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256)

47화.

르엘라의 눈이 커졌다. 아셰가 한숨을 쉬었다.

“진짜, 삶이 너무 고달파질 때, 내가 먹을 거야. 어느 나라에 어느 남자랑 결혼할지 어떻게 알겠어? 죽는 게 더 나아질 때가 오면 험한 꼴 당하기 전에 죽어 버려야지.”

“왕녀님,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바마마는 나한테 애정이 조금도 없어. 정치적으로 유용하면 아마 광인한테라도 보낼걸? 난 정말 엄마처럼 사느니 죽어 버릴 거야.”

아셰의 눈이 쓸쓸했다. 르엘라는 굳이 자신을 아침부터 궁으로 부른 아셰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약물 수업이 끝나자 외로워진 것이다. 다니엘과는 다른 의미로 그녀는 아셰가 아픈 손가락같이 마음에 걸렸다.

“함부로 그렇게 말씀하시지 말아요, 왕녀님. 제 마음이 아파요.”

“약속해 줘. 종종 오겠다고.”

“원래는 교육이 끝나고 이렇게 찾아오면 안 돼요. 산하기관은 언제나 중립을 유지해야 하는걸요. 하지만 루벤 왕자님의 교육 중이니, 그 핑계로 가끔 올게요.”

“루벤? 엄청 이상하지?”

아셰가 루벤의 이름이 나오자 킥킥거리며 웃었다.

“고생 좀 하겠다, 르엘라.”

르엘라는 아무 말 없이 차를 마셨다. 동의하는 표현이기도 했다. 세상에, 비가 오는 날만 수업하겠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맑은 날은 정말로 수업이 없었다. 일기 예보에 따라서 르엘라의 스케줄이 바뀌는 것이다. 그녀의 속을 눈치챘는지 아셰가 재잘거리며 말했다.

“원래 이상했어. 테스티의 아들이어서 그런가, 어렸을 때부터 우리랑 하나도 안 친했어. 안 친하다기보다는…… 무관심했다는 게 맞을 것 같아.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 죽어라고 대륙 전역을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열다섯 살짜리 애를 신부라며 데려왔잖아. 얼굴이 예뻐서 그런가 싶었더니 단 한 번도 나람의 처소에 가지를 않았다네? 그냥 완전 무관심하대. 그럴 거면 왜 데려왔나 몰라.”

루벤이 거짓말 어쩌고 한 것을 기억해 냈지만 르엘라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왕족과 개인적으로 하는 말들은 당연히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 아셰는 발을 까닥거리면서 휘파람을 불었다.

“그래도 왕은 되고 싶은지, 정치적으로 좀 움직이는 모양이던데. 르엘라, 그냥 대충 가르쳐. 난 테스티가 너무 싫더라. 루벤한테 악감정은 없지만, 테스티 아들이라서 싫고. 아마 대다수의 궁 사람들이 그럴걸? 테스티가 편도 많지만 적도 많아서…….”

르엘라는 문득 루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르엘라도 귀가 있는데, 약제국 내에서 테스티가 너무 야망이 크다며 루벤을 왕위에 올리고 싶어 미쳐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 있었다. 다들 테스티와 함께 루벤을 욕했다. 그러나 직접 만나 보니 루벤은 꼭 그렇게 이기적인 사람인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조금 이상하고 괴이하긴 하지만 르엘라가 꼿꼿하게 대해도 별달리 감정을 상해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다수의 사람이 다 아셰 같을 것이다. 악감정은 없지만, 테스티 아들이라서 싫다…… 이유 없이 방황하고, 대륙을 떠도는 데에는 그런 사람들의 시선에 이유가 있지 않을까. 르엘라는 조용히 차를 마시며 창 밖에 주룩주룩 비를 바라보았다.

“뭐예요?”

우산을 들고 정자에 갔을 때에는 이미 루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가 불쑥 꽃다발을 내밀었다. 르엘라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선물.”

붉은 장미로 만든 꽃다발이었다. 르엘라는 저 마음 깊숙한 곳에서 열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분명 가장 싫다고 했는데, 그 말을 듣고 냉큼 사 온 저의는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자리에 앉고, 오늘은 약물과 차에 대해서 얘기해 볼게요.”

르엘라는 성의 없게 꽃다발을 받아 옆에 놓고, 바로 수업을 시작했다. 그녀는 루벤을 가르치며 느꼈는데, 그는 전혀 멍청하지 않았다. 다만 불성실할 뿐이었다. 그래도 장마 안에 모든 교육 과정을 끝내겠다고 얌전히 앉아 있는 그가 어떻게 보면 기특하게 느껴졌다.

“그러니, 대접하는 차를 마실 때에는 같은 주전자에서 궁의 주인과 손님이 함께 따라 마시는 것이 예의입니다. 이 차에 독이 없다, 라는 메시지를 주는 것이지요.”

“선생님.”

그가 르엘라의 얼굴을 보고 있다가 뜬금없이 말을 걸었다.

“왜요?”

“지루하다. 그렇지?”

“네?”

르엘라가 황당하여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가 킬킬대며 그녀에게 바싹 다가왔다.

“조금만 쉬었다 하자.”

“존대 쓰세요.”

“어차피 다 외웠단 말이야……. 알잖아? 나 다 외운 거?”

“존대 쓰시라고 했어요.”

“존대 쓰면 좀 쉴 거…… 예요?”

“……네.”

어쩔 수 없다는 듯 무성의하게 던진 르엘라의 대답에 루벤이 벌떡 일어났다. 그가 주섬주섬 망토를 챙겨 입었다. 그리고, 언제 챙겨 왔는지 후드가 달린 망토를 하나 르엘라에게 건넸다.

“가요, 선생님.”

“네?”

“쉬러 가자고요.”

“어디를요?”

“일단 입어요.”

르엘라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그가 건넨 망토를 입었다. 르엘라의 몸집은 작고, 망토는 컸기 때문에 마치 애가 어른 옷을 입은 것같이 우스꽝스러웠다. 루벤이 키득거리며 웃다가 직접 후드를 씌워 주고,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도망갈까 봐. 오해하지 마요.”

“어디 가는데요?”

그가 대답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여기는…….”

르엘라가 숨을 삼켰다. 루벤이 여기저기 구불구불한 길을 돌아, 난생처음 본 지하로를 건너 암흑 속을 걸어왔더니 궁의 밖이었다. 이런 길이 있는 줄도 몰랐다. 루벤이 키득거리며 그녀의 손을 이끌었다. 르엘라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왕자님, 이런 왕궁의 비밀 길을 저 같은 민간인에게 이렇게 함부로 보여 주시면 안 됩니다.”

“기억해요, 설마?”

“당연히 복잡하니 기억은 안 나지만, 이런 길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요.”

“몰라, 나도 아무한테나 보여 주지는 않아요.”

그가 씩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어떻게 이어졌는지는 몰라도 아메니티의 변두리 골목이었다. 

“근데 선생님은 자꾸 나한테 하지 말라는 걸 봐서, 본인이 절대 안 할 것 같으니까 보여 주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 없는 놈 취급하지 마요.”

르엘라는 이런 캄캄한 아메니티의 변두리 골목에 처음 와 보았다. 굉장히 소득 수준이 낮은 평민들이 사는 좁은 골목길이었다. 경계에 찬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르엘라의 손목을 루벤이 꽉 잡았다.

“별로 위험하지 않은 곳이에요. 다 사람 사는 곳이라고.”

“왕자님, 이렇게 함부로 돌아다니시면 신변의 위협이…….”

“다 호위 무사들 따라붙고 있어요. 걱정 마.”

“아니, 그래도…….”

“이런 데 처음 와 봐? 대체 어디 사는데?”

“저는 동쪽에 살죠. 언덕 쪽에 있는 정원 널찍한 집. 약제국 월급이 꽤 돼서 이런 데 우글우글하게 살지 않아도 돼요.”

“그럼 그 집 정원엔 장미가 없나?”

“없죠.”

“꽃이 아예 없어?”

“대신 라일락을 심어 놓았어요.”

“나 참, 정원에 늘 있는 장미가 없는 집이라니.”

그가 길을 걷다가, 어느 주택 골목에 장미 넝쿨을 발견하고 펄쩍 뛰어 한 송이를 꺾었다. 한숨을 쉬는 르엘라에게 억지로 건넨 그가 익숙하게 한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가게 안으로 들어간 르엘라의 눈이 커졌다. 뻥 뚫린 정원 같은 곳이었는데, 초라한 입구에 비해 생각보다 몹시 넓었고, 편하게 옷을 입은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싸구려 악기들을 연주하고 있었다.

“여기는 비가 오면 이런 이벤트를 열거든요.”

루벤이 익숙하게, 맥주병을 들고 돌아다니는 여자아이에게 동전을 건네고 두 병을 사서 르엘라에게 하나를 건넸다.

“맥주 값도 엄청 싸고, 엄청 신나지 않아요?”

사람들 중 아무도 우산을 쓴 사람이 없었다. 다들 홀딱 젖어서 몸이 가는 대로 연주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었다. 르엘라는 루벤의 꼴을 보고 이 사람이 한두 번 이런 데에 놀러온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왕족이, 이런 누추한 곳에, 정체를 감추고 정말로 놀러 온 것이다.

“춤출까요?”

“저 춤 못 춰요.”

“여기선 촌스럽게 왈츠 같은 거 추는 게 아니야.”

그가 르엘라를 이끌었다. 비가 사정없이 몸을 때렸지만 여름이라 오히려 시원한 기분이었다. 우산을 쓰고 다닐 땐 옷이 찔끔찔끔 젖어 불쾌했는데, 아예 젖어 버리니 이제 비를 맞는 건지 아닌지도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

“비 오는 거 그다지 나쁘지 않죠?”

“대체…….”

르엘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예요?”

루벤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꽃을 파는 여자를 발견하고 굳이 거기서 또다시 빨간 장미를 한 송이 샀다. 그녀의 손에 쥐여 주며 그가 키득거리고 웃었다.

“몰라. 나한테 뭘 가르치겠다는 선생이 처음이라 그런가 봐요.”

“왕자님, 고등학교랑 대학 교수님이 들으시면 섭섭해 하시겠어요.”

“어차피 졸업만 시키려고, 다들 아무 말도 안 했는걸. 말했잖아, 블랑인가 뭔가 하는 직원도 그다지 적극적으로 날 찾지 않던데요.”

그가 르엘라의 양손을 잡고 억지로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게 만들며 말했다. 르엘라의 몸집이 하도 작아서, 마치 아버지가 딸의 손을 잡고 춤을 추며 놀아 주는 모습 같았다.

“나를 걱정하는 선생도 처음이고. 다들 윌리엄만 걱정했지.”

“특별히 왕자님이라서 걱정한 거 아닙니다. 저는 원칙을 얘기했을 뿐이에요. 공평해야죠.”

“그 원칙 어기고…… 나 좀 더 예뻐해 줘 봐요. 이것 참, 오기 생기네.”

오늘 아침, 아셰가 약물까지 만들어 놓고 기다렸어도 형평성을 얘기하며 더 이상 가르치지 않았던 그녀였다. 아셰처럼 열심히 공부를 하고 나서 기다리면 모를까 이렇게 열심히 땡땡이만 치면서 예뻐해 달라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 진짜 이상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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