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2/256)

52화.

“그런 남자 앞에 가면, 정말 엄청 최선을 다해야지. 더 활짝 웃고, 더 명랑하게 얘기하고, 한껏 예쁘게 꾸며서 나한테 정신 못 차리게 해 주겠어! 내가 하이틴 소설에서 다 봤다고.”

리젠의 열의 넘치는 말에, 르엘라가 레몬 맛 사탕을 머금은 채 중얼거렸다.

“아니야, 리젠.”

“응?”

“함께할 남자는 그렇게 고르는 게 아니야.”

리젠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르엘라를 바라보았다. 지금, 지금 고모가 남자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이런 얘기를 할 때마다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던 르엘라였다. 리젠의 얼떨떨한 얼굴을 보며 르엘라가 피식 웃었다.

“너의 우는 모습, 너의 어두운 내면, 너의 엉망인 얼굴을 사랑해 주고, 그 속에서 너의 매력을 알아주는 남자를 만나야지.”

르엘라는 루벤의 고통스러워하는 얼굴, 윌리엄 때문에 다소 꼬인 내면, 비를 잔뜩 맞아 웃기게 변한 그의 얼굴을 상상하며 천천히 말했다. 루벤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의 무관심함이 결국 자신을 테스티 앞으로 불러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마음을 어쩔 수가 없다. 사랑은 완벽한 사람에게만 오는 것이 아니니까. 

리젠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그런 남자가…… 과연 있을까?”

“열심히 찾아봐.”

리젠의 손에서 사탕 껍질이 바스락, 하는 소리를 냈다. 둘이 함께 있는 집은 언제나 편안했다. 달콤한 사탕 냄새처럼 두 사람 사이에 소소한 행복이 흘렀다.

“그런 남자가 나타나면, 절대 놓치지 말고.”

‘만약’이라든가 ‘만일’로 시작하는 문장을 한두 번 생각해 본 것이 아니다. 만일 내가 왕족 약물 교육을 맡지 않았더라면, 만일 내가 블랑 선배의 말을 듣고 루벤의 약물 교육을 책임지겠다고 하지 않았더라면, 혹시나 우리가 처음 만난 기간이 장마가 아니었더라면.

우리의 감정은 단순히 비 오는 날과 조건화되어서, 다른 사물들과 너무 많이 연결 지어 버려서, 뜬금없이 부자연스럽게 생긴 것은 아닐까. 늘 삐딱했던 루벤은 그저 원칙주의자인 나를 무너뜨리고 싶었던 마음으로 시작했다가 단순히 멀리 가 버린 것 아닐까. 하지만 생각의 끝은 언제나, 그런 가정들이 모두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모든 상황을 가정해 봐도, 이미 생긴 감정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고 덩그러니 남아 있다.

어제는 아주 오랜만에 비가 와서, 루벤과 정자에 한참 동안 앉아 있었다. 약제국에 휴가를 내어 겨울에 어디 놀러 가자는 것을, 리젠을 혼자 둘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러고 보니 리젠의 왕립고등학교 입학이 그다지 멀지 않았다. 생각난 김에 이번 휴가엔 리젠과 멀리 여행이라도 다녀오겠다고 했더니 그가 한껏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앉아 있는데, 수풀에서 처음 보는 여자아이가 나타나 우리 둘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루벤의 아는 척하기도 귀찮다는 표정을 보고 그 자리에서 도망가 버렸다. 내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자 루벤이 ‘나람이야’라고 한마디 했다. 기분이 정말 이상했다. 나는 지금, 리젠보다도 어린아이에게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아니, 나는 그 애한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르엘라의 일기장 중 발췌

테스티가 다시 또 르엘라를 불렀을 때 거절하지 못한 것은 그녀가 왕가의 사람이기도 했지만, 전적으로 그녀가 루벤의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욕심과 계략을 숨기지 않는 여자였다. 르엘라는 사람들이 왜 그녀를 싫어하는지 알 것 같았지만, 싫어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신변잡기적인 얘기를 하다가, 테스티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르엘라.”

“예.”

“나는, 평생 알려지지 않은 비밀은 은폐를 진실로 만든다고 생각한다. 아무도 모르는데 누가 거기에 진실과 거짓의 꼬리표를 달겠느냐?”

르엘라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나올 때면 그녀는 어디서나 입을 다물곤 했다.

“같은 얘기로, 누군가를 평생 속일 수 있다면 그건 거짓말이 아니지.”

테스티가 우아하게 차를 마시며 눈을 반짝였다. 나이가 마흔이 훌쩍 넘었는데 여전히 곱고 아름다웠다.

“르엘라, 나는 스잔나를 죽이고 싶다.”

“…….”

“이건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능적인 감정 같은 거야. 내 남자를 나눠 가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야. 제펠탄이 맨 처음 대학에서 나를 만났을 때, 이름만 걸어 둔 귀족 출신 정혼녀에게는 마음이 없다며 내게 무릎을 꿇었지. 그러나 그 마음 자체로는 안 되는 것이 있어. 나는 마음이 아닌 실제로도 그의 가장 옆자리에 서고 싶단다.”

르엘라는 자신도 모르게 어제 보았던 어린 여자아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루벤은 그런 어린애가 자신의 아내라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나람은 공식적인 그의 아내다.

“나는 나람을 죽일 거야. 그 계집애는 하등 쓸데가 없다. 심지어 알고 있는 비밀도 많지. 루벤은 또다시 다른 외국인과 결혼해야 한다는 생각에 말리고 있는 중이지만, 어차피 그 애를 죽여도 딱히 관심은 없을 거다.”

“……저한테 말씀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나는 스잔나를 죽일 거야. 내가 왕비로 올라가면 루벤에 더 힘을 실어 줄 수 있어. 지금 생각으로는 내년 봄에 완공되는 히람궁에 스잔나가 왕비 자격으로 연회에 참석할 때, 히람궁을 무너트리는 거야. 지금 히람궁 건설자들이 모두 내 수하다.”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스잔나 하나를 죽이려고 그 연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희생되겠지.”

“……옳지 않은 일인 것을 아시고 계시는군요.”

“이미 나는 왕가의 사람이야. 나의 이득을 위한 희생에 별 감흥이 없다. 누군가가 나를 그렇게 죽일 수도 있는 일이니까.”

“그래도 옳지 않습니다.”

“그럼 네가 나를 좀 도와주렴.”

테스티의 부드러운 말에 르엘라가 입을 다물었다.

“네가 마력증폭약을 제조해 준다면…… 아니, 네가 직접 제조할 필요도 없다. 제조법만 넘긴다면, 그걸 나람에게 먹여 흑마법으로 스잔나를 죽이면 되니까.”

“……흑마법이요?”

“나람은 흑마법사란다. 마력이 부족해서 다만 쓸 수 없을 뿐이야.”

르엘라는 흑마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다만 한스팀 왕국에서 한때 번영한 마법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흑마법은 저주 계열이라는 것만 풍문으로 들었던 수준이었는데, 이용 가치가 있어서 데리고 왔다는 루벤의 말이 생각나면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했다.

“어차피 나람은 죽어. 스잔나도 죽을 거야. 그 사이에서 무고한 서쪽 영주들을 함께 죽이느냐, 마느냐의 문제란다.”

르엘라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테스티와 루벤은 어쨌든 한배를 탄 사이다. 이 일을 누군가에게 발설한다면 루벤에게 치명타가 된다. 테스티는 이미 르엘라가 자신의 뒤를 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선택하렴.”

그녀가 싱긋 웃었다.

“너한테 달렸어.”

르엘라는 난생처음으로, 세상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두 명을 죽일래, 아니면 백 명을 넘게 죽일래? 어차피 그 두 명은 죽은 목숨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네가 살릴 수 있단다.”

“그러지 마십시오. 루벤도 원하지 않을 겁니다.”

“아니.”

테스티가 단호하게 말했다.

“루벤은 무관심해. 내가 어떤 일을 하던 신경 쓰지 않아. 그 애의 모든 신경은 지금 너한테 가 있단다. 게다가 너를 왕비로 들이기 위해 어느 때보다도 왕위를 원하고 있지.”

“이건 아닙니다. 왕위를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건 정말로 말도 안 되는…….”

“네가 그렇게 생각하면…….”

르엘라는 자신도 모르게 손이 떨리고 있음을 인식했다.

“마력증폭약 제조법을 넘겨. 약속하마. 딱 나람만 먹이고 폐기할게. 나람의 흑마법으로 스잔나를 죽인 뒤에는 윌리엄도 죽이지 않으마. 내가 왕비 자리에 오르면, 꼭 정치적으로만 이겨서 루벤을 왕위에 올릴 것이다. 루벤이 오를 왕의 길에, 피를 최소한으로만 뿌리는 방법이란다.”

물론 테스티의 말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거짓이었다. 히람궁의 건설자들이 그녀의 수하라는 것도 거짓이었고, 나람 혼자서 마력증폭약만 있다면 흑마법을 사용해 스잔나를 죽일 수 있다는 것도 거짓이었다. 그러나 르엘라가 그런 걸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영리하고 똑똑해도 정치판의 술수에는 무감각했으며, 흑마법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도 없었다. 일평생 공부만 해 온 르엘라를 갖고 노는 것은 테스티에게 식은 죽 먹기였다.

“내가 말했잖아.”

테스티가 속삭였다.

“언젠가는 누군가의 편을 들어야 한다고.”

루벤만, 루벤만 아니었어도! 그러나 루벤은 그녀에게 간절하게 빌었다. 제발 자신의 손을 놓지 말아 달라고. 대답하지 않았지만, 르엘라는 그의 손을 놓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루벤에게 이 모든 걸 말하면 몹시 화내며 테스티에게 다시는 르엘라를 부르지 말라고 하겠지만, 이미 테스티가 무고한 사람들을 잔뜩 죽일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을 알아 버린 이상 가치 판단의 공은 르엘라에게 넘어온 셈이었다.

모르는 척할 수 없다. 모르는 척하는 순간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고발할 수도 없다. 어차피 테스티가 발뺌하면 그만이고, 루벤과 한배를 탄 그녀를 침몰시킬 수도 없는 일이다. 르엘라는 사랑 앞에서 사람이 얼마나 벼랑 끝에 설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나는 백만 명도 죽일 수 있어. 그렇지만 어쩌면…….”

“…….”

“두 명만 죽이고 끝낼 수 있어. 그것도, 원래 죽음이 예정되어 있는 사람.”

르엘라는, 어느 날 아직 고등학생이었던 자신에게 오빠가 갑자기 갓난아이를 던져 주고 수도원으로 사라졌을 때보다 더한 막막함을 느꼈다. 지금은 막다른 길에 선 느낌이었다.

“결정해. 두 명이야, 백 명이야? 르엘라, 네가 결정하렴. 바로 지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