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51/256)

51화.

“약은 신기하지만 위험합니다. 하나의 약을 세상에 내놓을 때에는 굉장히 많은 것을 생각해야 하고요. 이렇게 개인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때그때 제조하는 것은 왕궁의 녹을 먹는 약제국 직원이 할 일이 아닙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고 또 그 변화를 수용할 준비가 되지 않은 이상 저는 약을 공개하지 않습니다.”

테스티는 조금도 설득되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러한 교과서적인 말을 듣자고 그녀를 부른 것이 아니었다. 테스티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르엘라가 말을 이었다.

“예를 들어, 저는 꿈 연결 시약 같은 것을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외국의 스파이와 증거 없이 연결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을 것 같아서요. 그러나 그 약이 시판된다고 가정해 볼게요. 개인적인 감정으로 합의되지 않은 누군가에게 몰래 먹이면, 당하는 사람은 꿈에서 무방비인 자기 모습을 보여 줄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당하는 줄도 모르게 당하는 또 하나의 폭력이죠. 이제 이런 것이 세상에 풀리면 사람들은 누군가가 주는 음료를 믿지 못하게 될 겁니다. 약을 개발한다는 것은, 목적 외에 쓰일 수 있는 수많은 부작용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에요.”

르엘라의 긴말에, 테스티는 이 약제국의 고리타분한 직원이 절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쉽게 포섭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루벤이 르엘라와 연인 관계인 것 같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정말 새로운 길이 열리는 줄 알았는데 턱도 없을 듯했다. 그러나 이 대화에서 소득이 없는 건 아니었다.

르엘라가 천재인 줄은 알았으나, 너무나 당연하게 ‘상상할 수 있는 약은 모두 만들 수 있다’라는 문장이 그녀의 마음을 끌었다.

“나도 왕립종합대학을 다녔지. 그곳에서 제펠탄을 만났어. 바로 후궁에 오르느라 산하기관에 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약초학에 흥미가 많았다.”

현왕, 제펠탄이 대학에서 만난 테스티를 가장 사랑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르엘라는 표정의 변화 없이 딱딱하게 테스티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순수한 궁금증인데…….”

“하문하십시오.”

“그러면…… 마력을 높일 수 있는, 그런 약은?”

“……시도해 보았습니다. 만들 수는 있으나 부작용이 큽니다.”

“그런 약을…… 이미 시도해 보았단 말이야?”

“조카가 마법에 재능이 있습니다. 마력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기에 한번 생각해 본 것뿐입니다. 하지만 마력은 자연의 힘 그 자체이기 때문에 아무 대가 없이 증폭시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합니다.”

“대가? 무슨 대가?”

“보통 마력 역류에 의한 급사입니다. 6개월 내에 증상이 나타날 겁니다.”

마력 증폭에 대한 요구는 별로 새로울 것도 없었다. 날이 갈수록 사라져 가는 마력은 마법사들의 가장 큰 위기였다. 자연에서 끌어 올 수 있는 마력이 고갈되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래서 불법 마법약 중 가장 큰 이익을 올릴 수 있는 것이 마력 증폭에 관한 약이었다.

테스티는 살짝 눈을 내리깔고 차를 마셨다. 나람이 요구한 말도 안 되는 조건들 중 하나가 백만 명이 넘는 마법사들이었고, 또 하나가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죽은 땅의 흙이었다. 그 두 조건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만약에 그런 방식으로 한 명을 죽이고 난 후 다시 마법을 사용하려면 다시 5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분노에 찬 테스티는 루벤이 말리지 않았다면 나람을 죽일 뻔했다. 그 앙큼한 노예 계집애가 불가능할 것을 알면서도 거의 사기를 치는 수준으로 결혼을 진행했던 것이다. 까다로운 조건은 다 맞춰 준다고 얘기한 테스티의 잘못도 있었지만, 결혼식 전에 캐물어도 계속해서 말을 흐리던 나람의 의도도 뻔했다.

“그리고…… 저는 마력이 많은 세상이 별로 좋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르엘라가 개발한 마력증폭약만 있다면, 그 어려운 조건 중 백만 명의 마법사들을 모으는 건 대충 해결될 것 같다고 테스티가 속으로 생각할 때에, 르엘라가 말을 이었다.

“마력이 많아 마법사들이 마음껏 힘을 쓰던 시절에는 재난도 많고 범죄도 많았습니다. 틈만 나면 화재에, 틈만 나면 지진이었지요. 마법은 어쨌든 순식간에 수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 있는 파괴적이고 위험한 힘입니다. 오히려 지금이 훨씬 더 평화롭지요.”

르엘라는 테스티에게 자신에게 그런 것을 요구하지 말라는 뜻으로 덧붙인 것뿐인데, 테스티는 또 하나의 단서를 얻은 것 같아 머릿속에 불이 켜지는 기분이었다. 그래, 100명이 넘는 사람들을 한 번에 죽이는 것 역시 마법으로 가능하다. 지금은 마법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어서 그렇지, 옛날에 마법이 융성했던 시절에는 그 정도야 일도 아니었다.

“그래, 네 말이 맞구나. 내가 생각이 짧았다.”

테스티가 다정한 얼굴로 웃었다.

“약에 대한 지식이 없어 깊게 사유하지 못한 내 탓이다. 내 부탁은 모두 잊어다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루벤 왕자님께는 오늘의 만남을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한마디만 내가 조언하도록 하겠다.”

일어나서 꾸벅 고개를 숙이는 르엘라의 어깨를 두드리며 테스티가 말했다.

“살면서 가치판단을 계속해서 피해갈 수는 없단다. 어느 날 갈림길에 섰을 때, 네가 주장하는 객관성이나 중립성이 선택지에 없을 수도 있어. 인간은 주관적이고, 언제나 나름의 판단을 해야 하며, 결국엔 누군가의 편에 서야 한단다. 결국엔 그런 상황이 올 거야, 르엘라 하카트.”

“바라는 것이 있어.”

루벤이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다가 중얼거렸다.

“뭔데요?”

“네가 내 궁에 직접 찾아오는 것.”

“그 길 아직 안 막으셨어요?”

르엘라가 한숨을 쉬며 물었다. 그들의 만남은 거의 약제국 뒤편에 왕궁까지 이어지는 정원에서 이루어졌다. 약제국도 아니고 왕궁도 아닌 애매한 곳으로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았고, 르엘라는 퇴근길에 그곳에 들러 강아지처럼 기다리고 있는 루벤과 대화를 나누다가 집에 가곤 하였다.

리젠에게 혹시나 들킬까 봐 르엘라는 그를 절대 집에 오지 못하게 하였고, 정말 그들은 하루에 한 번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이 다였다. 루벤은 너무나 당연히 르엘라와 결혼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만일 왕이 되지 않는다면 르엘라의 자아실현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납치해서 외국의 외딴 섬으로 도망치겠다고 중얼거리곤 했다. 그리고 르엘라는 그런 말들을 전혀 귀담아 듣지 않고 있었다.

르엘라는 진심으로 그가 왕이 되건 안 되건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그저 다만 루벤과 같이 있을 때만큼은 속에서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것뿐이라는 것을 본인도 알고 있었다. 지금도 매일같이 고민했다. 얼른 끊어 내야 할 관계 아닐까, 정말 루벤 말대로 이래도 되는 걸까, 이것이 정상적인 관계일까, 끊임없이 생각했다. 

보통 왕족의 애인으로 머무른다는 것은, 그가 왕이 될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므로 완전한 그의 편에 서는 것을 뜻했다. 르엘라는 자신이 그것을 원하는가에 대해서도 명확히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퇴근길에 정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를 루벤이라고 불러 주는 것.”

“왕자님, 그건 안 될 말씀입니다.”

“오늘 회의에서는 뮤엘튼 공작이 내가 말하는 것마다 딴지를 걸더군. 윌리엄의 개답게.”

르엘라는 그저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루벤이 어떤 정치적 발언을 해도 절대 가타부타 대꾸하지 않았다. 성격이 불같은 그는 여러 가지 수를 쓰는 정치를 몹시 힘들어했다. 그러나 테스티의 가장 큰 기반 역시 귀족 정치에 있고, 왕이 되겠다 확실히 마음을 먹었으니 요즈음 꽤나 고군분투하는 듯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다 보니 석양이 지고 있었다. 너무 늦지 않게 르엘라는 항상 집으로 갔다. 리젠과 함께 저녁을 먹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루벤이 그녀의 다리에 얼굴을 부비며 말했다.

“르엘라.”

“네.”

“나는 여행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어쩌면 끝없이 방황하고 있는 중이었던 것 같아.”

르엘라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보다 훨씬 덩치가 큰 남자가, 그것도 왕족이, 굉장히 애달프게 온순한 애완동물처럼 그녀를 원하고 있었다. 

“정처 없이 떠돌기만 했던 내 삶에, 너 하나만이 빛이야. 너와 함께 있는 이 순간을 위해 모든 시간을 참을 수 있을 만큼.”

“…….”

“나를 놓지 마.”

“왕자님.”

“나를 버리면 안 돼.”

루벤이 눈을 감고 그녀의 허리를 꽉 감싸 안았다.

“네가 나를 받아들이기 힘들 거 알아…… 이게 최선이라는 것도 알아……. 그렇지만 제발 이 자리에는 있어 줘야 해.”

그녀의 시선이, 오늘도 루벤이 준비해 온 붉은 장미꽃 다발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이게 뭐야?”

르엘라는 미간을 찌푸리며 리젠이 잔뜩 가져온 사탕을 바라보았다. 리젠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다 내가 받은 거야.”

“왜?”

“오늘 발렌티노의 날이잖아.”

“그게 뭔데?”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탕을 주는 날.”

리젠은 르엘라가 좋아하는 레몬 맛 사탕을 건네며 배시시 웃었다. 르엘라는 기억 속에서 그런 날을 찾아냈다. 주로 어린애들이나 챙기는 날이었고 고등학교만 가도 유치한 상술이라며 모르는 척하는 기념일이다.

“널 좋아하는 애들이 이렇게 많아?”

“뭐, 당연한 결과 아니겠어? 이렇게 예쁘고, 쾌활하고, 공부도 잘하는데. 내년이면 왕립고등학교도 따 놓은 당상이고.”

리젠이 으스대며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르엘라는 순간, 그렇게 모든 것을 잘하지 않아도 누군가는 널 좋아할 수 있다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대신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래? 그럼 너도 좋아하는 남자한테 줄 사탕을 만들어야 하는 것 아냐?”

“나? 난 아무도 안 좋아해.”

리젠은 체리 맛 사탕을 골라 입에 넣으며 발랄하게 말했다.

“난 잘생긴 남자가 좋아. 금발 머리에, 파란 눈에, 웃는 것이 예쁜…… 옛날에 왕궁에서 봤었던, 다니엘 왕자님 같은 사람. 보고만 있어도 두근두근하고, 뭐 그런.”

르엘라는 리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무리 똑똑하고 영리하다고 해도 이럴 때마다 애는 애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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