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49/256)

49화.

“이런 날만을 기다리지 않으셨어요?”

우산을 쓴 르엘라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여행 잘 다녀오세요.”

그게 마지막이었다. 르엘라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약제국으로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모습을 루벤이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구름이 바람에 밀려 차차 힘을 잃어 가고 있었다.

루벤이 생각보다 흡수력이 빨라서, 사실은 훨씬 더 빠르게 수업을 마칠 수도 있었지만 이토록 길어진 건 자꾸만 그가 시간을 끌어서였다. 루벤은 그녀를 데리고 정말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항상 약제국과 집만을 왔다 갔다 했던 르엘라는 난생처음 가 보는 곳도 많았다. 그 모든 시간이 끝났다는 사실을 둘 다 믿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사제관계 그 이상이었던 것 같은데…… 그녀가 다니엘이나 아셰를 가르치며 그렇게 돌아다니지는 않았으니까…… 르엘라는 약제국의 자리로 돌아와서도 한참 동안이나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아 가만히 앉아 있었다.

“르엘라.”

그들의 이상한 사이를 가장 먼저 눈치챈 사람은 그녀의 약제국 동기이자 가장 친한 친구인 사파엘이었다. 사파엘은 조용히 그녀를 정원 뒤로 불러 말을 꺼냈다.

“이상한 소문이 들려.”

“뭐?”

“2왕자님이랑 너. 가끔 둘만 있는 게 궁에서 많이 보인다고.”

“수업 중이야. 둘이 있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딱히 수업하는 것 같지 않다던데.”

르엘라는 딱딱한 표정으로 안경을 치켜 올렸다. 

“사파엘, 왕자님은 나보다 네 살이나 어린데다가 유부남이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사파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꽃 같은 걸 갖고 오지를 말던지. 뭐, 루벤 왕자님이 왕위를 탐낸다는 건 누구나 아니까, 애인을 가질 수도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르엘라, 그래도 도대체 왜 하필 얽혀도 루벤 같은 왕족이랑…….”

“그가 어때서?”

르엘라가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물었다.

“루벤이 왜?”

“테스티 몰라? 지금 루벤을 왕으로 밀겠다고 정치적 공작이 엄청나다는데…….”

“그게 왜?”

“르엘라!”

사파엘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생각하지도 못한 반응이다. 사파엘은 르엘라가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며 짜증을 낼 줄 알았다. 전혀 말도 안 된다고 변명을 할 줄 알았다.

“사파엘, 우리는 정치 같은 것에는 중립을 지켜야 해. 루벤이나 윌리엄이나 자기들만의 싸움이야. 우리가 가치 판단할 필요 없어. 우리가 연구에 뜻을 두었듯이 그들은 왕위에 뜻을 두었겠지. 그들 문제야.”

그 말은 맞는 말이었기 때문에 사파엘은 딱히 대답을 하지 못했다. 물론 산하기관의 정치적 중립성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 원칙을 르엘라가 루벤을 편드는 데에 쓸 줄은 몰랐다.

“그리고…….”

르엘라가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이젠 수업도 끝났어. 만날 일도 없다고.”

사파엘이 놀란 것은, 그 말을 하는 르엘라의 표정에서 쓸쓸함을 엿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흰 실험복에 붉은 장미 꽃물이 들어 있었다.

“리젠, 리젠.”

르엘라는 출근 준비를 하며 잠에 빠져 있는 조카를 깨웠다. 리젠은 눈도 뜨지 않고 웅얼거렸다.

“나…… 오늘 개교기념일…… 학교 안 가.”

“리젠, 식탁에 샐러드랑 토스트 해 놨으니 꼭 아침 먹어!”

“어…….”

리젠의 침대 옆에는 여러 가지 책이 나뒹굴고 있었다. 도서관에서 빌려 온 온갖 추리 소설들이었다. 리젠의 장래 희망은 수사국 직원으로, 딱히 약초학에 흥미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 르엘라의 재능을 물려받은 것 같지는 않았다. 르엘라는 이불 속에 파묻혀 있는 리젠을 흘끗 바라보고 집을 나섰다. 해가 쨍쨍했다.

그냥 일상으로 돌아온 것뿐이었다. 르엘라는 자신의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약초를 분류하며 생각했다. 그저, 예전과 똑같아졌을 뿐이다. 아침에는 리젠을 깨워서 학교에 보내고, 약제국에 출근하여 이런저런 연구를 하고, 저녁에 들어가서 리젠과 함께 따뜻한 식사를 할 것이다. 정말로 예전과 다 똑같다. 창문을 바라보았다. 길었던 장마가 드디어 끝난 것 같았다. 마지막 수업 이후 비가 오지 않았다.

“좋네.”

르엘라는 중얼거렸다. 드디어 우산을 챙기지 않아도 되는 나날들이 온 것이다. 턱을 괴고 그녀가 이것저것 끄적이기 시작했다. 연구를 할 때 낙서를 하는 것처럼 연습장을 쌓아 놓고 규칙 없이 생각대로 쓰는 것은 그녀의 오랜 습관이었다. 의미 없는 단어들이 나열된 몇 개의 메모지가 팔랑팔랑 쌓였다.

“사파엘, 창문 좀 닫아라. 비 들이친다.”

르엘라가 고개를 든 것은, 약제국장의 무심한 말 때문이었다. 창문 옆에 앉아 있던 사파엘이 급히 창문을 닫았다. 거짓말 같이 비가 토독토독 쏟아지고 있었다.

“뭐야, 장마 다 끝난 줄 알았더니.”

사파엘이 투덜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장마 때마다 자리의 위치 때문에 창문을 여닫는 일을 한 그녀는 비라면 정말 지긋지긋하다고 매일 짜증을 냈었다. 며칠 동안 맑았기 때문에 진짜로 이젠 비가 끝났나 싶어서 오늘 아침엔 빨래도 널어놓았는데, 되는 일이 없다고 중얼거리던 사파엘은 거짓말처럼 벌떡 일어난 르엘라를 바라보고 놀라서 말을 뚝 멈췄다.

“……르엘라? 어디 가?”

르엘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산도 없이 약제국을 나갔다. 천천히 걷던 그녀의 걸음이 더 빨라졌다. 약제국에서 꽤 먼 정자에 도달할 때 즈음이 되니 숨이 턱 끝까지 찼다. 빗물이 안경을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정자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선생님.”

루벤이 그녀를 보고 벌떡 일어났다. 르엘라는 자신이 왜 여기에 와 있는지도 모르는 채, 가만히 비를 맞고 서 있었다.

“수업이 끝난 것 같긴 한데…… 비가 오니까, 안 보고 견딜 수가 있어야지.”

르엘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루벤이 성큼성큼 걸어와 그녀에게 붉은 장미꽃 다발을 내밀었다.

“……나랑 같은 마음이었죠?”

그녀는 마치 인형처럼, 아무 표정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루벤이 장미꽃을 받지 않는 그녀의 실험복 주머니에 또다시 장미꽃을 하나하나 넣기 시작했다. 눈을 내리 깔고 가만히 있던 르엘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왕자님.”

“왜?”

“이제는 반말을 쓰십시오. 선생님 호칭도 안 되고, 이름을 부르셔야 합니다.”

루벤은 르엘라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허허 웃었다. 둘 다 쏟아지는 비를 우산도 없이 그대로 맞고 서 있었다. 

“그게 원칙…….”

르엘라는 차갑게 말하려다가 루벤이 그녀를 와락 끌어안아 버리는 바람에 문장을 완성하지 못했다. 루벤이 몸집이 작은 그녀를 꽉 끌어안고 속삭였다.

“제자가 아니어도, 반말 쓰는 연하남 좀 좋아해 주는 것 맞지?”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루벤은 그녀가 자신을 뿌리치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는 듯 하늘을 보고 크게 웃었다.

“그거 알아? 나 여자 좋아하는 거 처음이야.”

“왕자님, 저를…… 좋아하세요?”

“그런 것 같아.”

루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마가 끝난 것 같은데, 한 번은 더 비가 올 것 같아서, 그래서 여행도 안 갈 만큼. 아니, 못 갈 만큼.”

아아, 어쩌면 좋지. 르엘라는 눈을 감았다. 정말 어쩌면 좋지. 지금 이 순간, 그를 거부할 수 없다. 이미 비가 온다는 말에 자신도 모르게 정자로 향하던 그때부터 이성을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를 안고 싶은 팔에 힘을 주어 가만히 있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너무 머리가 어지럽게 얽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비가 사정없이 그들을 적셨다. 오랫동안, 정말 오랫동안 그렇게 있을 것만 같았다. 

그들은 몰랐지만, 길의 끝에서 사파엘이 놀라서 우산을 툭 떨어트렸다. 그녀는 르엘라가 뛰쳐나가기에,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우산이라도 주려고 따라나선 참이었다. 사파엘은 충격 받은 얼굴로 돌아섰다. 보면 안 될 것을 본 듯했다.

르엘라는 사파엘보다도 훨씬 원칙주의적인 사람이었다. 희대의 천재에게 뻗어 오는 이런저런 유혹을 스스로 쳐 내기 위한 방안이라고 생각했다. 사파엘은 르엘라가 무슨 약이든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존재 자체만으로도 위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남들이 할 수 없는 것을 너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녀가 한번 나쁜 마음을 먹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그렇기 때문에 르엘라는 자기 자신을 보수적으로 옥죄고, 모든 약을 개발하는 데에 극히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그런 르엘라가…… 그런 르엘라가 지금 호시탐탐 왕위를 누린다는 후궁 소생의 왕자와 저런 모습으로 서 있다. 유부남인 왕족의 애인이 된다는 것 자체로도 다분히 정치적인 뜻이 있는데, 하필 그 상대가 루벤이라니 걱정스럽기 그지없었다. 루벤은 존재 자체가 평화로운 왕위 계승 속의 폭풍우 같은 사람이었다. 사파엘은 터덜터덜 약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 일을 일단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빌었다.

‘조심해, 르엘라…….’

사파엘은 입술을 깨물며 생각했다.

‘부디 조심해…….’

“르엘라!”

퇴근 후, 르엘라가 마당에서 우체통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루벤이 나타났다. 르엘라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뻔했다.

“왕자님! 여기 어쩐 일이세요?”

그녀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이렇게 궁 밖을 함부로 나오시면 안 돼요. 여긴 가뜩이나 외지고 찾기 어려운 곳인데…… 가만, 저희 집은 어떻게 아셨어요?”

루벤이 씩 웃었다.

“동쪽에, 장미꽃 없고, 라일락나무 가득 있는 집.”

르엘라가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아메니티의 동쪽에 집이 얼마나 많은데, 얼마나 뒤지고 다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꼬맹이 하나 왔다 갔다 거리더라. 누구야?”

“조카랑 같이 살고 있어요. 리젠이라고, 꼬맹이는 아니죠. 내년에 고등학교 들어가요.”

“그럼 꼬맹이지, 뭐.”

그가 르엘라의 손을 잡고 정원을 산책하며 키득거렸다.

“큰일 났어.”

“네?”

“이젠 비도 안 오고, 심지어 밤인데도 보고 싶어.”

“…….”

“참을 수 없어서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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