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48/256)

48화.

하늘이 구멍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졌다. 쏟아지는 빗물 속에서 루벤이 시원하다며 맥주를 마셨다. 르엘라는 속이 갑갑해져 자신도 모르게 손에 든 맥주를 따라 마셨다. 발끝까지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왕자님, 앞으로 이렇게 함부로 다니시면 안 돼요. 암살이라도 당하시면 어쩌시려고…….”

“비 오는 날, 어때요? 괜찮죠?”

“왕자님, 비 오는 날은 특히나 시야도 어두워서, 호위 무사들이 바로 달려오기도 힘든데…….”

“괜찮다는 말 없으니까, 내일은 비 오는 날 가면 더 좋은 데 데려가야겠다.”

그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르엘라가 짜증을 냈다.

“아니, 진짜 왜 이러시는 거예요?”

“비 오는 날도 좋아하게 되고, 빨간 장미꽃도 좋아하게 되고, 뭐 그러면…….”

루벤이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원칙도 좀 어기고, 반말 쓰는 어린 남자도 좀 좋아지지 않겠어요?”

“왕자님.”

“학생이 선생한테 예쁨 받고 싶다는데, 그게 뭐 그렇게 잘못된 건가?”

“저는 모든 학생이 다 똑같고요, 특별히 좋아하는 왕족도 싫어하는 왕족도 없어요.”

“그게 아주 대단하다는 거야.”

르엘라의 냉정한 대답에 루벤이 마음에 든다는 듯 그녀의 허리를 잡아 번쩍 들어 올렸다. 르엘라는 몸집이 작은 것도 짜증나는데 이렇게 남자한테 쉽게 들어 올려지는 것도 굴욕스러워 한껏 얼굴을 찌푸렸다.

“다들 나를 싫어했다고. 한 명만, 한 명만 나를 윌리엄보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들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안 되는 일이야?”

“다른 사람들 많은데 왜…….”

“몰라. 선생님이었으면 좋겠어.”

그가 르엘라의 몸을 빙글빙글 돌렸다. 빗소리에 맞추어 신나는 음악 소리가 대중없이 울렸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대로 춤을 추고 있어, 아무도 그들에게 주목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 말고, 바로 선생님. 르엘라 하카트.”

* * *

길었던 장마가 끝이 보인다. 리젠은 학교 성적이 우수하고, 나랑 다르게 체술도 몹시 뛰어나다. 왕립고등학교 입학은 이미 따 놓은 듯하다. 객관적으로 볼 때, 내가 키우고 싶었던 것처럼 정말 잘 자라고 있다. 그러나 행복한 아이로 컸는지는 모르겠다. 슬플수록, 결핍된 면이 있을수록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 날마다 후회된다. 부족하고 약한 모습도 사랑한다고 말해 줬어야 했는데 나도 아이를 처음 키워 그러지 못했다. 아이의 성장은 단 한 번뿐이고, 그래서 너무 빨리 속마음을 감출 줄 알게 된 이 아이에게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을 해 주지 못해 미안하다.

반면 리젠의 반의반도 남을 생각하지 않는 제자가 생겨서 나는 미칠 판이다. 루벤은 꽤나 똑똑하고 가르친 것을 잘 흡수하지만 정말로 공부를 싫어한다. 이렇게 가만히 있지 못하는 남자가 어떻게 왕이 될 생각을 하고 있나 모르겠다. 그는 꾸준히 붉은 장미꽃을 사 왔고, 어김없이 내 우산을 빼앗아 비를 맞게 했으며, 툭하면 반말을 썼다. 이토록 끔찍한 제자를 상상조차 한 적이 없다.

그러나 더 짜증나는 것은, 이 끔찍한 제자가 점점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요새는 맑은 날이 계속되어 그를 보지 못하면 은근히 심심하기도 하다.

-르엘라의 일기장 중 발췌

“그래서, 이런 경우 혹시나 의심스러울 땐 따개비의 껍질 가루를 넣어 보시면 됩니다.”

약해진 빗줄기가 톡, 톡 하고 정자의 천장을 때렸다. 루벤은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가져온 빨간 장미꽃을 르엘라의 실험복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르엘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소원대로 장마 전에 진도를 뺐네요. 이제 한 시간만 더 수업하면 돼요. 오늘 아예 다 끝내 버릴까요?”

루벤이 아무 말 없이 르엘라의 얼굴을 보았다. 르엘라가 팔짱을 끼고 말을 이었다.

“왕자님이 예습하고 복습을 철저히 하신 덕분이에요. 학점이 낮아 걱정했는데, 그래도 꽤 기억력이 좋으시군요. 이 정도면 아셰 왕녀님이나 다니엘 왕자님과 똑같은 수준이 되셨어요.”

“그것 참 영광이군요. 고등학교 입학도 안 한 꼬맹이들하고 수준이 같아지다니.”

“그럼 마지막으로, 남쪽 지방의 열매만 설명하고 끝내겠습니다.”

“……좀 쉬었다 하죠.”

“네? 얼마 안 남았는데요.”

“그러니까 좀 쉬었다 합시다.”

그가 벌떡 일어나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르엘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또 기가 막힌 곳을 발견했다고.”

르엘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따라 일어났다. 싫다고 하면 또 들쳐 업히는 등 험한 꼴을 당할 수도 있었다.

“왕자님.”

“네?”

“왕이 되고 싶어요?”

“되면 좋죠.”

“……이런 물음에 바로 그렇게 대답하지 말아요.”

시원시원한 루벤의 대답에, 르엘라가 차가운 무표정으로 말했다.

“적어도 형이 잘할 거라고 말하라고요.”

“왜, 걱정돼요?”

그가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어조로 물었으나,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지 르엘라의 눈을 맞추며 싱긋 웃었다.

“선생님은 내가 왕이 되어도, 윌리엄이 왕이 되어도 아무 상관없잖아. 그런데 왜 내 편 들어?”

“편드는 거 아닌데요.”

르엘라가 아무 어조의 변화도 없이 냉정하게 말했다.

“상식적인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녀는 루벤을 따라 터벅터벅 걸음을 걸으며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궁을 갑갑해하니, 별로 성군도 못 되겠는데.”

그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선생님.”

아무 생각 없이 걷던 르엘라가 흠칫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성군이 뭐라고 생각해요?”

“네?”

“아메탄 왕국이 살기 좋다고 생각해요?”

그가 이렇게 진지하게 묻는 것은 처음이었다. 루벤이 고개를 모로 틀며 말했다.

“나는 대륙을 전부 돌아다녔어요. 아메탄은 부족한 점이 많아요. 직접 평민의 삶에 들어가 보면, 확실히 더 좋은 방향으로 변할 여지가 있다고요. 그냥 여기 앉아서 옛날 서적이나 들여다봐서 알 수 있는 것하고는 완전 다른 방향으로.”

르엘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루벤이 왕위에 대한 별생각이 없을 줄 알았다. 매사에 무관심해 보이고, 노는 것만 좋아하는 걸로 보였기 때문이다.

“윌리엄이 왕이 되면, 지금처럼 딱 이렇게 살겠죠. 큰 파란 없이, 큰 변화 없이, 평화롭게. 그러나 아메탄은 너무 작은 세계에 갇혀 있어. 예를 들어 제국의 눈치를 보느라 저 대륙 위쪽의 스타람섬하고 교류조차 하지 않지. 스타람섬의 전기 기술을 보면 깜짝 놀랄 겁니다. 거기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대화를 할 수 있는, 전화라는 것이 있죠. 마력이 사라지는 시대에, 언제까지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살 수 있을까요?”

루벤이 다시 씩 웃었다. 르엘라는 항상 먼 곳을 떠도는 것 같은 루벤의 시선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았다. 이 남자한테 아메탄은 너무 좁다.

“왕이 되기 위해 이것저것 귀찮게 일을 꾸밀 생각은 없어요. 그런 건 내 스타일이 아니니까. 사실 관심도 없어. 하지만 어머님이 하시겠다면 말리지 않을 거예요. 그 과정에서 좀 도와드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라고 그 무게의 자리를 모르는 건 아니야.”

“…….”

“뭐든지 가까이 보면 추잡해요. 가까운 곳을 보는 건 어머니가 알아서 한다고 했어. 나는…… 멀리, 더 넓게 보기에도 바쁩니다. 원래, 왕은 온갖 쓰레기 더미 위에 올라서서 이상을 보는 사람 아니던가. 마법사의 사라진 권력을 귀족들이 가져가게 놔둬서는 안 됐어. 지금의 모든 예산을 과학 기술에 쏟아 부어야 미래가 보일걸. 제국은 지는 해야. 이젠 나라가 크다고 전부인 세상이 아니야. 제국의 평민들과 스타람섬의 평민들 삶의 수준을 비교해 보면 답이 나오지.”

“그럼…….”

그녀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말했다.

“그럼 좀 조심하던가요.”

“뭘?”

“약물 교육도 제대로 받고, 비밀 길도 아무에게나 알려 주지 말고.”

“아무에게나라니.”

그가 그녀의 실험복 주머니에 잔뜩 담긴 붉은 장미를 건드리며 흥얼거렸다.

“순수한 내 편 아니었어요?”

“전 그 누구의 편도 아닙니다. 산하기관 직원들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아요. 다만 진실과 전문성을 추구할 뿐입니다.”

“난 선생님이 장미 좋아하게 될 때까지 꾸준히 갖다 주려고.”

그가 춤추듯 알 수 없는 외국의 스텝을 밟으며 흥얼거렸다.

“그러다 보면…… 반말 쓰는 연하남도?”

“이제 다음에 수업 다 끝나요. 그땐 당연히 반말 쓰셔야 합니다.”

“……그런가.”

루벤이 뒤통수를 긁었다.

“이거 봐. 이상하다고요. 나는 진짜 존댓말하기 싫었는데…….”

르엘라는 무표정으로 안경에 튄 빗물을 닦았다.

“이상하게 아쉽잖아. 싫어하는 걸 좋아하게 되는 거, 순식간이야.”

루벤과의 마지막 수업은 정말 오래 걸렸다. 한 시간 정도면 다 끝날 진도였는데, 루벤은 10분 수업하면 또 그녀를 어디론가 데려가고, 10분 수업하면 그녀를 어디론가 데려가는 식이어서 정말 끝나지를 않았다. 게다가 장마가 끝나 가며 맑은 날이 꽤 많았기 때문에, 그들의 이상한 사제 관계는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었다. 하지만 어쨌든 진도의 끝은 있었고, 정말 마지막 수업 날이 오기는 왔다. 루벤과 르엘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담담히 수업을 끝냈다.

“그래서, 이걸로 수업은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선생님이…… 고생 많으셨죠.”

루벤이 그녀에게 붉은 장미꽃 한 다발을 내밀며 말했다. 르엘라는 표정의 변화 없이 짧은 귀밑머리를 귀 뒤로 넘기면서 가만히 장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우리, 뒤풀이라도, 뭐 그런 거라도 할까요?”

“교육이 끝나면 사적으로 만나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르엘라가 차갑게 말했다.

“다른 왕족들보다 더 많이 가르칠 수는 없어요.”

그렇게 르엘라의 관심을 바라던, 실제로 정말 안쓰러웠던 아셰에게도 단 하나의 가르침도 더 해 주지 않았다.

“뭐 이상한 풀떼기 안 가르쳐도 되고, 그냥 뭐, 만나는 거죠.”

“더더군다나 안 되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빗줄기가 영 힘이 없었다. 해가 살짝 나는 것을 보며 루벤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가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르엘라는 일어서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럼, 부디 건강히.”

“그게…… 마지막 말이에요?”

“외부에 너무 많이 나가시지 마시고, 약제국과 연결된 길은 얼른 막으십시오.”

“음…… 믿기지가 않네.”

루벤이 일어선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진짜 수업이 끝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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