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곧 쫓아낼 예정이지만, 나람이라는 공식적인 아내가 있는 한 르엘라는 그에게 어떠한 표현도 하지 않을 작정인 듯했다. 정치판에 하나의 파란을 불러 올 수도 있는 애인 자리도 내켜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챈 루벤은 그저 함께 있는 시간이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괜히 대충 나람과 결혼했나 싶었는데, 찬찬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노예인 어린아이를 그 자리에 앉혀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에 발을 들이면 들일수록 더 배경이 되는 여자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때 나람이 없었더라면, 아마 같은 정치적 세력들에 의해 훨씬 더 골치 아픈 일이 생겼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진심으로 나람은 언제 내보내도 괜찮은 아이라고, 자신이 구해 줬으니 이 정도의 대우도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반드시 왕이 되어 르엘라를 왕비에 앉히겠다. 지금의 이 시간을 잊지 않고 세상 모든 진귀한 것을 안겨 주겠다. 왕이 되기 전 왕족들이 애인을 만드는 것은 별로 새롭지도 않은 일이었지만, 그런 위치를 르엘라에게 주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아버지, 제펠탄만 하더라도 대학 시절 내내 테스티와 연애하다가 그녀를 후궁으로 앉히지 않았는가. 그런 것 말고, 처음부터 왕관을 씌워 주겠다.
천천히 자신의 궁으로 향하던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
“……르엘라?”
별 하나 없는 캄캄한 밤하늘을 배경으로, 궁 뒤편 벤치에 작은 여자가 하나 한 폭의 그림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르엘라!”
그가 철컹거리는 칼을 대충 잔디밭에 내던지고 한껏 뛰어 그녀의 앞에 섰다. 헛것이 아니라 정말로 르엘라가 맞았다. 르엘라가 무표정으로 말했다.
“이 길, 막으라고 했잖아요.”
“영원히 안 막을 거야.”
루벤이 씩 웃으며 그녀의 앞에 섰다.
“이런 날이 올 수도 있으니까.”
르엘라는 그를 올려다보며 안경을 치켜 올렸다.
“무슨 날?”
“이런 맑은 날, 밤에, 르엘라가 나를 직접 찾아온 날.”
그가 르엘라의 볼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일기 써야겠다.”
“안 쓰는 것 알아요.”
“그럼 네가 써. 내가 불러 줄 테니까. 넌 엄청난 악필이긴 하지만…….”
그가 르엘라의 옆에 앉아, 그녀의 어깨를 양팔로 감싸고 천천히 몸을 흔들었다. 막 연무장에서 나와 땀을 씻은 청량한 남자의 체온이 느껴졌다.
“오늘, 르엘라가 드디어 나의 궁에 찾아왔다. 비밀 길을 가르쳐 준 보람이 있다. 이제는 궁에 올 때마다 그 길을 흘끔거릴 것 같다. 언제든 그녀가 있을 것 같아서. 물론, 없으면 당연히 내가 갈 것이다. 그 정자에, 그 정원에, 그 산책길에 붉은 장미꽃을 들고.”
“……유치한데.”
“세상의 모든 곳을 돌아다녔다. 궁이 제일 답답했다. 그러나 지금, 그녀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어느 곳보다 궁이 좋다. 왜냐하면, 그녀는 내 세계, 내 꿈, 내 상상 그 자체니까.”
“너무 과장 같아서 못 쓰겠어요.”
르엘라의 툴툴거리는 말에도 루벤은 좋아 죽겠다는 듯이 낄낄댔다. 루벤은 자신이 왜 이렇게 르엘라가 좋은지 막연하게 알 것 같았다. 르엘라는 너무 차갑고, 원칙주의적이고, 굉장히 모든 것에 무관심해 보였지만, 사실은 속내가 몹시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처음 보았던 자신에게도 끝까지 책임을 다하겠다며 약초 수업을 진행하고, 몸조심하라고 혼을 내고, 자신의 모든 말에 별 반응을 하지 않으면서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와 준다. 감정 표현이 없는 여자의 작은 몸짓 하나하나가 그에게는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감동을 주었다.
“봄에 좋은 여행지 하나 추천해 주세요.”
“어? 뭐 좋아해? 내가 진짜 세상 가장 행복한 여행으로 만들어 줄게.”
“리젠이랑 갈 거니까.”
실망했다는 듯이 루벤의 어깨가 축 쳐졌다.
“걘 학교 가야지.”
“열이 펄펄 끓을 때도 학교를 빠지면 안 된다고 밀어내면서 키웠어요. 그게 좀 마음에 걸려서요. 고등학교 들어가기 전, 날 좋을 때 둘이 바람이라도 쐬고 오려고요. 고등학교 땐 방학도 없잖아요. 어차피 졸업여행 갈 텐데, 그때에 맞춰서 최대한 수업 결손 없게.”
“말도 안 돼.”
루벤이 어이없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학교를 빼먹으면서,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네. 어차피 졸업 학년이니.”
“그런 건…… 나 같은 놈이나 하는 짓인 줄 알았는데.”
루벤이 뒤통수를 긁으며 여자 둘이 가기 좋은 여행지를 하나둘 추스르기 시작했다. 너무 멀면 안 되고, 너무 가까워서도 안 되고, 너무 위험해서도 안 되고, 너무 볼 것이 없어도 안 되고…… 루벤의 고민이 깊어졌다. 어린아이처럼 애를 쓰고 있는 루벤의 옆모습을 보며, 르엘라는 자신도 모르게 살짝 미소 지었다.
“그래, 음, 그래도 휴가는 남쪽이 좋지. 남쪽에 렌토 지방으로 가면 바다도 있고…… 꽃도 잔뜩 피어서 정말 예쁠 거야. 렌토 쪽이 그래도 제일 나을 것 같다. 시골이긴 하지만 그만큼 한적하기도 하고, 현실에서 벗어난 것 같을걸.”
“고마워요. 그쪽으로 알아볼게요.”
“아, 부럽다.”
“……여행이요?”
“아니, 리젠이.”
루벤이 그녀의 짧은 갈색 머리를 매만지며 속삭였다.
“너랑, 매일 같이 살고, 여행을 떠나고, 같은 밥을 먹고…….”
“대신 지금까지 학교 한번 못 빠졌다니까요.”
르엘라가 그의 파란 눈을 바라보았다. 밤하늘에 별 하나 떠 있지 않았지만, 그의 실루엣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녀가 천천히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고 있던 그의 큰 손에 겹쳤다. 루벤의 눈이 커졌다. 늘 가만히만 있던 그녀였다. 루벤의 입술이 떨렸다.
“내가 함께 하기에 그렇게 좋은 여자인지, 잘 모르겠는데.”
“르엘라.”
“앞으로도, 잘 생각해 봐요.”
그녀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루벤.”
루벤도 눈을 감았다. 세상 가장 소중한 것에 입을 맞추느라, 첫입맞춤에 모든 신경을 쏟아붓느라, 루벤은 꽤나 훌륭한 무인임에도 불구하고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자신의 궁이기 때문에 모든 긴장을 풀고 있었던 요인도 있었다. 나람이 조심스럽게 그의 궁에 왔다가, 그들의 모습을 확인하고 크게 놀라서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리젠이 너무 좋아해서 마음이 아플 지경이다. 말은 안 했어도, 그동안 친구들이 가족 여행이다 바캉스다 하며 놀러갔던 것이 부러웠던 모양이다. 나는 한 번도 리젠과 여행을 가 본 적이 없다. 당연히 학기 중에는 공부를 해야 하는 거고, 방학 때는 너무 춥거나 더워서 어딜 갈 생각을 못했다. 대학에 가면 더 이상 방학도 없다. 내가 약제국과 집만 반복하는 삶을 당연하다 여겨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내가 더 신경이 쓰였던 것은, 그동안 리젠은 내게 어딜 놀러 가자는 말도 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조금만, 조금만 나를 놓았을 뿐인데 모두가 행복해진 것 같다. 테스티는 약속대로 나를 부르지 않았고, 아셰는 가끔가다 찾아가도 나의 마음을 충분히 확인했는지 더 이상 리젠과 자신을 비교하며 징징거리지 않는다. 루벤 역시, 자꾸만 하늘을 나는 기분이라며 하루하루가 소중하다고 몇 번씩이나 말한다. 흥분한 채 놀러 가서 입을 온갖 옷을 펼쳐 보고 있는 리젠을 보면서, 아, 내가 너무 빡빡하게 살았구나, 어릴 적부터 너무 위험한 지식을 잔뜩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너무 나를 옭아맸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르엘라의 일기장 중 발췌
렌토 지역에서 느긋하게 휴가를 보내고 있던 르엘라와 리젠이 서둘러 아메니티로 올라온 것은, 서쪽 별궁에 큰불이 나서 스잔나와 서쪽 영주들이 모두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였다. 렌토에서 아메니티까지는 꽤나 먼 거리였기 때문에, 마차를 타고 즉시 올라왔는데도 불구하고 일주일이나 걸렸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서 도로가 거의 패닉인 상태였고, 국상 기간이었기 때문에 이동이 쉽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다. 르엘라는 아메니티에 도착하여 단순한 화재였다는 수사국의 발표를 듣고 나서야 마음을 놓았지만, 마음속에 꺼림칙한 것들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스잔나가 죽었다는데…… 화재로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참사를 막으려고 어느 날 르엘라가 눈을 질끈 감고 테스티의 궁에서 펜을 들었는데, 예상했던 것은 아니어도 다른 연유로 히람궁이 무너졌다. 르엘라는 테스티에게 찾아가는 것도 무서웠다. 아니, 사실은 그녀의 얼굴조차 보기 싫었다. 그제야 르엘라는 자신이 누구와 손을 잡았는지 깨달았다. 어쩌면 자신이 이용당한 것 아닐까? 흑마법에 대하여 자세히 모르지만, 계획대로 스잔나를 죽였다면 한 번의 흑마법으로 윌리엄을 죽일 수 있다.
그녀는 생각하기를 멈췄다. 루벤이 테스티가 하는 모든 일에 무관심하게 구는 것은 그가 바보라서가 아니다. 다만 알게 되면 괴로워질 듯하여 일부러 눈을 감는 것이다. 정말로, 테스티의 말처럼, 평생 속일 수 있는 비밀과 거짓말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으니까. 정말로, 정말로 모른 채로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르엘라는 순간, 테스티는 자신을 평생 속이려고 작정했던 것 아닐까 싶어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런 건 생각할 여유조차 없어.”
루벤은 리젠이 입학시험 때문에 늘 도서관에서 밤늦게 온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종종 르엘라의 집에 찾아왔다. 여전히 궁 밖으로 나가는 것에 전혀 위기감이 없었다.
“어쨌든 어머니의 평생소원대로, 그 자리에 앉았으니 됐어. 윌리엄도 아직 자식을 못 낳았으니, 아직 나오지도 않을 아이가 성년이 될 때까지 이제 난 계승 2순위야. 그때까지는 뭐 어떻게 되겠지. 정치적으로 나랑 윌리엄은 너무 다르니까.”
“백 명이…… 넘게 죽었는데요.”
“어머니가 대단한 사람이긴 하지만,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은 안 돼. 한낱 인간인걸. 당연히 마음이야 굴뚝같겠지만, 이번 사건은 정말로 우연이라고 봐.”
그가 르엘라가 끓여 준 차를 마시며 싱긋 웃었다.
“맛있네.”
“아셰 왕녀님의 차를 마셔 보시면 이 정도로 맛있다는 말이 안 나오실 텐데.”
“그 계집애 궁에 내가 왜 가? 내 차에 독약이나 안 타면 다행이지.”
“아셰 왕녀님과 사이가 안 좋으실 것도 없잖아요.”
“그래도 우리 어머니가 샤틴한테 한 짓을 생각하면…… 아셰도 능력이 없어 그렇지 우리를 다 죽이고 싶을걸? 왕족은 다 똑같아. 죽고 죽이는 게 일상이라고.”
루벤은 피곤한 듯 목 뒤를 주무르며 나른하게 말했다. 르엘라는 앉아 있을 때도 작은 몸집이지만 허리를 곧게 펴는 습관이 있었는데, 루벤은 정말 다닐 때에도 건들거리는 걸음걸이였고 앉아 있을 때에도 의자 끝에 몸을 눕히다시피 하면서 앉아 있곤 했다. 다니엘보다도 자세가 엉망인 루벤을 보면서, 왕자 신분을 숨기고 평민이 여행을 다니듯 자유롭게 쏘다닐 법한 남자라고 르엘라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