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256)

46화.

루벤의 푸른 눈이 가늘게 떠졌다.

“그게 원칙입니다.”

“아오, 그놈의 원칙!”

그가 벌떡 일어나서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르엘라는 깜짝 놀란 채로 다시 빗속에 들어왔다. 겨우 좀 옷이 말랐나 싶었는데 또다시 흠뻑 젖었다. 못마땅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루벤이 킬킬거리고 웃었다. 그녀의 손을 끌고 그가 물을 튀기며 첨벙첨벙 천천히 뛰었다. 물론 그는 천천히 뛰었지만 르엘라는 숨이 차도록 전속력을 다해 뛰어야 했다. 정자를 향해 구불구불 갈림길이 이어졌다.

다른 산하기관과는 다르게, 약제국과 왕궁은 굉장히 가깝고 정원을 공유하고 있다. 물론 약제국 직원들은 왕궁에 들어갈 수 없도록 경계가 심하다. 약제국은 엄밀히 말하면 궁의 외부 기관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르엘라도 한 번도 정원보다 더 깊숙이 들어간 적이 없었다. 생전 처음 보는 길에 르엘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선생님, 이 길을 죽, 이렇게 가면…….”

르엘라의 눈이 커졌다.

“내 궁이야.”

“이런!”

르엘라가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턱도 없었다. 그녀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소리쳤다.

“이런 길을 제게 알려 주시면 어떡합니까? 당장 막아 버리세요. 민간인이 약제국을 통해 왕궁에 들어오면 어쩌시려고…….”

“사람들이 잘 모르는 길이야. 아는 사람 몇 안 돼. 그중 이제 선생님도 들어온 거야. 선생님은 이제 원칙을 깨고 왕궁에 무단 침입한 민간인이 된 거예요.”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화려한 궁의 뒤편으로 몰래 온 루벤이 쿡쿡대며 웃는 동안 르엘라는 한숨을 쉬었다. 원래 수사국 직원이 아닌 민간인이 궁을 방문하려면 공식적인 절차를 밟거나 정문으로 남의 눈에 띄게 들어와야 한다. 이렇게 몰래 뒤에서 습격할 수 있는 길을 막아 두지 않으면 나중에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원칙이라는 건 말이야…….”

루벤이 깔깔거리며 말했다.

“그런 건, 깨지기 너무 쉬워요, 선생님. 너무 그렇게 원칙대로 살지 마세요.”

“그렇다면 선호라고 하죠. 제가 원칙을 지키는 걸 좋아합니다. 저는 제가 좋은 대로 살 권리가 있어요.”

“선호? 그건 더 못 믿죠. 다른 걸 좋아하게 될 수도 있잖아.”

“이 길은 막아 버려요, 왕자님. 신변에 위협이 될 수도 있습니다.”

비가 주룩주룩 내려 르엘라가 시야를 자꾸 가리는 안경을 벗었다. 소용은 없었지만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빗물도 거슬려서 다 젖은 실험복을 벗어 머리 위에 썼다. 정말 물에 빠진 생쥐 같은 꼴이 된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알려 주시지 마십시오. 저도 잊겠습니다.”

루벤이 답답하다는 듯 살짝 가슴을 쳤다. 원칙을 어기게 해서 펄펄 뛰게 만들고 싶었는데, 이 여자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또 다른 원칙을 들이밀고 있었다.

“선생님, 다들 내가 문제라고 해. 현재 판도에서 악역은 나라고. 역사는 이긴 자들의 것이야. 내가 태자가 되면 모를까, 지금 윌리엄이 태자인데 왜 그렇게 나를 걱정해?”

“저는 원칙을 말하는 것뿐입니다. 태자랑 그런 것들이 무슨 상관입니까? 왕족이라면 응당 항상 목숨을 경계해야 하는 법입니다.”

그가 가만히 르엘라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순수한 걱정은 처음 받아 보았다. 다들 테스티에 대한 왕의 총애를 믿고 자신의 뒤에 줄을 서거나, 아니면 윌리엄의 자리를 노리는 적으로 자신을 보기만 했다. 지난 선생이었던 블랑은 대놓고 윌리엄을 편애하기까지 했다. 그가 어린 시절부터 약물 수업을 듣지 않고 도망쳤던 것은 자신에게서 테스티를 보고 경계하던 블랑의 태도 때문이기도 했다. 왕이 테스티를 워낙에 아꼈기 때문에, 루벤은 태어날 때부터 윌리엄의 경계를 받아 왔다.

르엘라를 처음 만났을 때에는, 그저 유명한 괴짜 천재를 만난 기분이었다. 얼른 지루한 수업을 다 끝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편견 없이 그를 대하는 그녀의 태도에서 루벤은 순간 흠칫했다. 심지어 자신이 구해 준 나람마저도 거짓말을 하며 뒤통수를 쳤는데, 말 안 듣는 학생의 목숨을 걱정해 주는 선생님의 꼿꼿함이 인상 깊어 그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저기…….”

르엘라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루벤이 바보같이 물었다.

“원칙 안 지키는 게…… 그렇게 싫어?”

“네. 정말 싫습니다.”

“좋아하는 건?”

“뭐, 약초학이요.”

“그럼 제일 싫어하는 약초 있어?”

“약초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식물 중에는 붉은 장미입니다. 가시가 있는데다가 색도 핏빛이고, 게다가 약초학에서 쓰임새도 별로 없죠.”

“또 싫어하는 건?”

“비 오는 날이요. 그리고 이렇게 비를 맞는 것도 싫어합니다.”

“그리고 또…….”

“그리고, 저는 원래 남자에게 관심이 없습니다만, 이렇게 반말하는 어린 남자는 정말 최악입니다.”

르엘라는 꾸벅 인사를 했다.

“그러면 저는 가 보겠습니다. 이 길은 꼭 막으시고, 내일 그 시간에 정자에서 뵙겠습니다.”

루벤은 자신도 모르게, 꼿꼿하게 걸어가는 르엘라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리젠이 중학교에서 계속 1등이다.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직도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나 하여 신경 쓰인다. 아이들의 성장 과정이 이토록 인격에 영향을 미치는지 몰랐더라면, 처음 왕족들을 만나 다니엘과 아셰를 가르칠 때에 굉장히 어려웠을 것 같다. 누군가를 쉽게 죽인다는 것, 또 자신이 쉽게 죽을 수 있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열 살배기를 만났을 때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왜 블랑 선배가 루벤을 가르치지 못했는지 알 것 같다. 다니엘과 아셰는 그나마 왕위 쟁탈전에서 멀지만, 서로 정치적인 적에 가까운 윌리엄과 루벤을 한꺼번에 두고 암살과 방어에 대해 가르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니엘과 아셰가 예뻤다. 특히나, 외국에 팔려가다시피 할 자신의 운명을 벌써부터 무서워하고 있는 아셰에게는 좀 더 정이 갔다. 아마 여자아이여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어린아이가 짐이 많았다. 엄마인 샤틴은 내가 보기에는 이미 우울증이 심각해서 어린 아셰에게 너무 많이 의지하고 있었다. 나중에 시집을 갔는데, 그 남자가 자신을 때리면 어떡하느냐고 물어보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망울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런 약한 꼬마 아이 역시 항상 경계하며 사는데, 루벤은 아무것도 경계하면서 살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왕이 되고 싶어 하는 야망을 숨기지도 않는다. 내가 다 불안할 지경이다. 어떻게 보면 인생을 모두 놓고 사는 망나니 같기도 하다. 학교생활도 몹시 불성실했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 망나니가 장마 때문에 궁을 나서지 못하자 싸돌아다니는 것 대신 다른 유흥 거리를 찾은 듯하다. 나조차도 믿을 수 없지만, 그 유흥 거리가 다름 아닌 바로 나다.

-르엘라의 일기장 중 발췌

“어때요? 어때요? 잘 만들지 않았어요? 대단하죠?”

“왕녀님.”

르엘라가 한숨을 쉬었다.

“반말 쓰세요. 이제 저는 왕녀님의 선생님이 아니잖아요. 약물 교육도 끝났고요.”

“싫어요.”

아셰가 고개를 저었다.

“저, 계속 선생님한테 배우고 싶어요. 약초학이 너무 재미있고, 선생님을 볼 수 없다는 것도 싫단 말이에요.”

“그럼 네 명의 왕족 중에 왕녀님만 제가 더 가르치는 셈이 돼요. 그건 원칙에 어긋나요.”

“아아…… 진짜, 선생님 너무해요.”

“반말 쓰세요.”

“……르엘라, 정말 너무해.”

아셰가 뾰로통하게 입을 내밀며 발을 굴렀다. 리젠과 동갑인데 정말로 성격이 달랐다. 성장 과정이 달라서겠지만, 아셰는 자신이 원하는 바에 솔직하고 거침이 없다. 그러면서도 내면으로는 상당히 계산이 빠르다. 그녀가 징징대며 말했다.

“내가 리젠이었으면 가르쳐 줬을 거지?”

“리젠에게는 왕녀님 가르친 것의 반도 안 가르쳤어요.”

르엘라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 애는 왕녀님처럼 약초학에 그렇게 흥미도 없어요. 절 안 닮아서,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는 걸 더 좋아하거든요.”

아셰는 한숨을 푹 쉬었다. 르엘라는 그녀가 타 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빙긋 웃었다.

“내년에 고등학교 같이 들어가시겠네요. 친하게 지내세요.”

“몰라.”

“왕녀님이 리젠에게 차를 타는 노하우를 전수해 줘도 좋겠군요. 그 애가 우린 차는 정말 맛이 없거든요. 이거, 정말 훌륭해요. 어쩜 이렇게 맛이 딱 좋은지.”

“약물 만드는 거랑 차 타는 건 한 끗 차이래. 어차피 다 재료 넣고 적절한 시간 우리면 되니까.”

“아니에요. 리젠은 약물은 곧잘 만드는데 차는 정말 못 우려내요. 그냥, 왕녀님이 잘 하시는 거예요. 제가 마셔 본 어느 차들 중에서도 훌륭한데요.”

“그럼 내가 만든 이 약은? 이렇게 개발한 건?”

르엘라가 살포시 웃으면서 대답했다.

“왕녀님, 약을 만드는 건 별로 안 어렵다고 제가 누누이 말씀드렸잖아요. 중요한 건 해독제예요. 사람 죽이는 건 쉬워요. 그냥 칼로 찌르면 되니까. 다시 살리는 게 어렵다고요.”

“근데 이건 해독제 못 만드는데? 갈퀴나무를 썼어. 아예 불가능하다고.”

“그럼 실패한 개발이지요.”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약을 만들 수 있어요. 해독제를 못 만들어서 그렇지. 해독제를 만들지 못한 약은 함부로 쓰면 안 돼요. 엄청난 사회적 물의가 나타날 수 있다고요. 돌이킬 수 없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건지 생각해 봐요.”

“만든 거 자체는 어때? 되게 독특하지 않아?”

“냉정한 평가를 바라요?”

“응.”

“조합이 독특하긴 하지만 그냥 평범한 비상이에요. 비슷한 약을 스무 개도 넘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아셰가 쿵 하고 머리를 테이블에 박았다. 그래도 열여섯 살치고 잘 만들었다며 아셰의 금발 머리를 르엘라가 사랑스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는 아셰를 보면 약간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얼마나 의지할 곳이 없으면 고작 몇 년간 수업을 들었을 뿐인 약물 선생님한테 이토록 관심을 바라고 있는지. 그러면서도, 관심조차 바라는 티를 내지 못하는 리젠이 생각나 다시 착잡해졌다.

“그래도 갖고 있을 거야.”

“왜요? 누구 죽이시게요? 완전 쉽게 들킬 텐데.”

“아니, 내가 먹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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