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외국인 정혼자가 제멋대로 정해지는 왕족의 경우, 정혼자나 아내가 있으면서도 애인을 두는 경우가 허용되었다. 왜냐하면 만약에 그중 하나가 왕이 된다면, 외국인이 왕비가 될 수 없다는 관례에 따라 그 애인이 외국인 아내를 제치고 바로 왕비의 자리에 올라야 했기 때문이다. 귀족과의 연결점을 끊어 왕위 계승권이 없는 왕자들의 날개를 꺾어 놓으려던 정책이 낳은 부작용이었다. 나람은 아메탄의 이상한 풍습을 제대로 몰라서 아연실색했다. 후궁을 둘 수는 없으나 애인은 공공연하게 둘 수 있다니? 다만 그 애인은 왕족이 왕이 되지 않을 경우 평생 공식적인 비가 될 수 없는 불공평한 위치였다. 게다가 애인을 둔다는 것은 공식적으로 왕위를 탐낸다는 신호가 되어 서로에게 굉장히 불리한 패였기 때문에 흔한 일은 아니었다.
“이제 그만 네 궁으로 가 봐.”
“버, 벌써요?”
그러나 여전히, 애인조차도 될 수 없었던 나람은 도망칠 수 없었다. 곧 들킬 거짓말에 가슴이 쪼이면서도 일을 여기까지 오게 만든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약제국에서 직원이 하나 온다고 해서.”
루벤은 나람에게 눈짓을 하며 인사도 없이 나가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람은 이제는 익숙해진 고급 드레스 자락을 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약물 교육이라나, 뭐라나…… 귀찮게시리.”
다시 칼로 눈길을 돌리는 루벤의 모습을 그녀는 하염없이 응시했다. 나람은 그가 단숨에 좋아졌다. 그녀를 구해 준 사람이기도 하고, 물론 이용 가치가 있어서라고는 하지만 혼인까지 한 사이였다. 그녀의 인생을 한순간에 바꾼 남자였고, 보기만 해도 빛나는 금발 머리와 무심한 얼굴 표정이 너무나 멋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나람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그녀가 너무 어려서인 것 아닐까. 아메탄은 성년이 18세이다. 초경도 아직인 여자들의 매춘이 일상인 한스팀과는 너무 분위기가 다르다. 나람은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기분으로 그의 곁에 끝까지 남아 있기로 했다. 당장 내일 모든 것이 들켜서 죽는다 해도, 하루라도 더 루벤을 보고 싶었다. 그녀는 한숨을 한 번 쉬고, 천천히 루벤의 궁을 나섰다.
“그래서…….”
루벤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눈앞의 자그마한 여자를 바라보았다.
“지금 날 데리고 수업을 하겠다고?”
“예. 지금 왕자님은 기본적인 독초 지식도 없는 상태입니다.”
흰 실험복 가운에, 동그란 안경을 쓴 여자가 무표정으로 루벤의 시험지를 들이밀며 말했다. 루벤은 일단 누군가 자신을 부르기에 오긴 왔는데, 그 여자가 대뜸 시험지를 내밀자 몹시 당황했다. 그는 외우는 것을 몹시 싫어했기 때문에 왕립고등학교와 왕립종합대학을 다니면서도 약초학에서는 모두 찍기만 했다. 너무 오랜만에 누군가가 시키는 것을 해 본 루벤은 자신의 시험지에 빨간 비가 내리자 꽤나 수치스러웠다.
“당연히 왕족으로서 암살에 대비하여 기본적인 약물 교육을 받으셔야 합니다. 윌리엄 왕자님, 다니엘 왕자님, 아셰 왕녀님과 비교했을 때 같은 수준으로는 알고 계셔야죠.”
“대체 왜?”
루벤이 짜증난다는 듯이 반문했다.
“말씀드렸잖아요. 왕족이시면 항상 암살에 대비…….”
“누가 날 죽이는데?”
그가 씩 웃으며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댔다.
“내가 누굴 죽이면 몰라도. 혹시 요새 정치 판도를 몰라?”
“그런 건 모르고요.”
흰 실험복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로 약제국의 직원은 전혀 표정의 동요 없이 냉정하게 말했다. 그녀의 단정한 짧은 갈색 커트 머리가 살짝 비에 젖어 촉촉했다.
“저는 약제국에서 ‘왕족 약물 교육’을 맡았고, 모든 왕족들을 공평하게 같은 수준으로 교육시켜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정치나 왕족의 암투와는 무관합니다.”
“했다고 쳐.”
루벤이 손을 휘휘 저었다.
“난 얌전히 앉아서 풀 따위나 외우고 있는 성격이 원래 못 돼.”
“원래 그런 성격 같은 건 없습니다.”
“야! 죽일 거면 그냥 배때기를 쑤셔 죽이지, 누가 비열하게 약 같은 걸로…….”
어이가 없다는 듯 짜증을 내던 루벤이 말을 뚝 그쳤다. 자신도 결국 비열하게 흑마법사를 데려온 것 아닌가. 그가 중간에 말문이 막히자 눈앞의 여자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만일 교육을 제대로 이수하지 않으시면, 행정국에 이야기하여 왕자님의 고등학교 재입학을 건의하겠습니다.”
“뭐?”
“원래 평민의 경우, 왕립고등학교는 공립중학교를 나와야 들어갈 수 있어요. 왕족은 공립중학교 교육을 왕족 특별 교육으로 대체할 뿐입니다. 대체가 제대로 되지 않았으니 고등학교 입학부터 취소하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루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지금 이 나이에, 열일곱 살 애들이나 들어가는 고등학교를 다시 들어가라고? 농담 같은 것은 전혀 할 줄 모르는 것 같은 작은 여자가 딱딱한 표정으로 얄밉게 말을 이었다.
“그게 싫으시면, 교육을 제대로 받으시죠.”
“야, 그럼 내가 어릴 때 제대로 교육 안 한 너네 약제국 탓 아니야?”
“교육은 제대로 이루어졌다고 들었습니다. 왕자님이 늘 수업에 안 나타나시고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돌아다니느라 바쁘셨다면서요. 그렇다고 제대로 시간 맞춰 오신 윌리엄 왕자님의 수업을 안 할 수는 없었으니 블랑 선배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게다가 블랑 선배님이 고등학교나 대학 재학 시에도 방학 때마다 교육을 시도했지만 언제나 외국에 나가 계셨다고 들었습니다.”
“아 씨…….”
“블랑 선배님은 심약하신 편이라 혼자 끙끙대셨지만, 저는 다릅니다. 무조건 기본적인 약물 교육은 받으셔야 합니다. 그게 싫으시다면 최대한 빠르게, 단기간에 끝내요.”
“너, 이렇게 건방지게…… 약제국에서 쫓겨나고 싶어?”
“쫓겨날 리 없는데요.”
그 말에 드디어 여자의 얼굴에 살포시 미소가 걸렸다. 그녀는 루벤을 보며 살짝 가소롭다는 표정까지 지어 보였는데, 그래서 모든 것에 무관심했던 루벤은 오랜만에 이런 열 받는 감정을 느껴 본다고 생각했다.
“저 르엘라 하카트예요.”
루벤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무리 매사에 관심이 없는 그라고 해도, ‘르엘라 하카트’라는 이름을 모를 수는 없었다. 개국 이래 최고의 천재라고 불리는 약제사, 아무렇게나 다닌 대학에서도 약초학 수업 때마다 계속 언급되던 전설적인 선배, 군사 목적의 대단한 약을 척척 만들어 냄으로써 왕까지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관심을 두지 않아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다니엘과 아셰의 약물 교육 선생을 했다고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한마디, 자신의 이름으로 루벤을 제압시키는데 성공한 르엘라가 얄밉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원래 원칙적으로, 사제 관계일 때에는 제게 상호 존대를 쓰셔야 합니다. 학교 다녀 보셨으니 아시지요? 제게 존대를 쓰시고, ‘야’라든가 하는 말 대신 ‘선생님’이라고 부르세요.”
“야, 너는 그걸 말이라고…….”
“제가 나이도 더 많습니다. 아시지요?”
“얼마 많지도 않잖아? 분명히 내가 대학 다닐 때…….”
“지키지 않으시면 저는 이 길로 행정국에 가겠습니다.”
“……몇 학년 차이 안 나는 걸로 들었는데…… 요.”
루벤이 심호흡을 깊게 들이쉬며 한쪽 손으로 자신의 금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날카로운 인상에 짜증이 가득 담기자 얼굴이 훨씬 더 험악해졌지만 르엘라는 전혀 미동도 없이 잔잔한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장마 기간에 끝내, 그러면.”
결국 툴툴거리며 루벤이 말했다. 대놓고 거부하기에는 르엘라의 이름이 가지는 무게가 너무 컸다. 왕의 귀에라도 들어가는 날이면 정말로 열일곱 살 꼬맹이들과 함께 고등학교를 다시 다녀야 할지도 몰랐다.
“어차피 장마 땐 어디 돌아다니지도 못하니까.”
그는 역마살이 끼었는지, 자꾸만 밖으로 나다니고 싶어 하는 성정을 타고 태어났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몰래 왕궁을 탈출하여 온갖 아메탄 왕국을 다 돌아다녔고, 성인이 되고 나서는 본격적으로 시간 날 때마다 대륙을 돌아다녔다. 고등학교와 대학을 제대로 다녔을 리가 없었다. 그는 딱 졸업만 할 정도로 출석 일수를 채우고 무조건 짐을 꾸려 미지의 땅을 향해 떠났다.
“아, 그리고 맑은 날은 수업 안 할 거야. 연무장에서 훈련해야 해.”
어머니이자 지금은 왕의 후궁인 테스티가 그를 왕으로 앉히고 싶어 하는 것도 알고 있었고, 왕이 된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그는 아메탄 왕국이 너무 답답했고,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품은 야심도 있었다. 다만 어머니가 후궁이고 윌리엄이 너무 강건했으므로 가능성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테스티가 왕의 사랑을 믿고 정치적으로 온갖 공작을 할 동안, 루벤은 그만큼 온갖 핑계를 대며 여행을 했다. 제발 정치판에 관심 좀 가지라는 테스티의 말에 흑마법사라도 데려와서 지금 왕비인 스잔나를 죽일 방도가 있지 않겠냐는 농담을 던지고 떠난 한스팀 왕국 여행이었는데, 정말 이렇게 될 줄은 그도 몰랐다.
“열심히 공부하시면 되겠네요. 그럼 내일 오전에 비가 오면, 이리로 오겠습니다.”
“아니, 난 궁 안에 있으면 너무 답답해.”
루벤은 자신의 궁에 오랫동안 앉아 있지 못했다. 보통 궁에 있을 때면 연무장으로 가곤 했지, 가만히 실내에 있는 것은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 약제국에서 내 궁으로 오는 길에 정자 하나 있지? 거긴 지붕 있으니까 비 좀 피할 수 있잖아. 거기서 봐. 다시 말하지만 맑은 날은 수업 없는 거다?”
“그러죠.”
르엘라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원래 비가 싫었고, 게다가 비가 오는 날 밖에 있는 건 정말 최악이다. 그러나 펄펄 뛰던 왕자가 어쨌든 수업을 받겠다고 하니 그 정도는 양보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비가 오는 날에만 하는 수업이라니, 정말 싫은 것 두 개가 겹쳐서 최악의 날이 되게 생겼다.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이 책들 좀 예습하고 오세요.”
르엘라가 그의 테이블에 책을 우르르 쏟아 내며 말했다. 루벤이 질렸다는 눈으로 그 책들을 바라보며 입을 떡 벌렸다.
“그리고…….”
“또 뭐?”
루벤의 퉁명스러운 말에 르엘라가 안경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내일은 존대 쓰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