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256)

53화.

중립성, 진실, 원칙, 전문성, 객관성……. 르엘라는 머리를 어지럽게 떠다니는 단어들의 무력감을 느꼈다. 아무리 아무의 편도 들지 않는다고 했지만, 이미 비 오는 날 루벤을 만나러 뛰쳐나갔을 때부터 그녀가 중립을 지킨다는 것 자체가 오만이었던 셈이다. 루벤이 그녀의 그런 강단을 사랑한다고 했지만 어쨌든 그는 왕족이었다. 왕족의 손을 잡는 것 자체가 커다란 싸움에 휘말릴 수밖에 없는 구조였던 것이다.

가만히 자문해 보았다. 이 수많은 일들을 과연 한 번도 예상하지 못했는지. 루벤을 둘러싼 그 엄청난 폭풍 속에서, 루벤만 쏙 빼 와서 가졌던 달콤한 시간들을 언제까지 누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다만 귀를 막고 눈을 가렸던 시간들이다. 가만히만 앉아 있었던 그 시간들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이런 말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르엘라를 보며 테스티가 속삭였다.

“조카가 내년에 중학교를 졸업한다지?”

르엘라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졸업 여행 후보지로 히람궁이 있더구나. 하긴, 아름다운 곳이고 그때 막 완공될 만한 시기니까.”

“……왕비 마마, 설마…….”

“무력하지 않니? 너 같은 천재도, 사실은 권력 앞에서는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아. 사람인 이상 약점은 있고, 약점을 지키려면 생각보다 많은 힘이 필요해. 그래서 왕족들이 그토록 왕위에 목을 매는 거란다. 나 역시 목숨을 걸고 한 발 한 발을 내딛고 있지. 이 정도면 공평하지 않나?”

찻잔을 쥐고 있던 르엘라의 손이 덜덜 떨렸다. 테스티는 오랜 연륜을 가진 여자였고, 한 번 더 압박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을 이미 직감한 상태였다. 한 번도 이런 상황을 겪어 본 적 없는 샌님 연구원에게 도의적 명분과 함께 가족이 얽힌 협박을 하고, 더 이상 깊은 생각을 할 수 없도록 짧은 시간에 압박하는 것.

“이 모든 것을, 너는 가장 단순히, 최소한의 희생자만 남기고, 아니 원래 죽을 운명인 둘만 놔둔 채 해결할 수 있어.”

테스티가 펜과 종이를 테이블 위에 탁, 소리 나게 놔두었다.

“더 이상 찾아올 것도 없다. 지금 쓰고 가렴. 그리고 잊어라. 너도 루벤처럼, 내가 하는 모든 일에 무관심하면 돼. 쓰고, 그냥 잊어. 약속하마. 널 다시는 부르지 않겠다. 널 다시 부르는 날은, 너와 루벤의 결혼식 날이 될 거야.”

“르엘라?”

아셰는 갑자기 찾아온 르엘라의 얼굴을 보고 좋아서 팔짝팔짝 뛰었다. 매일 자신이 불러야만 겨우겨우 찾아오고, 원칙을 지켜야 한다며 약초학을 더 배우고 싶다는데도 안 가르쳐주던 그녀였다.

“나 빨리 학교 가고 싶어.”

훌륭하게 우린 차를 르엘라에게 자랑스럽게 건네며 아셰가 쫑알거렸다.

“너무 외로워. 왕족 교육도 다 끝났고,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도 없어. 우리 엄마가 우울증 걸릴 만도 해. 이렇게 십 년 넘게 산 거잖아.”

“학교에 가시면…….”

르엘라가 조용히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 리젠이랑 친하게 지내 주세요.”

“……몰라.”

아셰가 뚱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좀 질투 난단 말이야. 리젠은…… 르엘라가 원칙 운운하면서 얼굴도 제대로 안 보여 주고, 그러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아니에요.”

르엘라가 쓸쓸한 표정으로 아셰의 금발 머리를 한 번 쓸어 주었다.

“성장 과정에서 결핍된 것이 있어 보여서, 결핍 없이 키우려고 노력했더니…… 빈틈을 안으로만 감추는 아이가 되었어요. 우리 리젠은 속상해도 속상하다는 말 한마디 못하는 아이거든요. 다 제가 잘못 키워서.”

“……그럴 리 없어.”

아셰가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르엘라가, 언제나 바른길만 걷는 르엘라가 누군가를 잘못 키울 리가 없잖아.”

“그게 잘못이더라고요.”

르엘라가 한숨을 쉬었다. 아셰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그래도 위태롭게 살다보니 눈치는 빨랐다. 지금 르엘라는 정신적으로 많이 위태로운 상태였다. 이런 상태를 아셰는 자신의 엄마, 샤틴에게서 많이 봐 왔다. 그녀가 르엘라의 손을 잡았다.

“르엘라, 무슨 일이야?”

“왕녀님.”

르엘라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제가 리젠을 잘못 키웠어요. 원칙 같은 거, 정답 같은 거, 완벽한 꼿꼿함 같은 건 없는데…… 인간에게 이상향 따위는 없는데, 흔들림이 있는 것이 당연한 건데, 제가…… 리젠을 정말로 잘못 키웠어요. 나 자신 자체가 완벽한 인간이 아니었는데, 무슨 오만으로 리젠을 완벽하게 키우겠다고 생각했는지…….”

“르엘라!”

아셰가 안타깝게 소리쳤다.

“왜 이래, 무슨 일이야?”

“……그러게요.”

말을 하다가 평정심을 가까스로 되찾은 르엘라가 마른침을 삼키고 시선을 돌렸다. 지금 리젠 또래의 아이를 붙들고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다시 억지로 웃으며 아셰를 바라보았다.

“왕녀님, 우리 리젠하고…… 잘 지내 주세요.”

“……알았어.”

아셰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조금 심술 났지만…… 내가 르엘라의 조카랑 안 친하게 지낼 이유가 없잖아.”

“리젠이 가끔…… 속을 보이지 않더라도 이해해 주시고요.”

“그림이 그려지지 않아? 지금 우리랑 똑같을 거야.”

르엘라의 손을 꽉 쥐며 아셰가 말했다.

“나는 리젠을 당연히 좋아하게 될 거야. 리젠은 학창 시절엔 나와 친하게 지내 주다가, 졸업 후엔 르엘라처럼 나를 철저하게 왕녀님으로 대하겠지. 나는 그 꼿꼿함이 안타깝기도 하고 마음에 들어서, 계속해서 의지하게 될 거야. 온갖 핑계를 대서 이렇게 매일매일 부르고 매일매일 징징거릴 거라고. 아마 동갑이니까, 르엘라보다도 훨씬 더 좋아하게 될걸. 정말로 친구잖아.”

르엘라의 얼굴에 살며시 미소가 걸렸다. 아셰가 몸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

“르엘라랑 리젠이랑 같이 놀러 올 수도 있겠지. 그럼 나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차를 끓여 줄게. 어쩌면 리젠이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다고 수다를 떨 수도 있어. 나는 늘…… 그런 수다가 부러웠어.”

“상상만 해도…… 즐겁네요.”

“물론 다 내가 시집가기 전까지의 얘기겠지. 그땐 정말 슬플 것 같아.”

아셰가 한숨을 푹 쉬었다.

“내가 만든 허접한 비상약 하나 가슴에 품고 쓸쓸하게 떠나는 길이란…… 진짜 엄마처럼 살 거면 죽어 버릴 테야.”

르엘라가 가만히 아셰를 바라보다가,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종이와 펜을 들었다.

“이건 왕녀님만 알고 계세요.”

“응?”

“왕녀님이 만든 그 비상, 이런 재료들을 넣으면 해독할 수 있어요.”

“……아닐 것 같은데? 갈퀴나무랑 상성이 안 맞잖아.”

“여자랑 남자의 몸은 다르지요. 여자는 달거리를 하니까.”

“……아.”

“왕녀님은 여자잖아요.”

“어머나, 그러면…….”

“남자에게는 해독 작용을 못하지요.”

르엘라가 조용히 웃었다. 아셰가 놀랍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셰는 르엘라가 무언가 자신에게 하나 더 가르쳐줬다는 사실보다, 무언가 그녀가 하나의 세상을 깬 것 같아서 충격을 받았다. 절대 할 것 같지 않았던 일을, 왜 지금 르엘라가? 아셰는 기쁘다기보다는 왠지 불안하여 그녀의 표정을 한참이나 살폈다.

“이런 해독은 사실 아무도 몰라요. 이 세상에서, 왕녀님과 저만의 비밀이에요.”

“……비밀이라니?”

“세상 사람들 모두가 모르면, 비밀을 공유했다는 사실조차 없어질 테니까.”

“르엘라, 무슨 소리야?”

아셰가 차분히 물었다. 그녀는 르엘라가 살짝 이상함을 빠르게 눈치챘다. 그토록 왕족들에게는 똑같은 가르침만 주겠다고 했는데, 그녀에게만 약간이지만 은밀한 약초약 지식을 알려 주고 절대 말하지 않는 ‘비밀’이라는 단어까지 말한 것이다. 대체 어디서 무슨 일을 겪고 온 건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꼿꼿하기 그지없었던 르엘라에게 어떤 사건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왕녀님, 무슨 일이 있어도 죽지 마세요. 어떤 미친놈이 왕녀님을 괴롭혀서 죽고 싶거든, 그놈을 죽이세요. 저는…… 왕녀님이 죽는 걸 정말로 바라지 않아요.”

“르엘라.”

르엘라가 쓸쓸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장마가 끝난 지 오래였다. 거짓말같이 비가 오는 날이 좋아지고, 붉은 장미꽃에게 눈길이 가고, 네 살이나 어린 남자를 하루 종일 생각한다. 뭔가 이상하다는 눈으로 계속해서 자신의 표정을 살피는 아셰에게 르엘라가 빙긋 웃었다.

“뇌물이에요.”

“……어?”

“리젠을 잘 부탁해요. 그 애는 밝고 명랑해서 주변에 사람은 많지만 친구가 없어요. 그 아이가 저처럼 살지 않게…… 늘 웅크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꼭 항상 손을 내밀어 주셔야 해요.”

“약속할게.”

아셰가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그 애 편이 되어 줄게. 나 아셰 사이나카라 아메탄, 무조건 르엘라와 리젠의 편이야.”

“고마워요.”

“잊지 않을게. 르엘라가, 나를 그래도 특별히 생각했다는 것. 나를…… 그래도 죽지 않았으면 하고 남들보다 더 위해 준 것. 내게는 아무도 그런 사람이 없었어……. 그렇지만…….”

아셰가 굉장히 걱정된다는 얼굴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르엘라,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르엘라도 절대 죽지 마.”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왕녀님?”

“지금 르엘라 표정이…… 너무 이상해서 그래.”

르엘라는 눈을 깜빡였다. 아셰는 속으로, ‘뭔가를 놓아 버린 사람처럼…….’이라는 말을 삼켰다.

루벤은 연무장에서 한껏 땀을 흘리고 오는 길이었다. 요즈음에는 평소 그렇게 밥 먹듯 빠지던 회의에도 끊임없이 참석하고 있었다. 그리고 참석할 때마다 답답한 소리를 해 대는 귀족들 때문에 하루하루 더 복장이 터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어린 나이부터 자유롭게 대륙을 돌아다니며 보통 사람들의 일상을 관찰한 만큼,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귀족들의 입장에서 하는 탁상공론이 전혀 피부에 와 닿지 않았다. 대체 세금의 비율을 계산하고 있는 저 사람이 아메탄의 평균 사람들의 삶을 알고 있기는 하는지 궁금했다.

훌쩍 떠나 버리고 싶은 마음도 사라진 것은, 매일 같이 만날 수 있는 르엘라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는 르엘라가 미치도록 좋았고, 차마 손끝 하나 댈 수 없을 정도로 소중했다. 그녀를 안고 싶은 마음이야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그럴 수 없는 것은 그녀의 대나무 같은 성정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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