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어느 날부터 꿈을 꿨어.”
“…….”
“왜인지는 모르겠어. 내 무의식이 너를 좋아했는지…… 꿈에 나와서 너를 관찰하게 됐어.”
리젠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멈춘 줄 알았던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녀가 짐작도 하지 못할 만큼 거대한 두려움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카이든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일까? 어쩌자고 그렇게 대책 없는 약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먹여 버렸을까? 카이든의 절실한 속삭임이 이어졌다.
“바보같이, 아프고 힘들고 괴롭다는 말도 안 하고 남들 앞에서 웃는 네가…… 좋더라고. 네 웃는 모습 뒤에 일렁이는 외로움이 보여서 계속 옆에 있어 주고 싶더라고. 나는 그냥 네가 성취 지향적인 애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벼랑을 뒤에 두고 필사적으로 사는 애더라고.”
그녀의 허공을 헤매던 손이 툭 하고 떨어졌다. 자신이 품고 있던 괴로움을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그녀를 밝고 쾌활하며 영리한 애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고 남들에게도 버림받을 수 없다는 오기로 살아온 지난날들을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몰라…… 그런 건 이제 다 모르겠어. 그냥 너를 보면 미칠 것만 같아. 미친놈처럼, 다 그만두고 널 억지로라도 곁에 둔 채 잠적해 버리고 싶어. 제기랄, 6년 동안 쫓아왔던 사건의 전말이 눈앞에 보이는데도 감정이 미뤄지지가 않아. 나중에 생각하자고 나를 달래 봐도 결국 제자리고.”
“카이든.”
리젠이 차분하게 말했다. 머리가 멍했다. 그녀는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나, 나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포개어 있는 가슴 위로 카이든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가 필사적으로 말했다.
“네 말대로, 사건의 전말이 눈앞에 보이잖아. 이런 건 다 나중에 생각하자.”
카이든은 꿈을 꾸고 나서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했다. 시작부터가 사실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 그녀의 실수였던 것이다. 이 모든 걸 알게 되고 나서도 카이든은 그녀를 좋아할까? 마음속에 일렁이던 엄청난 무서움이 그녀를 잠식하는 것 같았다. 의도는 아니었지만, 몰래 그런 약을 먹였다고 그녀를 경멸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리고 그 이상한 꿈에서부터 시작된 감정은 당연히 부정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 약만 몰래 먹이지 않았다면 그는 여전히 그녀에게 관심이 전혀 없었을 테지…… 게다가 원래 약의 주인공은 카이든도 아니고, 다니엘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녀는 몰아치는 두려움을 누른 채 정신없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그냥 나중에 생각해. ‘의심의 기간’이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일단은…… 그냥 과거의 진실을 밝히는 데에만 신경 쓰자.”
카이든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의 표정에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거절이 완고하게 나타나 있었다. 그녀의 말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 것 같은 그의 눈빛을 바라보며 리젠은 다급하게 말했다.
“나도, 우리 고모 일 때문에 정신이 없거든. 사실 이제는 내가 다니엘을 좋아하는지 아닌지도 모르겠어. 그래서 저 피가 효력이 있을까도 싶어. 지금은 나, 온 신경이 고모한테 있어서…….”
‘고모’라는 말에 카이든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 맞다.”
그가 중얼거렸다.
“르엘라 하카트랑, 2왕자랑 혹시 연인이었어?”
“뭐?”
리젠이 눈썹을 꿈틀했다. 카이든이 천천히 팔을 놓으며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런 말을 엿들었어. 르엘라랑 루벤이…… 아무래도 윌리엄 같지는 않으니까…….”
리젠은 표정이 굳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온갖 잔상이 순간적으로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르엘라?’
어느 비가 오던 날, 정자에서 만난 루벤은 그녀를 보고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었다. 새삼 그의 표정에 있었던 간절함이 떠올랐다.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휘적휘적 걸어가던 뒷모습에서 보이던 쓸쓸함.
‘주제에 안 맞게 첩년 짓 하는 건 네 고모 닮았나 봐?’
무도회에서 만난 영애의 차가운 말도 기억났다. 무도회 내내 그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고 지루해하던 모습을 숨기지 않던 루벤, 그의 옆에 안절부절못하며 그림처럼 앉아 있던 나람.
‘잘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들쑤셔서 르엘라의 명예만 추락시키지 마.’
“말도 안 돼…….”
리젠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등이 찢어지는 것 같았지만 쓰러질 수 없었다. 그녀를 급히 카이든이 붙잡았다.
“카이든, 나 좀 부축해 줘.”
“어?”
“갈 곳이 있어.”
“지금? 안 돼. 간단하게라도 치료하고 가.”
“아니, 지금 이 상태로 가야 해.”
그녀가 발을 질질 끌며 결연하게 말했다. 휘청거리는 그녀의 발걸음을 보고 있던 카이든이 결심한 듯 말했다.
“업혀.”
그가 등을 내밀었다.
“아냐, 너 힘들어. 차라리 그 막 지붕 위로 뛰는 거, 그렇게 갈래?”
“안 돼. 너 지금 상처 심해서 그러면 더 아플 거야.”
머뭇거리는 리젠의 팔을 억지로 끌어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려놓고, 그가 벌떡 일어서 그녀를 업은 채 터벅터벅 걸었다. 리젠은 그에게 업혀 걸어가는 길이 처음이 아님을 상기해 내고 그의 등에 머리를 묻었다. 꼴이 엉망이었지만, 정리되지 못한 마음이 마구 뒤엉켜 있었지만, 일단은 무언가 알 수 없게 마음이 놓였다.
아무도 없는, 캄캄하고 구불구불한 수도의 뒷길을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어가는 기분이 마치 꿈속 같았다. 쓰라린 등 뒤의 상처도, 부풀어 오르고 있는 뺨 한쪽도 너무나 아파서 눈물이 한 방울 한 방울씩 떨어졌다. 카이든이 조용히 말했다.
“리젠.”
“어?”
“나한테 와 줘.”
리젠은 대답하지 않고 그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나중에, 나중에 생각하자. 이 모든 건, 해독제를 만들고 모든 일이 해결된 뒤에, 그 뒤에 모든 걸 사실대로 털어놓고, 그 뒤에 생각하자. 그녀는 지금 카이든에게 모든 걸 털어놓기에는…… 너무 무섭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누군가 의지할 곳 없이 살았다. 혹시나 그가 그녀에게 실망하여 떠나 버린다면, 너무나 오랜만에 느껴 보는 이 안도감은 어떤 감정이 되어 그녀를 덮치게 될까.
그런 그녀의 생각은 꿈에도 모르고, 카이든이 대답 없는 그녀에게 낮게 중얼거렸다.
“내가 언제든 지켜 줄 테니까.”
그녀가 눈물 어린 얼굴을 그의 등에 묻었다.
“내가 어디든 같이 가 줄 테니까.”
그녀는 원래 잘 울지 않았다. 세상에서 그녀의 눈물을 가장 많이 본 사람이 카이든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언제까지나…… 기다릴 테니까.”
문을 연 사파엘의 표정에 경악이 스쳐 지나갔다. 한밤중에 리젠이 문을 두드린 것도 놀랐는데, 급히 가운을 걸치고 문을 여니 그녀의 꼴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수사국 제복을 입은 한 청년의 등에 업혀 온 그녀는 거의 피투성이에 가까웠다. 사파엘은 비명을 삼키며 급히 그들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카이든 루스? 제복을 입으니 몰라 보겠네. 학생 때와 분위기가 너무 다르구나.”
사파엘이 카이든을 보고 잠시 눈을 가늘게 뜨더니 놀라서 말했다. 대학 시절 둘이 라이벌 관계인 것은 알았지만 친한 줄은 전혀 몰랐다.
그 의외의 조합도 놀라웠지만, 리젠의 모습은 거의 처참했다. 사파엘은 그녀에게 럼주를 건네며 비상약을 잔뜩 챙겨 왔다. 리젠은 머리카락이 들쑥날쑥 잘려 있었으며, 외투를 벗자 거의 걸레 조각이 된 옷들 사이로 피딱지가 엉겨 있었다. 얼굴 역시 말이 아니었다. 눈은 퉁퉁 부어 평소의 크기에 절반이었고, 한쪽 뺨은 벌겋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리젠…… 이게 어떻게…….”
“부장님.”
리젠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이거라도…… 아니, 치료약하고 붕대, 붕대라도 얼른…….”
정신이 없어 보이는 사파엘의 팔목을 리젠이 잡았다.
“저랑 그때 대화하신 거 기억나세요?”
“…….”
“고모 일은, 다 끝난 거라고. 죽었으니 이제 다 끝이라고.”
사파엘은 생각이 많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붕대를 찾던 그녀의 손이 멈췄다. 리젠과 르엘라는 갈색 머리 빼고는 거의 닮지 않았으나, 단호한 표정을 지을 때 딱딱하게 굳는 입매만은 제 고모를 쏙 빼닮았다. 리젠이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끝이 아닌 것 같아요.”
“리젠,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니? 이게 뭐야…….”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고모가 관련되어 있는 건 확실해요.”
카이든은 리젠이 일부러 치료를 받지 않고, 민폐인 것을 알면서도 한밤중에 사파엘의 집 문을 두드린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말을 하지 않는 사파엘의 입을 열기 위해 극적인 효과를 노린 것이다. 그렇게 등이 난도질당할 정도였으면 조금 생각을 쉬어도 좋으련만, 리젠은 아무리 힘들어도 지쳐 쓰러지는 법이 없다. 어떻게 해서든 다음 일을 생각하는 것이다. 리젠의 덜덜 떨리는 손을 잡아 주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카이든은 가만히 사파엘을 바라보았다.
“고모랑 루벤 왕자님이랑, 무슨 사이였어요?”
루벤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사파엘의 표정이 대놓고 굳었다. 그녀가 리젠의 시선을 피하며 더듬거렸다.
“당연히…… 약제국의 왕족 교육 담당 직원이랑…… 왕족이지…….”
“……그뿐이에요?”
리젠이 조용히 물었다.
“저는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런 공격을 당했어요. 배후를 짐작은 하지만 퍼즐이 맞춰지지 않아요. 고모에게 물어볼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고모가 살아 있다면, 조카가 이런 꼴로 왔을 때 분명 진실을 가르쳐 줬을 거예요. 그게 무슨 내용이든.”
장작 타는 소리만 응접실에 울렸다. 사파엘은 깊은 고민에 빠진 듯했다. 리젠은 더 이상 물러나지 않겠다는 단호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알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