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루벤은 피곤한 듯 목 뒤를 주무르며 나른하게 말했다. 르엘라는 앉아 있을 때도 작은 몸집이지만 허리를 곧게 펴는 습관이 있었는데, 루벤은 정말 다닐 때에도 건들거리는 걸음걸이였고 앉아 있을 때에도 의자 끝에 몸을 눕히다시피 하면서 앉아 있곤 했다. 다니엘보다도 자세가 엉망인 루벤을 보면서, 왕자 신분을 숨기고 평민이 여행을 다니듯 자유롭게 쏘다닐 법한 남자라고 르엘라는 생각했다.
“우리 어머니가……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너도 약제국에서 들은 게 많을 것 아니야.”
평소 같았다면 가치판단을 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할 법한 르엘라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정갈하게 물었다.
“루벤은요?”
“……내가 그런 걸 생각해서 뭐해.”
그가 피식 웃었다.
“어머니랑 내가 원하는 것이 같은데.”
“그런가요.”
눈을 내리까는 르엘라의 손을 루벤이 잡았다.
“르엘라.”
“네?”
“태어난 건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 내가 부모를 선택한 건 아니잖아. 그저 눈을 뜨니 내가 덩그러니 태어나 존재하고 있었다고. 나라고 왕족을 다 가족으로 두고 싶었겠어? 이복 여동생 궁에 놀러 갔다가 독살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삶을 살고 싶었겠냐고.”
“…….”
“그러나 너는 내가 선택한 여자고, 내가 선택한 가족이야.”
르엘라가 다시 고개를 들어 루벤을 바라보았다. 처음엔 불량하고, 반항적이기 그지없었던 그의 파란색 눈동자가 약간의 서글픔을 담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눈빛을 보면 안다던데, 르엘라는 도저히 루벤의 사랑을 의심할 수가 없었다.
“항상 네가 우선이야. 너는 나의…… 유일한 선택이야.”
“……네.”
르엘라는 마른침을 삼켰다. 루벤은 그녀의 볼을 거친 손으로 감싸고, 정말 조심스럽게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꾹 눌렀다. 이런 스킨십이 처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늘 그때마다 루벤의 떨림이 르엘라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꼭 너를 내 옆자리에, 왕비에 앉힐 거야. 왕비가 되면 하고 싶은 일을 잘 생각해 봐. 약제국 예산이라도 팍팍 늘려 줄게.”
“그런 건 원칙에 어긋나고요.”
르엘라가 살짝 웃으며 칼같이 대답했다.
“하지만…… 왕자님이 만들어 갈 나라는 왠지 궁금해서, 보고 싶기는 하군요.”
“그래?”
“나는 세상이 그렇게 넓은 걸 왕자님을 통해 알았어요. 귀족정과 산하기관만이 완벽한 체제인 줄 알았는데…… 너무나 다른 세상들이 있다는 걸 전혀 모르고 살았으니까.”
그것은 르엘라가 처음으로 그에게 밝힌 진심이었다. 그동안 그녀는 그에게 한 번도 왕위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루벤이 더없이 진지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루벤이 말하는 새로운 아메탄을 잘 지켜볼게요.”
“르엘라, 나 또 하나 알았다.”
“네?”
“내게는 아무도…… 정말 아무도 왜 왕이 되고 싶냐고 물어보지 않았어. 왕이 되면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도 받지 못했어. 다들 왕이 되려면 정치적으로 어떻게 움직이고, 누구를 어떻게 편으로 만들고, 이런 이야기만 했었지. 이런 꿈을 공유한 건…… 오직 너뿐이야.”
그가 르엘라의 작은 몸을 껴안았다. 쿵쿵 뛰는 그의 심장이 느껴졌다.
“잘할게, 정말 잘할게. 너를 만나고, 나는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어.”
좋은 사람…… 감동적인 말이었지만, 르엘라는 문득 히람궁의 화재가 떠올랐다. 대체 왜 맥락 없이 떠올랐는지 몰라도, ‘좋은 사람’의 그늘에 버티고 있는 테스티가 연상되어서였을 것이다. 왜인지 모르게 르엘라는 몸을 떨었고, 르엘라의 속도 모른 채 루벤이 그녀를 더 꽉 끌어안았다.
사실은 좋은 나날들이었다. 르엘라는 동료인 사파엘과 함께 독초 중독을 막을 수 있는 약을 하나 개발해 내서 표창장과 공로상을 받았다. 리젠은 우수한 성적으로 왕립고등학교에 입학했고 아셰와 순식간에 좋은 친구가 되었다. 수사국에 들어가겠다는 꿈은 더 구체적이 되었고, 누군가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는지 가끔 사랑에 관한 별자리 운세 같은 것을 열심히 쳐다보고 있곤 했다. 첫 중간고사 때 거의 대부분의 과목에서 A+을 받으면서 상위권을 지켰다.
“리젠, 좀 쉬엄쉬엄하지 그래? 지금까지 시험들 다 엄청 잘 봤잖아. 이제 첫 시험일 뿐이고.”
“안 돼.”
리젠은 구불구불한 갈색 머리를 야무지게 묶고, 암팡지게 고개를 저었다.
“나랑 성적이 비슷한 애가 있어.”
“그래? 누구?”
“그냥 지방에서 온 남자애인데, 나랑 성적이 다 비슷해. 근데…… 체술에서 내가 꽤 밀려. 선택과목을 괜히 마법으로 했나 봐. 마법은 너무 약해 빠져서…….”
“어차피 대학 가서 원하는 부서 선택하는 건 네 성적으로 충분한데?”
“걔가 수사국 지망이란 말이야.”
리젠이 미간을 찌푸리며 세상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수석 못하면 어떡하냐고.”
“못 하면 못 하는 거지.”
르엘라가 어깨를 으쓱했으나 리젠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수석이 승진 빠른 건 다 아는 사실인데? 고모도 약제국 수석이니까 사파엘 이모보다 훨씬 승진이 빠르잖아. 난 절대 걔한테 질 수 없다고.”
“사이가 별로 안 좋은가 봐?”
“서로 소 닭 보듯 하는 사이인데…… 그냥 다니엘하고 친한 애라 마주치기는 자주 마주치지. 근데 성격도 별로고, 인간미라고는 전혀 없는 애야. 걔도 나랑 썩 친해지고 싶지는 않나 봐.”
“그래도 친하게 지내.”
리젠의 뽀로통한 표정에 르엘라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사람 일 어떻게 될지 몰라.”
경험에서 나온 조언이었다. 르엘라는 정말로 자신이 루벤과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될 줄 전혀 몰랐던 것이다. 요즈음에는 루벤과 사이도 점점 더 좋아졌다. 사랑이라는 것은 한번 불붙으면 더 크게 타오르는 경향이 있는지, 그저 가만히 서로 얼굴만 바라보고 있어도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나무같이 꼿꼿하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옛날과는 다르게, 다소 융통성 있게 살기로 결심한 그날부터 르엘라는 가끔 자신의 이야기도 루벤에게 조곤조곤 하기 시작했다. 대화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약초학 하나만 바라보며 모든 원칙으로 스스로를 옭아매며 살았던 르엘라와, 온갖 나라를 여행 다니며 경험해 보지 않고서는 잘 알 수 없는 지혜를 습득한 루벤은 서로의 세상을 아낌없이 보여 주었다.
‘이렇게 떠돌다가 죽어 버려도 된다고 생각했어.’
루벤은 별 하나 없는 아메니티의 하늘을 바라보며 어젯밤 말했었다.
‘너를 만나고 난 뒤, 바라는 게 많아졌어. 너와 결혼할 거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너와 내가 하나라는 걸 알도록 할 거야. 너는 약제국에서 계속 근무하고 싶어 할 테니까, 나는 매일 아침 눈물을 머금고 너를 출근시키겠지. 나는 네 퇴근 시간을 기다리며 정사를 보다가, 함께 궁으로 돌아와 그날 있었던 일들을 도란도란 얘기할 거야. 네 휴가만을 기다리며 살다가 휴가 때에는 좋은 곳만 찾아다닐 거야. 그러다 보면 너를 닮은 예쁜 딸도 생기겠지. 너는 그 애를 엄청 엄격하게 키우고, 나는 다 괜찮다고 말해 줄 거야. 하루하루가 축복 같고 선물 같겠지. 비라도 온다면 정자에서 만나. 장미꽃을 준비해 두고 있을게.’
여행을 많이 다니며 이런 저런 음유시인들을 많이 만나서 그런지, 루벤이 하는 말들은 몹시 낭만적이어서 눈앞에 그 풍경이 그려지는 듯했다. 그런 말을 잘 하지 못하는 르엘라는 가만히 그 말들을 듣고 있다가 이렇게 그가 없는 일상에서 종종 회상해 보곤 하였다.
“이건 그냥 소문이기는 한데…… 걔 이름이 카이든 루스거든. 루스 영지가 아마 서쪽에 있지?”
리젠이 아무 생각 없이 토스트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히람궁 화재 때 피해를 입은 지역에서 와서 그런지, 여하튼 그 화재 얘기만 나오면 표정이 안 좋더라고. 그때 우리 여행 갔었던 얘기했다가, 표정 싹 굳어서 나가 버리는데 좀 놀랐어.”
르엘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커피를 마셨지만 순간 심장이 철렁함을 느꼈다. 잊고 살았고, 또 생각을 멈췄지만 그 화재에 대한 말만 나오면 왠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루벤이 관심 가지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자신도 그저 모르는 척했다. 테스티에게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고, 또 스잔나가 죽었다고 해서 르엘라의 삶에 변화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왕이 앞장서서 덮으라고 했던 사건이며 대중들은 이미 모두 잊었다. 리젠만 해도 처음에는 몹시 놀랐으나 입학시험 날짜가 잡히자 순식간에 잊어버렸다. 그게 사람의 본성이었다. 그저 눈을 감고, 모르는 척하며, 이렇게 평화로운 일상을 영위하면 되는 일이었다.
“고모, 나 그럼 갔다 올게!”
리젠은 허브 몇 개를 주워 먹고 나서 가방을 들고 일어서며 말했다. 르엘라는 리젠이 가고 나서야 자신이 커피가 아닌 맹물을 마시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일어나서, 느릿하게 출근 준비를 하고 약제국으로 가면 아무렇지도 않은 일과의 시작이다. 그동안도 계속 그래 왔다. 순간순간, 불안한 생각이 들 때마다 언제나.
‘……언제까지?’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이렇게 커피인지 물인지 모르며 불안해하고, 마음속의 꺼림칙함을 억지로 잊어야 하는 나날들이 도대체 언제까지. 르엘라는 천천히 일어나며 생각했다. 분명히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평생 잊고 살 수는 있는 걸까. 어느 평화로운 아침, 조카가 하는 일상적인 학교 얘기에도 덜덜 떠는 인생이 과연 내가 원하던 삶은 맞을까. 모르는 척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도망치고 있는 건 아닐까.
도망은 언젠가 지칠 수밖에 없다. 르엘라는 무표정으로 출근 준비를 마쳤다.
“무슨 소리지?”
테스티는 우아하게 잔을 내려놓으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히람궁 사건은 정말로 사고야. 수사국에서도 이미 발표가 끝났잖아.”
르엘라는 결국 테스티를 찾아가기 위해 왕비궁에 가야만 했다. 훨씬 더 보안이 복잡해진 궁에 들어가며 기분이 착잡했다. 테스티는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음…… 나람이 안 죽어서 그러니? 나도 그 화재가 나서 좀 당황스러워. 준비했던 계획이 꼬였잖아. 어차피 나람을 끝까지 루벤 곁에 두지는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