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256)

42화.

“알려 주세요.”

리젠은 울지 않았다. 그토록 카이든의 등 뒤에서 눈물을 흘렸으면서, 사파엘을 바라보는 눈에는 눈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사실은 그동안 눈물을 참고 너무나 많은 시간을 살아온 그녀였다. 

“제가 모르는 고모의 과거요. 가르쳐 주세요.”

“……리젠.”

사파엘이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벌떡 일어나 응접실을 나갔다.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그녀가 몇 권의 노트를 챙겨 왔다. 테이블 위에 사파엘이 올려놓은 노트는 손때가 많이 묻은, 시간이 꽤 흐른 것이 티가 나는 노트들이었다. 그녀가 그 노트들을 리젠에게 밀어 주며 말했다.

“나는 정말 진실을 몰라. 몇 개의 이야기만 가지고 짐작만 했을 뿐이야.”

“…….”

“르엘라는 언제나 일기를 썼지.”

리젠이 조심스럽게 노트를 한 권 펼쳤다. 너무나 잘 아는 악필이 빼곡하게 하루하루를 채우고 있었다.

“나는 읽지 않았어. 내가 읽는 걸 르엘라가 원하지 않을 것 같았거든. 그리고…… 혹시나 내가 원치 않는 내용이 있을 때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사실은 내가 읽을 용기가 없었어. 하지만 남에게 공개되는 건 더 싫어서, 이것만은 내가 약제국에서 챙겨서 보관하고 있었지.”

리젠은 몇 권이나 되는 노트들을 끌어안으며 심호흡을 했다.

“……이젠 네게 줄게.”

진실이, 과거가, 어떠한 단서가, 같이 살면서도 전혀 몰랐던 고모의 사생활이 여기에 있었다. 리젠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리젠, 제발 위험한 건 하지 마라. 혹시나 너마저 먼저 보낸다면 내가 나중에 르엘라 볼 면목이 없어.”

사파엘이 캄캄한 창밖을 내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마치 6년 전 그때처럼, 짐작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언제나 무표정에, 작지만 꼿꼿했던 그녀의 옛 친구를 생각하며 사파엘은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아 고개를 숙였다.

6. (외전) 붉은 장미꽃

다니엘과 아셰가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게 되면서 나의 ‘왕족 약물 교육’ 수업은 끝났다. 다들 기피하는 업무였지만 나는 리젠 또래의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어서 즐거웠다. 내가 잘못 키워서겠지만, 다른 또래들에 비해 리젠은 지나치게 남의 눈치를 보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하다. 몹시 걱정이다.

그렇게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블랑 선배가 주저주저하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2왕자 루벤이 사실은 약물 교육이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2왕자는 나보다 네 살이나 어리지만, 약물 교육을 받을 나이는 전혀 아니고 심지어 대학까지 졸업한 상태다. 원래대로라면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1왕자 윌리엄과 함께 아주 예전에 받았어야 했다. 도대체 왜 아직까지도 약물 교육이 되어 있지 않으냐는 내 물음에 블랑 선배는 한숨만 쉴 뿐, 이유를 쉽게 말해 주지 않았다.

하루를 꼬박 생각하다가, 어찌 되었든 나의 관할이 된 후의 일이니, 내가 어떻게든 책임지겠다고 말했다. 내게 미안해 어쩔 줄 모르던 그녀가 조용히 ‘빌어먹을 그 자식의 역마살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실제로 내가 그날 오후, 루벤을 만나 보려고 하니 한스팀 왕국으로 여행을 떠났다고 했다. 대학 시절의 학점을 찾아보았다. 그의 약초학 학점은 D+이었다. 한숨이 나왔다.

- 르엘라의 일기장 중 발췌

“2번 템프의 저 미친 남자는 왜 저래?”

“말 함부로 하지 마, 아메탄 왕족이래.”

“그래도 이상한 사람이야. 왜 밤에 저러고 있어?”

“여자를 안 살 거면 대체 여기 왜 온 거지?”

사막은 척박한 땅이다. 마력이 사라지고 있는 지금, 일교차가 큰 사막에 위치한 한스팀 왕국에서 삶은 점차 더 고되게 변해 가고 있었다. 혼자서는 쉽게 길을 떠날 수 없고, 오아시스 근처에 모여 살아야 하는 그들의 특성상 빈부 격차가 점차 더 커지고 있었다.

국경에 위치한 작은 마을에 이틀 전 찾아온 젊은 남자 손님은 요즈음 마을 사람들의 큰 관심사였다. 한스팀 왕국에서 볼 수 없는 금발 머리에 파란 눈이 굉장히 이국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무언가 모든 세상사에 무관심한 것 같은 표정과 기이한 언행들이 시선을 끌었기 때문이다. 왕족이라 돈은 많은지 굉장히 고급스러운 여행자용 템프(한스팀 왕국에서 주거에 사용하는 천막)에 묵었으나, 여행자들을 상대로 몸을 파는 여자들을 부르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밤마다 나와서 자신의 템프 옆에 묶어 놓은 그물 침대에 누워 하염없이 하늘만 바라보았다. 도대체 왜 저렇게 하늘만 바라보는지 도무지 모를 일이었다. 

“야, 3번 템프에서 오늘 또 여자 보내 달라던데.”

삶이 강퍅하면 힘이 없는 사람들은 더 힘들어진다. 한스팀에서 여성의 인권은 거의 바닥에 떨어진 지 오래였다. 여행자 템프를 관리하던 관리인이 퉁명스럽게 말하자 우물가에서 노닥거리던 여자들 사이에서 파란이 일었다.

“3번? 그 미친 변태? 개자식, 난 안 가.”

초록색 머릿수건을 매고 있던 여자가 짜증을 냈다.

“그 새끼한테 맞은 여기, 여기, 여기. 멍이 다 빠지지도 않았어.”

“나도 안 갈 거야. 개새끼가 밤새도록 괴롭혀. 난 벨트로 맞았다고.”

“난 어제 노인네 수발하느라 오늘까지 힘들다. 언니는 좀 빼 줘.”

“난 죽어도 안 가. 난 못 참고 욕했다가 살점이 다 물어뜯겼다니까. 머리채도 잡히고.”

몸을 파는 여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절대 안 간다며 손사래를 쳤다. 관리인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야, 누군가는 가야 될 것 아니야? 얼른 정해.”

그녀들은 한참 동안이나 서로에게 미루다가, 분위기가 안 좋아지자 각자 입을 다물었다. 이런 좁은 사회에서 너무 심한 갈등을 만들면 안 된다. 서로 눈치를 보는 와중에 우물 옆에서 설거지하는 소리만 달그락 달그락 울렸다. 초록 두건을 쓴 여자가 눈을 반짝였다.

“나람, 너 몇 살이지?”

등을 옹송그리고 설거지를 하던 나람이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여, 열다섯…….”

“됐다. 얘 보내자. 클 만큼 컸어.”

나람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그녀가 몸을 벌벌 떨며 고개를 저었다.

“어, 언니…… 저는 그냥…… 허드렛일을 하면 먹을 걸 준다고…… 그래서 왔는걸요.”

“웃기지 마. 그래서 너는 우리랑 다르다, 이거니?”

여자들이 도끼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이 바닥에서 구르는 한, 우리처럼 될 수밖에 없어. 시간문제라고.”

“언젠가는 너도 처음이 있어야지. 얘 보내자. 얼굴도 반반하잖아?”

“그래. 열다섯? 난 열네 살부터 이 짓 시작했어.”

한스팀 왕국에서는 우물이나 오아시스 근처에 버려진 아이들이 많았다. 나람도 그중 하나였고, 여행자 템프를 운영하는 부호가 거두어 허드렛일을 시키고 있었다. 물론 여행자 템프를 빌려주는 것도 큰 수입원 중 하나였지만, 몸을 파는 여자들이 벌어 오는 수익도 쏠쏠했기 때문에 보통 버려진 여자 아이들은 이런 식으로 쓰이는 것이 흔했다.

한스팀 왕국이 쇠퇴하면서 사람의 몸값은 하찮게 여겨지고 있었다. 세계 각지의 여행자들이 싼값으로 여자를 살 수 있다는 이유로 공공연하게 찾아오는 곳이었다. 국가에서 체계적인 관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행자 템프에서는 성매매는 물론이고 인신매매까지 이루어지곤 했다.

“어, 언니들…… 싫어요……. 저는 진짜, 진짜 싫어요…….”

나람이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여자 중 하나가 그녀의 뺨을 세게 올려붙이는 바람에 설거지통의 물이 거세게 튀며 그녀가 나뒹굴었다.

“뭐가 진짜 싫어?”

“으, 으으으으…….”

“어차피 밑바닥 인생인 건 우리 다 마찬가지인데, 언제까지 깨끗한 척하려고 그래?”

“괘씸하네. 그럼 이게 그동안 우리를 무슨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거야?”

관리인이 그 꼴을 팔짱을 낀 채로 바라보고 있다가, 표정 없는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나람, 얘 보내기로 결정한 거지?”

“아, 아니에요…… 제, 제발……. 앞으로 템프 청소도 더 많이 할게요, 언니들 목욕 시중도 밤늦게까지 들게요. 부디…….”

나람이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관리인의 발밑에 가져다 대며 사정했다. 관리인은 제대로 그녀의 말을 듣지도 않은 채로 나람의 머리채를 끌어 당겨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건방지게…….”

거의 가축을 끌고 가는 것처럼 그가 나람을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뒷걸음질 치며 끌려가는 나람의 발목 주변으로 모래가 튀었다.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어 버리고 싶었으나 실천에 옮길 강단도 되지 않았다. 물이 귀한지라 몇 번이고 헹굼질을 했던 설거지통에 처박힌 이후 옷에서도 벌써부터 쉰내가 나기 시작했다. 이대로 머리채를 잡힌 채로, 그녀는 이제 대충 씻긴 후 야한 옷을 입고 3번 템프에 내쳐질 터였다.

3번 템프의 여행자는 나람도 왔다 갔다 하면서 보았다. 배가 불룩 나오고, 한쪽 눈이 애꾸인 몸집 큰 중년 남성이었다. 그가 지나가면 역겨운 외국 담배 냄새가 진동을 했고, 그의 템프에 다녀온 언니들의 몸에는 멍이 잔뜩 들어 있었다.

“과, 관리자님, 제, 제, 제, 제발…….”

이런 일이 너무나 익숙한 관리자는 전혀 대꾸조차 없었다. 나람은 모래 먼지에 콜록대면서 엉엉 울었다. 삶이 너무 고되고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그때, 약간은 귀찮아하는 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걔 나한테 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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