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256)

56화.

“그런 뜻은 아니고요.”

르엘라가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왜 마력증폭 제조법을 드렸는지는 왕비님이 더 잘 아실 겁니다. 히람궁 사건을 막으려고 드렸는데, 다른 방향으로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어요. 제 입장에서는 당연히 의문을 품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모든 의문에 네가 원하는 답이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란다.”

테스티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건 정말로 사고야. 불이 났는데 그걸 어떻게 하겠니? 네가 네 눈으로 직접 봤어? 뭐가 이상하다는 걸? 나도 몹시 곤란하다니까. 스잔나가 이렇게 죽어 버리는 통에 너처럼 나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생겼어. 조용히 흑마법으로 처리를 못하니 이런 일이 생긴 거잖아.”

“…….”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건은 정말로 우리와 무관해.”

테스티의 딱 부러지는 대답을 들었으나 르엘라는 점점 더 기분이 이상해졌다. 분명 내심 바라던 대답인데도 불구하고 테스티의 단호한 표정이나 인위적인 몸짓, 조금도 당황해하지 않는 것 같은 어조를 직접 보니 더 의심이 짙어졌다. 

“그럼 미안하지만, 이만 나가 주겠니? 곧 외출을 해야 해서.”

그러나 르엘라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허리를 숙여 절을 하고 왕비궁을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벌써 6개월 전 일이다. 반년이 흘렀다. 반년 동안 모르는 체 지내 봤지만, 더 이상 그렇게 지내는 게 지쳐서 찾아온 길이다.

그녀는 넓은 궁 안에서 잠시 길을 잃은 것처럼 서성였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은 루벤의 얼굴을 보고 싶기도 했고, 또 피하고 싶기도 했다. 결국엔 그나마 자신을 가장 믿고 따르는 아셰의 궁에 가야 하나, 하고 잠시 생각했으나 아셰는 학교에 가 있을 시간이었다.

테스티의 궁에 다녀온 뒤,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이대로 모르는 척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르엘라는 자신도 모르게 천천히 주저앉았다.

‘나는, 평생 알려지지 않은 비밀은 은폐를 진실로 만든다고 생각한다. 아무도 모르는데 누가 거기에 진실과 거짓의 꼬리표를 달겠느냐?’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었기 때문에 르엘라는 순간 그럴듯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녀를 가장 약하게 만드는 사람은 루벤과 리젠이었고, 그녀는 두 사람이 언급되자 자신도 모르게 남의 사상에 끌려간 것이다. 모두를 속일 수 있다면 진실이 된다고…….

‘같은 얘기로, 누군가를 평생 속일 수 있다면 그건 거짓말이 아니지.’

정말로 완벽한 각본을 짜면, 진실도 거짓도 만들 수 있다고…….

“아니야…….”

르엘라는 혼자 중얼거리고 얼굴을 두 손에 파묻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내가…… 내가 아는데…….”

미심쩍은데, 확인할 길이 없다. 테스티가 속삭였던 궤변은 시간이 흐르고 나자 더 그녀를 옥죄어 올 뿐이었다. 그때는 괜찮은 줄 알았는데,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 괜찮지 않음이 선명해진다. 그녀는 얇고 가는 목소리 하나가 그녀를 부를 때까지 한참을 궁의 정원 구석에서 옹송그려 앉아 있었다.

“……저기요…….”

그녀가 고개를 들자, 딱 리젠 또래의 여자아이가 조심스럽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 무,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르엘라는 눈앞의 여자아이를 이미 알고 있었다. 말을 해 본 적은 없지만, 몇 번 마주치기도 했었다. 그녀는 다리에 간신히 힘을 주고 일어서서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하문하십시오, 나람 왕자비님.”

힘을 가진 자는 조심해야 한다. 그 힘은 수많은 사람들을 다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에 나방이 꼬이듯이 이용하려는 사람들은 넘쳐난다. 자신의 뚜렷한 원칙과 소신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큰 파멸을 맞을 수도 있다. 그런 사실을 분명히, 아주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는데…… 사랑에 눈이 멀어 잠시, 잠시 나를 놓아도 된다고 생각했던 그 시기가 후회되어 미칠 것 같다. 그러나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서 루벤을 처음부터 만나지 않을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내가 새삼 또 무섭다.

나는 사랑 앞에 얼마나 어리석었으며, 얼마나 무지했는지. 나는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무슨 짓을 해 버린 것일까.

르엘라의 일기장 중 발췌

나람은 이런 데에서는 말할 수 없다며 르엘라를 그녀의 궁으로 데려왔다. 르엘라는 살짝 멍한 표정으로 나람의 앞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나람은 도저히 루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보다 예쁘지도 않고, 나이도 한참 많으며, 몸집도 굉장히 왜소하다. 만일 르엘라가 한스팀의 템프촌에 있었더라면 매상은 최악일 것이 분명했다. 제대로 교육 받지 못한 열일곱의 시야는 몹시 좁았고, 그래서 더 마음속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왕자님이랑…… 무슨 사이세요?”

“글쎄요.”

르엘라가 눈을 내리깔고 대답했다.

“루벤 왕자님께 직접 여쭤 보시는 것이 좋으실 듯합니다.”

“그건 이미 들었어요.”

테이블 밑에 주먹을 쥔 나람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르엘라는 다소 영혼이 없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대충 대답했다.

“그럼 그 말씀이 맞을 겁니다.”

“그렇다면, 왕자님과 만나지 말라고 부탁드릴게요. 제 남편이에요.”

“아메탄에서는…… 왕족은 애인을 둘 수 있습니다. 제가 그 부탁을 들어드려야 할 이유는 없어 보이는군요.”

“물론!”

나람이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루벤 왕자님이, 저한테 속으셨다고 생각한 건 어쩔 수 없어요…… 저도 사실 흑마법을 정말로 쓰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그래도 이쯤 되면, 루벤 왕자님이 주장하시는 사기 결혼은 아니라는 거죠. 물론 왕비님은 왕자님께 절대 말씀드리지 못하게 하셨지만, 르엘라 당신은 알고 있어야 해요. 왕자님이 일방적으로 나를 구해 준 것이 아니라, 나도 그 값은 했다고요! 자리만 채우고 있는 꼭두각시는 아니란 말이야!”

“……무슨 말씀이시죠?”

르엘라가 자신의 목이 턱 하고 메는 것을 느끼며 가까스로 물었다.

“그 값…… 이 뭔가요? 흑마법을 정말로 쓰다니?”

나람은 씩씩대며 소리쳤다.

“100명이 넘게 죽은 흙이 필요하다고 해서……! 다들 안 된다고 했는데! 그래서 루벤 왕자님이 나를 사기꾼 보듯이 했는데! 왕비님이 어디서 마력증폭약을 구해 와서, 히람궁에 마법사들로 하여금 큰 화재를 냈다고요! 이제 재료도 다 준비되었겠다, 난 마력증폭약이 있는 이상 정말로 흑마법을 쓸 수 있고, 곧 윌리엄을 죽일 거예요. 지금은 스잔나 왕비가 죽은 지 얼마 안 되었으니, 1년 정도 뒤에.”

르엘라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루벤 왕자님은 모르시지만, 나는 루벤 왕자님을 왕위에 올리는 일등 공신이에요.”

나람이 테이블을 탁, 하고 쳤다.

“왕자님과 헤어져 주세요. 이제 난, 허수아비 같은 노예 계집애가 아니라, 이 정도의 부탁은 할 수 있는 위치니까.”

한참 동안이나, 르엘라는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었다. 나람은 순간 자신이 그렇게 무섭게 소리를 질렀었나, 고민했다. 르엘라의 얼굴에 표정이 돌아오지 않았다. 나람은 생각보다 르엘라가 아무 반응이 없자 오히려 본인이 당황해서 헛기침을 했다. 분노에 차서 명분을 얘기하기는 했지만, 사실 르엘라에게 루벤과 헤어지라고 윽박지를 윤리적 당위성은 없었다. 테스티는 나람을 완벽히 믿지 않았기 때문에 마력증폭약이 어디서 온 건지 출처를 얘기한 적이 없었고, 따라서 나람은 눈앞의 르엘라가 마력증폭약을 만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나람은 대다수의 정보와 먼 채로 외진 궁에만 있는 외국인 출신이었기 때문에 르엘라가 엄청난 천재 약제사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이, 이제…… 마력증폭약 덕분에…… 마법사들의 마력도 잔뜩 품은 돌도 받았고…… 정말로, 왕비님이 적절한 때만 알려 주시면…… 진짜 내 손으로 루벤 왕자님을 왕위에…….”

아직 어리고, 기반이 하나도 없는 외국인 나람에게 더 불편한 침묵이 한참 동안이나 흘렀다. 르엘라가 오랫동안 가만히 앉아 있다가, 눈을 내리깐 채 조용히 말했다.

“왕자비님.”

“……네?”

“펜과 종이를 주십시오.”

자신이 무서워서 충격을 받았다기에는 너무나 당당한 말투였다. 나람은 자신도 모르게 테이블에 깃펜과 메모지를 하나 꺼내 주었다. 르엘라는 한숨을 한 번 쉬고, 아주 천천히 글을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이것을…….”

그녀가 펜을 놓고 천천히 일어섰다. 작고 왜소한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루벤 왕자님께 전해 주세요. 아마 제가 쓴 글인 것을 바로 알아보실 겁니다.”

나람이 메모지를 집어 들었다. 아직 아메탄의 글이 서툴지만, 누군가가 흉내 낼 수 없는 대단한 악필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르엘라는 심호흡을 하고, 고개를 한 번 꾸벅 숙이고는 나람의 궁을 나섰다. 나람은 르엘라가 건넨 메모지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서둘러 그녀를 쫓아 나갔다.

약제국으로 향하고 있던 그녀의 뒷모습을 금세 따라잡은 나람이 헉헉대며 말했다.

“진짜예요? 진짜 루벤 왕자님과, 진짜 헤어질 거예요?”

“네.”

르엘라의 눈은 텅 비어 있었지만, 나람은 제대로 그녀의 표정을 바라볼 수도 없었다. 이렇게 일이 쉽게 끝날 줄 몰라서 나람은 상당히 당황했다.

“약, 약속했어요. 다시 만나지 말아요. 저랑 약속해요. 왕자님하고, 정말 끝내는 거예요.”

“네.”

르엘라의 짧은 대답이 너무나 간결했기 때문에 나람은 더더욱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그녀를 붙잡았다.

“약속을 어기면, 루벤 왕자님과 여전히 사랑하거나 하면, 나 정말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정말로, 정말로 약속한 거예요.”

“……네.”

나람은 얼떨떨한 얼굴로 그녀를 보내 주었다. 이상하게, 르엘라가 똑바로 정신을 차리고 있지 않은 채 무언가 자신을 놓아 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떨떠름하게 나람은 비틀거리는 르엘라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다. 그것이 나람이 마지막으로 본 르엘라의 모습이었다.

“고모, 왜 이걸 여기다 넣었어?”

리젠이 냉장고에서 설거지 거리를 꺼내며 깜짝 놀라 물었다. 공부를 하다가 밤늦게 돌아온 리젠은 별생각 없이 물을 마시려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빈 그릇을 발견하고 몹시 놀랐다. 

“어? 내가 그랬어?”

르엘라가 소파에 누워 있다가 부스스하게 일어서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에 초점이 없었다. 오늘 뭔가 이상해 보인다며, 약제국에서 일기장에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는데 사파엘이 억지로 조퇴시키고 난 다음의 기억이 없었다. 계속해서 히람궁의 사건과 마력증폭약만이 머릿속에 떠돌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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