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화 (50/256)

50화.

“왕자님.”

그가 딱딱한 르엘라의 얼굴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루벤.”

“……네?”

“루벤이라고 불러 줘.”

“그럴 수 없습니다.”

“또 원칙 타령이야?”

그가 잡은 르엘라의 손을 크게 한 번 휘저으며 유쾌하게 말했다.

“아아, 루벤이라고 불러 주면 정말 좋겠다.”

“왕자님.”

르엘라가 한숨을 쉬었다.

“이러시면 안 돼요. 아내가 계시고…….”

“아, 나 그 말 하고 싶어서 왔어.”

루벤이 밤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 정말 왕이 되려고.”

“……네?”

“내국인하고 결혼할 수 있는 사람은 왕뿐이야. 알잖아. 혹시나 네 앞길을 막을까 봐 남들에게 비밀로 하는 면도 있지만, 난 너를 애인 같은 위치에 두고 싶지 않아. 그럼 정치하는 애들이 들러붙는다고. 너는 정치판에 오지 마. 더러운 길은 밟지 마.”

그가 르엘라의 손을 꽉 쥐었다. 그녀는 너무 놀라서 할 말도 잊었다.

“왕이 되고, 널 왕비로 앉힐 거야. 나람은 자기 삶 살라고 하면 되고. 지금도 그냥 딱히 다른 외국인이랑 결혼하기 싫어서 놔두는 건데, 그때 자유를 줘도 돼. 그때까지만 좀 답답해도 궁에 있으라고 하지, 뭐. 어차피 노예보다는 낫잖아? 내가 구해 준 거니까.”

“나람도…… 알아요?”

“몰라. 결혼식 다음 날 이후로 본 적이 없으니까. 난 내가 결혼했다는 사실도 까먹고 살아. 그래도 염치가 있으니 잘 숨어 살고 있겠지, 뭐.”

르엘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루벤이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간절하게 말했다.

“사실은 오늘 하루 종일 네 생각뿐이었어.”

“…….”

“아니, 언젠가부터 늘 네 생각이었어. 사실은 약물 수업 같은 건 제대로 듣지도 않았어. 어느 순간부터…… 그냥 너한테서 눈을 뗄 수가 없더라고. 나도 모르겠어, 누군가를 이토록 좋아해 본 적이 처음이라.”

그가 대답 없는 르엘라의 어깨에 양손을 올렸다. 그녀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네가 도망갈까 봐, 바보같이 바로 찾아온 거야. 알잖아. 난 그냥 대충 결혼해 버렸다고. 외국인이랑 결혼해야 한다는 병신 같은 원칙 때문에. 젠장, 지금 너랑 그냥 손잡고 도망가 버리고 싶지만…… 네가 불행할까 봐 그렇게 못하겠어. 그래도 약속해.”

르엘라는 속이 갑갑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루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기쁘면서도 커다란 무게로 자신을 덮쳐 오는 것 같았다.

“나랑 미래를 그리겠다고, 그러니 기다려 주겠다고, 내 곁에 있겠다고 약속해 줘.”

“……왕자님, 생각해 볼게요. 제겐 너무 벅찬 일이에요. 약제국과 리젠만이 제 세상이었는데…… 너무 갑작스러워요. 그리고 제가 왕자님의 애인이 되어 남들이 알게 되는 것도…… 지금은 내키지가 않네요.”

“역시, 쉽지 않다니까.”

루벤이 키득키득 웃었다. 그가 망토 안쪽에서 주섬주섬 장미꽃 한 송이를 꺼냈다.

“아직도 필요한가 보군.”

르엘라는 가만히 그 붉은 장미꽃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며 받았다. 루벤이 다시 그녀를 꽉 안았다.

“르엘라, 모든 게 다 끝나면 신혼여행을 가자. 한스팀 왕국의 밤하늘은 진짜 환상적이야. 대륙을 다 돌아다녔어도 그만큼 별이 쏟아지는 하늘은 못 봤어. 널 만나고 나는 아메니티의 별이 없는 밤하늘을 보면서도 그 별들을 생각해. 내가 보았던 온갖 좋은 것들을 너와 다시 함께하고 싶어서.”

르엘라는 눈을 감았다. 누군가에게인지는 모르겠지만, 미안하다고, 용서해 달라고, 도저히 어쩔 수 없다고 그녀는 속으로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함께 가면 밤새 나랑 별을 보며 누워 있자. 그때가 기다리기 힘들 때면 밤하늘을 봐. 언젠가는 정말 끝내주는 별을 내가 보여 주겠다고, 약속했으니까, 그걸 믿고…… 이 어두운 밤하늘 아래에서도 내 옆에 있어 줘.”

* * *

“……그래?”

한밤중, 고고하게 앉은 테스티가 흥미롭다는 듯 턱을 괴었다. 그녀의 눈에 정말 의외라는 듯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호위 무사의 보고를 들은 그녀가 잠시 생각하더니 시녀를 불렀다.

“약제국의 르엘라 하카트를 불러와.”

둥둥 발이 떠 있는 기분이다. 루벤 말마따나, 이런 감정이 처음이라 도대체 어떻게 할지를 모르겠다. 나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를 만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둘이 만나면, 나는 아무 말도 없이 그의 말을 듣기만 하고, 그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곤 했다. 보통 자신이 여행한 나라들의 특징과 자신이 겪은 사건들에 관해서였다. 어느 날, 아무 말도 안 하는 내가 왜 좋냐 물어보니 옆에 있어 주는 것만 해도 고마우니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그가 대답했다.

솔직히 나는 그가 왜 나를 이렇게 좋아하는지 알 수가 없다. 별로 예쁘장한 얼굴도 아니고, 사근사근한 성격도 아니다. 한 번도 그에게 왕이 되라고 응원을 해 준 적도 없다. 그런데 그는 시도 때도 없이 나를 찾아오고, 그 좋아하는 여행도 가지 않은 채 매일같이 장미꽃을 건넨다. 그렇게 싫어했던 정치판에도 발걸음을 하고 있는 듯하다. 귀족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힘들어 보인다.

이상하게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루벤은 다 괜찮다고 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불안하다. 내가 나 자신에게 떳떳한가 생각해 봐도 대답을 하지 못하겠다. 왕족은 유부남이어도 애인을 둘 수 있고, 산하기관 직원과 결혼했던 선대왕도 있다. 그래도 뭔가 계속 걸리는 느낌이다. 내가 도망칠 수 없는 이유는, 자꾸만 그가 일상에 치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길가에 핀 장미꽃, 비가 올 듯 드리워지는 구름, 별이 몇 개 없는 밤하늘 등 그가 없어도 그의 생각이 난다. 그런데 그 말을 루벤도 똑같이 했다. 내가 약제국에 있어도, 세상 온 천지가 나라서 늘 함께 있는 것 같다고. 그런 말을 하는 남자를…… 내가 마음속에서 지워 버릴 수 있을 리가 없다.

-르엘라의 일기장 중 발췌

“그래, 루벤이 지금 너한테 정신 못 차리고 있다고?”

테스티는 눈앞의 르엘라를 보고 조용히 미소 지었다. 르엘라는 아무 말 없이 그녀가 따라준 차를 마시며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너는?”

르엘라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테스티는 표정이 없는 그녀를 보며 아들의 취향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을 해 보았다. 그러나 날 때부터 어딘가 자유로웠던 아이이므로 보통 남자들이 좋아하는 애교 많고 밝은 여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테스티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르엘라에게, 벽에 대고 말하듯 웃으며 말했다.

“약물 수업을 했다며. 성인 남녀 단둘이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다 보면 당연히 그럴 수 있지. 난 이해한단다.”

아무리 테스티라고 해도 약제국의 천재 르엘라에게 함부로 할 수 없었다. 르엘라는 일개 직원이 아니었다. 왕까지 이름을 알고 있는 아메탄 왕국 전체의 손꼽히는 인재였다. 그래서 말이 없는 르엘라에게 테스티가 자꾸 쩔쩔매는 형국이 되었다.

“그렇지만, 왕이 아니면 후궁을 둘 수 없어. 나람을 쫓아낸다고 하더라도 루벤은 외국인과 결혼해야 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길은…… 길은 하나뿐이야.”

르엘라는 그냥 여기 앉아 있는 것 자체가 몹시 불편했다. 그녀는 정말 자신의 삶이 약제국과 리젠뿐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모두가 야망을 숨기지 못한다고, 왕비 자리를 욕심낸다고 테스티를 욕했다. 그런 테스티에게 이런 제안을 받고 있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도와줘. 둘만 죽이면 된단다. 네가 루벤과 애인 사이라는 것을 남들에게 알리지 않은 것은 아주 현명한 일이다. 너는 쉽잖니? 둘이야. 스잔나와 윌리엄, 혹은 윌리엄과 다니엘.”

“저는 산하기관 직원으로서 그 어떤 정치적 가치 판단도 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 누군가의 편이 되지 않아요.”

르엘라가 딱 잘라 대답했다. 애초부터 답을 생각하고 왔다. 테스티가 자신에게 무엇을 부탁하든, 그녀는 지금의 생활을 이어 갈 작정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꼿꼿함을 루벤은 사랑한다고 했다. 르엘라는 루벤에게도 왕이 되라고 응원 한마디 한 적이 없었다. 테스티가 예상했다는 듯 조용히 입을 가리고 웃었다.

“사람을…… 몰래 죽이는 약은 솔직히, 개발할 수 있지?”

“저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약은 다 만듭니다. 부작용이 있거나, 해독제를 못 만들어서 그렇지. 그 어떤 약을 물으셔도 저는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질문은 제게 의미가 없습니다.”

르엘라가 표정의 변화 없이 말했다.

“다만, 저는 산하기관의 중립성과 전문성을 지키는 연구원입니다. 누군가의 부탁은 받지 않습니다. 제 연구는 그저 약제국과 아메탄을 위한 것입니다.”

단호한 거절이었다. 테스티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 르엘라는 정말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붙잡지 못해 루벤의 곁에 있었을 뿐, 절대 왕족들의 싸움에 낄 생각은 없었다. 테스티가 잠시 흐른 정적을 깨고 몸을 앞으로 숙이며 다시 상냥하게 말했다.

“르엘라.”

“말씀하시지요.”

“원하는 바가 있다면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해. 너도 루벤이 왕이 되는 걸 원하잖아. 그때그때 추진하지 않으면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아. 인생은 한 번뿐이야. 능력이 되는데 돕지 않는 것, 그것도 삶에 대한 유기란다.”

르엘라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천재로 살아오면서 그동안 수많은 유혹에 시달렸다. 조용히 자살할 수 있는 약을 비밀리에 만들어 달라, 증거가 남지 않는 수면제를 남몰래 만들어 달라, 기억을 잠시 지울 수 있는 약을 조용히 만들어 달라. 불법 마법약 상점에서도 엄청난 금액을 부르며 여러 가지 청탁을 한 적도 많았다. 그러므로 왕비의 이런 부탁은 그녀에게 조금의 영향력도 끼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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