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리젠을 키우면서, 아이들에게 성인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깨닫고 있다. 지금은 내가 잘못 키웠다는 것을 알면서도 돌이킬 수가 없다. 어린 시절에 한번 가치관이 정립되면 인격 자체가 바뀐다. 아마 아이를 키우지 못했더라면 타인의 삶을 훨씬 더 오만한 눈으로 바라보았을 것 같다. 리젠은 속 한번 썩이지 않는 훌륭한 아이지만, 그게 내 마음을 더 아프게 할 때가 많다.
지난 일이지만, 아셰와 다니엘을 만났을 때도 그랬다. 열 살이었는데, 이미 상상도 하지 못할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작은 이익을 위해 누군가를 죽이는 것에 대해 전혀 아무렇지도 않아 했으며, 반대급부로 자신 역시 목숨을 위협 받고 있을 가능성에 마음을 열어 두고 있었다. 아예 옛날부터 선악을 떠나 그렇게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살인은 나쁜 것이라는 단순한 나의 잣대로 그 가치관을 판단할 수 없었다.
나는 후궁인 테스티가 호시탐탐 왕비인 스잔나의 자리를 노리고 있으며, 루벤을 왕위에 올리고 싶어 한다는 소문을 들어왔지만 그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윌리엄이나 다니엘이나, 반대로 루벤이 왕이 된다고 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어떻게든 밀어내려고 할 것이 때문이다. 왕족과 가까이하며 내가 점점 더 깨닫는 것은, 이중 잣대가 아니라면 가치 판단 같은 것은 함부로 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르엘라의 일기장 중 발췌
비가 후두두둑 떨어졌다. 르엘라는 미리 정자에 도착해 약초를 늘어놓고 루벤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그가 오지 않아서 한숨을 쉬며 우산을 펴려고 하는데, 저 멀리서 우산도 없이 어기적어기적 걸어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르엘라는 잠시 망설이다가 우산을 펴서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왜 비를 다 맞으시고…….”
“비는 맞으라고 있는 거지.”
루벤이 불만스럽게 자신의 머리 위로 씌운 우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르엘라가 도끼눈을 뜨고 자신을 노려보자 그가 약간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샤워도 하면서…… 요.”
르엘라가 별 대꾸 없이 걷기 시작하자, 루벤은 갑자기 그녀의 우산을 빼앗아 내동댕이치고, 그녀의 허리를 붙잡아 들어 물웅덩이에 발을 푹 담갔다. 르엘라는 너무나 갑작스러워서 잠시 이게 무슨 상황인지 생각해 보았다. 신발에 빗물이 잔뜩 새어 들어왔다.
“발 퐁당퐁당해 보세요.”
순식간에 온몸이 흠뻑 젖었다. 안경에 물방울이 튀어 시야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르엘라는 인생 최악의 순간을 맞이한다는 듯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가 씩 웃었다.
“어린 시절 이후로 한 번도 안 해 봤을 것 아냐…… 이런 게 또 스트레스를 날려 준다고…… 요.”
르엘라는 몸집도 작은데다가 체술도 형편없었다. 그녀의 작은 몸을 쉽게 들어 올린 루벤의 손에 잡혀 힘을 줘 봤자 더 큰 굴욕적인 상황만 만들어질 뿐이었다. 르엘라가 한숨을 푹 쉬고 발을 굴렀다. 찰팍찰팍 물이 튀었다. 루벤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재밌지…… 요?”
“다 했으니 놔주세요.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차가운 르엘라의 목소리에 루벤이 더 크게 웃으며 그녀를 놔주었다. 잔디밭을 가로질러 가는데 신발이 잔뜩 젖어 발에 물이 흥건했다. 분명 신발에 물이 조금 젖었을 때에는 몹시 불쾌했는데 아예 풍덩 빠져 버리니 이상한 쾌감이 느껴졌다. 정자에 바로 앉아 안경의 물기를 닦고 약초를 다시 정리하는 그녀의 앞에 루벤이 앉았다.
“시원하고 좋지 않습니까?”
“저는 비 싫어해요.”
“또? 또 싫어하는 건?”
재미있다는 듯한 루벤의 표정에 르엘라가 제대로 눈길도 주지 않으며 물었다.
“왜 늦었어요?”
“아……. 일이 있어서.”
루벤이 생각만 해도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었다. 르엘라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속은 얼마나 시커멀지 몰라도, 어쨌든 겉으로는 다니엘과 또 다른 성격이다. 다정하고 젠틀한 다니엘보다 나이는 훨씬 더 많으면서 왜 이렇게 건들거리고 제멋대로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요. 진짜로 심각했단 말이야. 어마마마가 나람을 죽이려고 하는 걸 말리고 왔어요.”
르엘라가 늘어놓은 약초들을 무심하게 만지작거리면서 그가 말했다. 눈썹 하나 꼼짝하지 않는 르엘라를 보면서 그가 서운하다는 듯이 물었다.
“뭐야, 물어보지도 않아요?”
“안 궁금합니다.”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약초학을 가르치기만 하면 되니까요. 그런 건 왕자님 사정이죠.”
정말 조금도 궁금하지 않은 것 같은 르엘라의 말을 듣고 루벤이 살짝 오기가 생겼는지 그녀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고 속삭이듯 말했다.
“너만 알고 있어. 나 사기 결혼 당한 것 같아.”
“…….”
“그래도 안 놀라네요. 인간 같지도 않아.”
“사기 결혼 당하셨으면 파혼하면 되죠.”
“굳이 왜요?”
루벤이 씩 웃으며 말했다.
“누구랑 결혼하든 무슨 상관이죠? 시끄러워지는 게 난 더 싫어요. 또 파혼을 하고, 다른 여자들을 알아보고…… 귀찮아.”
“수업 시작하겠습니다.”
르엘라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그녀가 늘어놓은 약초를 가리키며 하나하나 물어보려는 순간, 루벤이 따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건 민들레, 이건 아토초, 이런 투르다, 이건 원추리, 이건 도도바풀, 이건 티티새발꽃.”
“……책 읽으셨군요.”
“장마 기간에 이 짓 다 끝내려면. 다음은 뭐예요? 다음 진도 빨리 나가요.”
루벤은 툴툴거리며 기지개를 폈다. 어제 거의 기본적인 약초학 지식도 없었던 것에 비해 너무 잘 알아서 르엘라가 놀랄 정도였다. 정말로 지금까지 단순히 외우기가 싫어 하나도 보지 않았던 것이 틀림없었다. 머리는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르엘라는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죽죽 나가 주세요. 어쨌든 다니엘이랑 아셰, 그 꼬맹이들 아는 수준만 알면 되는 거잖아.”
“정규 교육 과정에 없는, 특이한 약초나 독극물 구별법 같은 것도 추가로 배워야 해서 양이 방대합니다. 앞으로도 이렇게 열심히 예습해 오세요.”
“알았어, 알았어. 장마 전에나 끝내 줘요. 비만 그치면, 남부로 여행을 갈 계획이니까.”
“……남부요?”
“히트 공국에 가 볼까 해요. 거기 절벽이 그렇게 아름답대서.”
블랑이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한 이유로 빌어먹을 역마살을 얘기하더니 그 말이 사실인 듯했다. 르엘라가 살짝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정말로 여행을 좋아하시는군요.”
“맞아요. 아메탄은 갑갑해.”
그가 씩 웃었다.
“그러니까 굳이 나람을 쫓아낼 필요까지는 없다니까 어마마마는 괜히 난리시네. 괜히 외국에 무슨 공주 데려왔다가 매일 독수공방시킨다고 문제 생기는 것보다는 나은데.”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가 르엘라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선생님도…… 내가 이상한가요? 난 여자에는 원래 아무 관심도 없어. 뛰쳐나갈 궁리뿐이지. 어차피 해야 하는 결혼이라면 그냥 궁 안에만 박아 둬도 별 불만 없는 애였으면 좋겠어. 그래서 그냥 겸사겸사 노예 출신을 데려온 거기도 하고…… 아, 복잡해.”
루벤이 정자에 팔을 뻗고 대자로 누웠다. 정자 지붕에 후두두둑 비가 떨어지는 소리가 듣기에 좋았다. 르엘라는 자신도 모르게 팔을 괴고 바닥에 달라붙은 루벤의 젖은 금발 머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비를 잔뜩 맞아서 그런지, 평소에 절대 하지 않았던 걸 해서 그런지 마치 꿈을 꾸는 것같이 현실감이 없었다.
“어차피 거기서 노예로 몸 팔며 사는 것보다, 뭐, 좀 남편이 매일 집 나가도 궁 안에 있는 게 낫지 않을까? 선생님, 어떻게 생각해요?”
“……글쎄요. 이해는 되는군요.”
천천히 르엘라가 말했다.
“저도 딱히 남자에 관심이 없어, 결혼을 한다는 생각을 안 해 봤거든요.”
“오호, 우리 지금 유일하게 딱 하나 통했다!”
루벤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르엘라는 웃지도 않고 대꾸했다.
“다만 원래부터 자기만 생각하는 왕족이, 어쨌든 아무하고나 결혼 안 하고 그나마 불만 없을 여자를 데려왔다는 것이 의외네요. 그 정도의 배려심은 없을 줄 알았는데.”
르엘라의 말이 칭찬이라고 생각한 루벤이 신이 나서 존대도 잊고 말했다.
“그런 배려심은 원래 있으면 안 되지. 한 명 한 명 배려하다가는 아무것도 안 되니까. 아예 공평하게 나만 생각해야 하는 것이 왕족인데…….”
그가 복잡하다는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물론 나도 완전히 희생정신으로 걜 데려온 건 아니야. 이용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아내로 맞겠다고 그 어린애를 데려오면 내가 미친놈이지. 근데 그 이용 가치조차 그 계집애의 거짓말이었던 거야. 어마마마도 이해해. 나도 뒤통수 맞은 느낌인데 어마마마는 진짜 죽이고 싶겠지. 근데 뭐, 어쩔 수 없잖아. 성년이 될 때까지는 키우고 내쫓든지 해야지.”
루벤은 펄펄 뛰는 테스티를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당연히 마법사를 모아 주면 사람을 죽이는 흑마법을 쓸 수 있다고 하여 데려왔다. 두 사람만 죽이면 된다. 스잔나와 윌리엄이다. 스잔나를 죽이고 테스티가 왕비로 올라가면, 루벤은 다니엘을 제치고 2위인 계승권자가 된다. 그러고 나서 윌리엄만 없애면 왕의 자리이다.
딱히 그런 계략에 대하여 죄책감을 갖지 않는 것이 왕족의 기본 가치관이었다. 어차피 다른 왕족들도 남에게 들키지 않는다는 보장만 있으면 서로의 형제를 암살하려고 들 테니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니 자신의 목숨은 자신이 알아서 지키라는 의미로 약제국에서 그들에게 이렇게 약물 교육도 시키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데려온 나람은, 결혼식을 올릴 때까지도 흑마법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고, 그렇게 루벤은 아메탄 기준으로 성년도 되지 않은 여자와 결혼을 했다.
테스티 역시 벌레 한 마리가 즉시 죽는 것을 보고 너무 감탄한 나머지 더 이상 알아보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결혼식 다음 나람이 테스티에게 읊기 시작한 조건은 너무나 말도 안 되는 것투성이었다. 구하기 어려운 재료는 물론이고, 100명 이상의 사람이 한 번에 죽은 땅의 피가 필요하다 했으며 게다가 5년마다 한 명씩밖에 못 죽인다고 하였다. 또한 압권은, 마력을 모으기 위해 백만 명이 넘는 마법사가 필요하다고 한 것이었다.
그 모든 말을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꼴을 보던 테스티가 분노하여 그녀의 머리채를 끌고 루벤의 궁으로 왔고, 루벤은 일단 상황을 진정시킨 뒤 온 것이다.
루벤은 흑마법 자체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으므로, 자세한 조건들은 전혀 모른 채 그녀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만 눈치챘다. 사실 별로 놀랍지는 않았다. 그렇게 흑마법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람을 죽이는 게 쉬우면 누가 멀쩡히 숨 쉬고 살아 있겠는가. 다만 자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만한 외국인을 어머니의 반대 없이 적당히 곁에 아내라는 이름으로 데리고 있으려던 또 다른 목적은 어쨌든 이룬 셈이었다.
“왕자님.”
그가 생각을 떨치려고 멍하니 누워 있는데, 옆에서 꼿꼿하게 앉아 있던 르엘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응?”
“……존댓말 써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