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3/256)

43화.

관리자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나람은 모래와 눈물이 섞인 얼굴을 들어 목소리의 주인공을 쳐다보았다. 그물 침대에 누워서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아메탄의 왕자였다. 지금껏 와서 한 명의 여자도 사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그가 나람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않고 말했다.

“나한테 보내라고.”

“얘는 예약이…….”

“두 배 쳐줄 테니까.”

관리자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그가 허리 굽혀 인사를 했다.

“네! 그럼 씻겨서 예쁜 옷 입히고, 바로 보내겠습니다. 얘가 이래봬도 지금 꼴이 엉망이어서 그렇지, 꽤나 반반해요.”

“필요 없어. 그냥 지금 보내.”

루벤이 무성의하게 손가락질했다.

“야, 너.”

나람은 코를 훌쩍이며 그를 보았다. 그가 그물 침대 옆에 위치한 자신의 템프를 가리켰다.

“저기 들어가, 지금.”

그녀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왕자의 눈에서 탐욕보다는 귀찮음이 보였기 때문에, 나람은 그의 마음이 바뀔까 싶어 엉금엉금 기어 2번 템프로 황급히 들어갔다.

템프 구석에서 훌쩍이다가 잠시 졸았는데, 새벽녘에 그가 들어왔다. 그는 나람에게는 별 관심도 없어 보이는 듯했다.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그가 피곤한 듯 침대에 누웠다. 밤새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그가 이불을 뒤집어쓰며 말했다.

“동 트면 나가.”

“……감사합니다.”

나람은 그제야 확실히 그가 자신을 구해 준 것을 알았다. 베개에 가지런히 놓인 그의 금발 머리를 보고 그녀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지금껏 살면서 아무도 그녀를 구해 준 적이 없었다. 그녀는 움찔거리며 템프 밖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 밤은 이렇게 넘어갔다고 하지만, 또 내일은? 언니들이 딱 봐도 멀쩡해 보이는 이 남자를 흘끔거린 것을 다 알고 있다. 분명히 하루 종일 괴롭힘을 당하다가 보복성으로 다시 3번 템프에 들어가게 될지도 몰랐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 떠나세요?”

“곧.”

그가 성의 없게 대답했다. 나람이 용기를 내어 한 번 더 물었다.

“여기는…… 왜 오신 거예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여기에 올 이유가 없었다. 여자를 사지 않는다면 이 별 볼 일 없이 척박한 땅에 왜 온단 말인가.

“가망 없는 걸 찾으러. 그런데 여기 밤하늘이 너무 예뻐서 떠나기가 힘들었어.”

“밤…… 하늘이요?”

“별이 쏟아질 것같이 많아서. 그 어떤 나라에서도 이렇게 별이 많은 하늘을 보기 힘들었거든. 아마 여기가 사막이다 보니 다른 불빛 자체가 없어서 그런가 봐.”

나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밤하늘이 뭐라고 밤새도록 그물 침대에 누워 그걸 바라보고 있단 말인가? 본다고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굶주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역시 팔자 좋은 왕족은 다른가 보다 생각했다. 

“음…….”

생각보다 자세한 대답에 용기를 얻은 나람이 조심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가망 없는 것이면…… 뭘 찾으러…… 오신 거예요?”

“뭐, 진지하게 찾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 안 했어. 겸사겸사 핑계 삼아 여행 겸 온 거야.”

“뭔데요?”

“한스팀 왕국에는 흑마법사가 있다고 해서. 뭐, 어차피 마력 자체가 사라진 세상에 한심한 소리지만. 사실은 그냥 사막이 보고 싶어서 왔어.”

“……흑마법사요?”

“핑계는 그랬지.”

루벤은 잠이 오는 듯, 발음을 뭉개며 대답했다.

“흑마법사를 찾으면 왕궁으로 데려가려고…… 내 편으로 삼아서, 형제들 다 죽이고 내가 왕이 될 거야.”

말하고도 웃긴지 그가 키득키득 웃었다. 바람이 불어 템프의 입구를 가린 천이 흔들렸다. 동이 트고 있었다. 나람은 점차 숨이 막혔다. 이 템프를 나가면, 어제와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지옥이 펼쳐질 것 같았다. 

이렇게 죽나, 저렇게 죽나. 나람은 무릎으로 기어 그의 침대로 다가갔다.

“저, 저를 데려가세요.”

“……뭐?”

루벤이 이불을 들추며 가는 눈을 뜨고 물었다.

“저 흑마법 할 수 있어요.”

한스팀 왕국의 관료들은 의무적으로 아이들을 데려다가 흑마법 교육을 시킨다. 어차피 마력이 없으니 시행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작은 벌레 정도 죽이는 것뿐이었지만, 그래도 백성들의 불만을 잠재우기에는 좋았다. 다시 마력이 풍부해진 시대가 오면 한스팀의 전성기가 오리라는 믿음을 심어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꾸만 다른 나라로 도망치는 빈곤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민족주의적 교육이기도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흑마법은 사막의 가호를 받은 한스팀 왕국의 사람들이 주로 쉽게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웃기지 마. 마력이 없는데.”

“마력은 꼭 흑마법사가 가져야 하는 게 아니에요. 마법사들 몇 명 모아 주시면 그 마력을 모아서 쓸 수 있어요. 흑마법은 저주 계열이기 때문에 꼭 한 명의 마력만 있어야 된다는 법이 없거든요.”

나람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옆에 굴러다니던 단검으로 자신의 팔을 찌른 뒤 피를 냈다. 모래 위에 손가락으로 작은 진을 그린 그녀가 주문을 웅얼거리며 자신의 피를 뿌렸다. 루벤은 처음 보는 흑마법에 눈이 둥그레져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침대 밑을 지나가던 작은 사막 지네가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죽었다.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이런 거지만…….”

그녀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래도 이 정도로 정확하게 흑마법을 쓸 수 있는 건 그때의 흑마법 교실에서 그녀뿐이었다. 선천적인 재능이 있었던 것이다. 

“마법사만 모아 주시면, 그래서 마력만 모을 수 있다면 더한 것도 할 수 있어요. 저를 데려가 주세요.”

“말도 안 돼……. 한스팀 사람들은 아직도 이렇게 흑마법을 잘 쓰나?”

“제가 뛰어난 거예요! 제가…… 타고났어요. 아무나 이렇게 못해요.”

루벤은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더 이상 졸음도 귀찮음도 사라진 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가 나람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널 내가 어떻게 믿지?”

“……저는 천애 고아예요. 저를 데려가서 곁에 두세요. 아무 데도 가지 않고 그냥 거기서 살겠습니다. 그냥, 그냥 시녀 같은 거라도…….”

“궁에는 외국인을 데려갈 수 없어.”

루벤이 짧게 깎인 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외국인을 곁에 두고 감시하려면…… 한 가지 방법뿐이야.”

리젠을 10살 때까지 수도원에 데려간 것이 가장 후회된다. 점차 커 가는 리젠을 보여 주면 오빠의 마음이 돌아올 줄 알았다. 그러나 오빠는 한결같이 자신의 딸을 거부했고, 돌아오는 길에 리젠은 혼자 조용히 눈물을 뚝뚝 흘렸다. 리젠이 내게 생떼를 쓰거나 대놓고 화를 내며 울지 않았던 이유는, 나에게도 미움 받으면 혹시라도 자신이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서였던 것 같다. 그 경험 때문인지 리젠은 조금이라도 불편한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자꾸만 쾌활한 척을 한다. 내 탓이다. 리젠이 혹시라도 비뚤어질까 봐, 무조건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라고 했더니 결국 자신의 슬픔을 말하지 못하는 아이로 컸다. 겉으로라도 활발하고 욕심이 많은 아이로 비쳐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아이의 눈에 벌써부터 보이는 허무함이 마음에 걸린다. 내가…… 너무 엄하게 키웠다.

드디어 루벤이 돌아왔다. 한스팀 왕국에서 어린애를 하나 데려왔고, 그 애랑 서둘러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이 끝나고 나서 나는 즉시 2왕자궁으로 향했다. 판단하건대, 아주 기초적인 약물 소양도 없는 것이 뻔했다. 장마철이라 비가 주룩주룩 내려서 이동하기가 몹시 불편했다. 나는 비가 정말 싫다.

- 르엘라의 일기장 중 발췌

“그래, 사람을 죽이거나 혹은 병신으로 만드는 흑마법을 할 수 있다고?”

나람은 자신에게 벌어진 일이 너무 꿈만 같아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루벤은 자신을 데리고 아메탄으로 돌아가 바로 결혼식을 올려 버렸다. 아메탄 왕국의 원칙대로라면 태자가 아닌 모든 왕족들은 외국인과 결혼을 해야 한다. 내분을 막아 승계 구도의 복잡함을 없애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보통 외국의 왕족과 정략혼을 하지, 이렇게 아무나 데려와서 결혼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아연실색하던 루벤의 어머니, 테스티가 허락을 한 것은 루벤이 ‘흑마법사고, 사람을 죽일 수 있대.’라고 말한 뒤였다. 루벤은 흑마법 그 자체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나람을 어머니인 테스티에 던져 둔 뒤, 별다른 말도 없이 연무장으로 향할 뿐이었다. 나람은 처음 보는 궁의 화려함과 맛있는 음식, 또 편안한 생활에 마음을 뺏겨 버렸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나람은 루벤에게 보여 준 것을 그대로 보여 주었고, 흑마법을 처음 본 테스티는 매우 만족하며 바로 급히 결혼식을 추진했다. 나람은 자신이 쉽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흑마법을 쓸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마법사만 모아 오면 된다는 믿음을 주며 말을 뭉뚱그렸다. 한번 거짓으로 걷기 시작한 길, 멈추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날밤에 루벤은 나람의 궁에 오지 않았다. 나람이 다음 날 조심스럽게 찾아갔을 때, ‘어린애를 데리고 무슨…….’이라고 중얼거렸을 뿐이다.

“어차피 뒤에서 뭘 하는 건 나랑 맞지 않아. 그런 건 어머니랑 의논해.”

그가 무성의하게 칼을 닦으며 얘기했다.

“널 그날 구해 준 건, 네가 여자라서가 아니라 너무 어렸기 때문이야. 어머니랑 뒤에서 잘 해 봐.”

나람은 뒷골이 서늘해졌다. 사실 사람을 죽이거나 하는 흑마법은 엄청난 마력이 필요하다. 대충 계산해 봤을 때 백만 명도 넘는 마법사가 필요한데, 그만한 마법사들을 한 번에 모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루벤이 자신에게 조금만 관심을 보이면, 애원해서라도 어떻게든 후궁으로 붙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메탄은 한스팀과 달리 후궁을 둘 수 있는 사람은 왕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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