를 부어 놨어? 얘는 물도 주면 안 되는데!”
“……내가 그랬니?”
황급히 뿌리를 파헤치고 있는 리젠의 뒷모습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않은 채 르엘라가 성의 없게 대꾸했다. 루벤에게 말해야 하는 걸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왜 말하고 싶지 않은 걸까? 루벤은 처음부터 그녀의 꼿꼿하고 중립을 지키는 모습에 반했다고 했었다. 이기적인 마음이지만, 원칙을 어기고 살인 무기를 넘긴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았다.
‘너를 만나고, 나는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어.’
그에게 그런 말을 들었는데…… 그 말을 하는 그의 표정을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는데…… 말할 수 없다. 이런 일들을 모두 다 말할 수가 없다. 그러나 여행길에서 보았었던 가족을 잃고 정신없이 어디론가 향하던 사람들의 절규가 가만히 있어도 귀에 울렸다. 하루아침에 이렇게 된 것이 아니다. 어쩌면 반년 동안 미심쩍어 했던 그 모든 시간들이 한 번에 그녀를 덮쳐, 맨 처음 ‘공익과 국익을 위해 헌신하는 연구원’이 되겠다는 약제국 선서와 함께 어지럽게 섞였다.
“고모, 고모? 왜 그래? 고모!”
그녀는 별로 졸리지도 않았는데, 곧 잠이 들 것같이 눈꺼풀이 무거워져서 서서히 눈을 감았다. 자신을 더더욱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사실 히람궁의 화재가 일어나고 나서 반년 동안 전혀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라는 점이었다. 무언가 계속 찝찝했지만, 루벤처럼 모르는 척하려고 했다. 잠시 눈만 감으면 행복한 일투성이라, 사실은 테스티가 평생 자신을 속여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있었다.
사실은 어느 정도 짐작을 하고 있었기에, 졸업 여행 때에 맞춰 리젠과 함께 여행도 가지 않았나. 다행히 공립중학교의 졸업 여행은 히람궁이 아닌 다른 곳으로 결정되었지만, 그래도 불안한 마음에 그 시기에 리젠을 끼고 있었던 것이다. 모르는 척한다고 해도 사실은 무의식중에 계속해서 신경 쓰고 있었다. 어쩌면 그런 일이 벌어지더라도 리젠만큼은 안 된다는 불안함에…… 맨 처음 테스티의 궁에서 마력증폭약의 제조법을 휘갈기고 나와, 그뿐만이 아니라는 핑계로 정이 갔던 아셰에게 원칙을 어기고 약초학의 비밀을 조금 더 가르치고, 루벤에게 먼저 다가가 이름을 불렀다. 이 모든 것들이 사실은 모르는 척하기 위한 수많은 합리화였다.
결국엔 버틸 수 없으면서, 결국엔 진실을 직면하는 것을 선택하고 밀려오는 죄책감에 이토록 괴로울 거면서. 르엘라는 애초부터 테스티처럼 살 수 없는 사람이었고, 한평생 약제국 안에서 연구만 했기 때문에 사실은 이런 일에 휘말리기에는 정치적인 정신 무장이 덜 되어 있었다. 왕족들이 남들의 죽음을 하찮게 여기도록 자라는 것처럼, 르엘라는 공익을 위해 헌신한다는 마음으로 자랐다. 그녀가 견디기에는 처음부터 버거운 일이었다.
어지러운 의식 속에 르엘라는 마음 깊은 곳이 찌릿함을 느끼면서 생각했다. 사실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루벤도, 자신도 부족하고 모자란 사람들이었다. 그럴듯하게 말로 포장했지만 어떤 사실 하나 직면하지 못했다. 루벤은 자신의 어머니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고 먼 곳만 보며 있었고, 결국에 자신은 그런 그에게 끝까지 좋게 기억되고 싶어 당신의 세상이 기대된다는 쪽지를 남겼다. 루벤의 이상을 유일하게 들어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끔찍한 이기심에.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 보니 잘못된 길 위에 서 있었다.
“리젠…….”
잠이 드는 것처럼 의식이 희미해지면서 이상하게 옛날 생각이 났다. 어린 리젠을 데리고 오빠를 만나러 수도원에 갔다. 수도원에서 면회가 거절당하고, 훌쩍거리는 리젠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며 리젠이 연신 눈물을 닦았다.
‘울지 마.’
르엘라는 두 손을 모으고 앉아 단호하게 말했었다.
‘부모가 없다고 슬픔에 빠져 있으면 안 돼. 네 깊은 슬픔을 보여 주면 사람들은 도망가. 마음속 깊이 상처가 있다고 해도 배로 열심히 살아야 해. 이미 태어난 이상, 망가져 버리면 더 돌이킬 수 없어.’
‘나는…… 나는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그러니 삶을 선물 같다고 생각해야지. 예상하지 못하게 받은 기회야. 네 탄생에 이미 대가를 치른 만큼…….’
리젠이 코를 훌쩍이며 숨을 골랐다. 그때의 리젠 나이가 열 살도 되지 않았었다.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앞을 보면서 씩씩하게 걸어. 네 삶에 최선을 다해. 절대로 누군가의 탓을 하며 유기하지 마. 네 삶을 사랑해 주는 건 너 하나뿐이니까.’
그땐 르엘라도 어렸다. 성년이 되자마자 교육에 대한 그 어떤 이해도 없이 리젠을 맡았다. 대학 다닐 때에는 도우미 아주머니의 손에 맡겼을 뿐 제대로 된 육아도 하지 않았다. 리젠이 말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며 그녀는 당연히 완벽을 가르쳤다. 끔뻑이는 눈에 다 커 버린 리젠의 기다란 갈색 머리가 잡혔다. 이 아이가 일 년만 지나면, 처음 갓난아기인 리젠을 맡았던 자신의 나이가 된다. 이토록 아이가 빨리 클 줄 알았더라면 조금 더 잘했을 것이다. 자신이 사랑 앞에 그토록 중시하던 원칙을 깨고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을 죽일 줄 알았더라면, 그냥 더 열심히 사랑해 주고 모두 다 괜찮다고 해 주었을 것이다. 내가 뭐라고, 내가 뭐라고 너를 그토록 옥죄며 키웠을까…….
“리젠, 미안해…….”
나는 사실 네게 어떠한 교육도 할…… 자격조차 없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세상에 잘못 태어난 건 네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내가 제대로 된 신념도 지키지 못하고 괜한 약을 만들어 무고한 사람들을 너무 많이 죽였다. 마치 꿈을 꾸듯 루벤에게 이별을 선언한 쪽지를 남겼으나 그가 받아들일 리 없다. 그가 자신을 찾아오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연구 인생을 바친 약제국에 이 부끄러운 발걸음을 다시 디딜 수는 있을까.
나는 과연…… 정상적으로 살 수 있을까. 도대체 어떤 정신으로 이 하루를 버틴 건지 모르겠는데, 당장 내일부터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모든 것을 바로잡아야 하는 걸까. 눈앞이 막막하다는 것은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인가. 정신을 차리고, 얼른 모든 것을, 모든 것을 어떻게든 바로 잡아야 하는데…….
“고모?”
그녀는 까무룩 잠이 들었고, 다음 날 아침에 깨어났을 때에는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순하게 웃기만 했다.
[왕자님, 그 동안 잘 대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저희 인연은 이제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이 끝을 마음먹은 이상 이제 다시 뵐 일은 없겠지요.
이제는 더 이상 왕자님의 손을 잡고 같은 길을 걸을 수 없을 듯합니다.
다 제 그릇이 작은 탓이니 왕자님 스스로를 탓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래도 당신을 만나 어딘가에는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이 있다는 사실과
평생 모르고 살았던, 상상하지도 못했던 감정을 알았습니다.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 늘 행복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추신. 당신의 세상을 보고 싶은 것은 진심이었습니다.
-르엘라 하카트]
르엘라 하카트가 미쳤다는 소식은 그녀가 유명인인 만큼 금방 퍼졌다.
“비켜.”
며칠 동안 수염도 자르지 않은 채로, 얼굴이 흙빛이 된 루벤이 자신을 둘러싼 호위 무사들을 노려보며 칼을 빼 들었다. 술에 취해 그의 발걸음이 비틀거렸다.
“안 됩니다.”
아무리 무술이 뛰어난 루벤이라고 해도, 몇 명이나 되는 호위 무사들을 술에 취한 채로 상대할 수는 없었다. 그는 칼을 휘둘렀지만 금세 제압당했고, 짐승처럼 소리를 질렀다.
“비켜! 비키라고!”
“왕자님, 들어가십시오.”
“갈 곳이 있다고……! 비켜! 다들 비켜!”
그는 호위 무사 몇 명에게 둘러싸여 다시 자신의 궁으로 끌려 들어가 감금되다시피 하였다. 궁에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게 된 지 벌써 며칠째였다. 그는 테이블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르엘라의 메모지를 노려보다가, 한 번 더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른 뒤 문을 벌컥 열었다. 겹겹이 그를 지키고 있는 호위 무사들 사이로 테스티가 들어왔다.
“루벤. 이게 무슨 짓이냐?”
“이 무사들은 왜 제 말을 듣지 않습니까? 저를 지키라고 있는 사람들 아닙니까?”
“너를 지키고 있지. 그 어느 때보다 더.”
루벤은 이를 갈았다. 늘 자신에게 호위 무사들이 붙어 있는 줄은 알았으나 이토록 많이 붙어 있는 줄 몰랐고, 호위 무사들의 인사에 대해 한 번도 신경을 써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것은 테스티가 알아서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진정으로 자신의 곁에 사람 한 명 없다는 것이 이토록 후회될 줄은 몰랐다.
“물려주십시오. 갈 곳이 있습니다.”
“안 된다.”
“어마마마, 제발…….”
루벤이 거의 울부짖다시피 하며 무릎을 꿇었다. 그가 이마를 바닥에 박으며 들끓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얼마나 세게 박았는지 순식간에 멍이 시퍼렇게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