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256)

40화.

“습격입니다. 수가 너무 많아요.”

“……그래요?”

“왕자님께 상황을 보고하러 한 명이 떠났습니다. 이쪽의 숫자가 너무 부족해 오래 못 버틸 듯합니다. 몸을 피하십시오.”

“많이 다치신 것 같은데…… 괜찮으세요?”

“뒷수습을 어찌하려고 이렇게 크게 움직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이 일이 커지면 그쪽도 곤란해질 테니, 최대한 사람 많은 길을 향해 왕궁 쪽으로 피신하도록 하죠. 제가 엄호하겠습니다.”

“네. 가요.”

리젠이 고개를 끄덕이고, 신발 끈을 묶은 뒤 그를 따라 뒷문으로 뛰어나갔다. 뒤를 살펴보니 집 근처에서 처참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밤, 리젠의 눈에는 대체 누가 어떤 쪽인지도 모르는 전투였지만 생각보다 수의 열세 때문에 밀리고 있음은 알 수 있었다.

리젠과 르엘라의 집은 작은 언덕 위에 위치한, 다소 외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왕궁으로 가는 가장 큰길은 시장 거리를 가로 질러 광장을 통해 가는 것이었다. 리젠은 온 힘을 다해 뛰며 자신의 뒤에서 주변을 경계하고 있는 호위 무사에게 말했다.

“이름이 뭐예요?”

“예?”

“이름이요.”

“켄타 빈스입니다.”

저 멀리 그들의 뒤로 추격자들이 따라붙는 것이 보였다. 빠져나간 것이 들킨 듯했다. 리젠이 아무리 보통 여자치고 체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훈련된 추격자들보다 빠를 리가 없었다. 그녀는 왕궁으로 가기 전 따라잡힐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켄타, 만일 따라잡히면, 절대 목숨 같은 거 걸지 마세요.”

“네?”

“어차피 제 목숨을 노리는 건 아니에요. 좀 다치면 그만이니, 절대 저를 위해 목숨을 버리지 마세요.”

“무슨 소리십니까? 저는 명령을…….”

“누구나의 목숨값은 다 똑같은 거 아니겠어요? 저의 목숨도, 켄타의 목숨도, 그리고…… 다니엘 왕자님의 목숨도. 절대 죽지 마시고, 그냥 제가 다치게 두세요. 약속하세요.”

켄타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유난히 발이 빠른 추격자가 따라붙어 칼로 쳐 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섯 명 중 가장 실력이 좋아 리젠에게 직접 붙은 만큼 한 명 정도야 쉽게 이길 수 있었지만, 저 멀리 따라오는 한 무리의 추격자들을 다 이길 자신은 솔직히 없었다.

리젠은 죽어라고 뛰면서 무도회 때 새처럼 도약하던 카이든을 생각 중이었다. 그런 비기를 가르쳐 준다니,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다면 수사국에 들어가는 걸 조금이라도 고민해 볼 걸 그랬다. 아니면 대체 어떻게 하는 건지 대략이라도 배워 둘걸. 시장 길을 통과하며 켄타가 문을 닫은 상점들이 쌓아 놓은 물건을 마구 흐트러트리며 뛰었다. 리젠의 상대적으로 느린 속도 때문에 이제는 눈에 보일 정도로 많은 추격자들이 따라붙고 있었다.

“안 되겠습니다.”

켄타가 속삭였다.

“조금 위험하지만 이대로는 가망이 없습니다. 저 골목길을 돌아서 제가 저놈들을 광장 쪽으로 유인할 테니, 저와 다른 길로 가십시오. 분명 저들은 저희가 큰길로 가려는 의도를 알고 있을 겁니다. 좁은 지름길로 돌아 왕궁으로 뛰십시오. 길은 아시지요?”

어느 정도 리젠이 자기 몸은 지킬 줄 아는 여자라는 것을 파악한 켄타의 판단이었다.

“출근길이에요. 걱정 마세요.”

리젠은 합리적인 제안이라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꺾어지는 골목길을 지나, 리젠과 켄타가 갈라졌다. 구불구불 돌아가는 골목길을 달리는 리젠의 뒤가 허전했다. 막상 켄타와 헤어지니 두려움이 훅 몰려왔다. 그래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뛰면 왕궁이다. 왕궁에 도달하여 다니엘이나 아셰를 찾으면 일단은 안전이 확보될 터였다.

“이 쥐새끼 같은 년!”

“아악!”

순간, 아찔하게 그녀의 머리채가 잡혔다.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데 다른 골목길로 한 명이 길을 질러 와 따라붙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눈물이 찔끔 나는 것을 참고 쥐고 있던 단검으로 정신없이 단숨에 자신의 머리채를 잘라 냈다. 길고 구불거리던 머리카락이 투두둑 떨어지며 반동으로 그녀에게 따라붙은 괴한이 휘청거렸다. 그녀가 중심을 잡고서 숨을 헐떡였다. 어차피 달려 봤자 잡힌다. 어설프게 도망가느니 한 번 일격을 주고 숨는 것이 나았다.

“네년이 낸 이 상처…….”

그가 하이힐이 남긴 얼굴에 길게 찍혀서 긁힌 상처를 가리키며 이를 갈았다.

“배로 갚아 주지.”

달려드는 그의 배에 그녀가 빠르게 단검을 꽂아 넣으려고 했으나 남자의 완력에 밀려 쓰러지고 말았다. 그녀의 손을 쉽게 붙들고 그가 단검을 뺏어 멀리 던졌다. 등에 흙이 쓸려 아팠다. 리젠이 빙글 뒤로 굴러 일어나, 그의 목을 향해 힘껏 발을 찼다. 가볍게 피한 그가 그녀의 목을 한 손으로 졸랐다.

“으흐흐…….”

그가 품에서 칼을 꺼내 한 바퀴 돌렸다. 리젠은 목이 졸리는 와중에도 발로 힘껏 그의 손목을 차서 칼을 날려 버렸다. 그녀는 숨을 컥컥대며 자신도 모르게 주문을 웅얼거렸다. 리젠의 손에서 힘없이 불길이 일어났으나, 그가 쉽게 그녀의 손목을 제압해 버렸다.

“두 번 당할 것 같으냐?”

그녀는 마법사들이 왜 그렇게 마력증폭약에 목을 매는지 백 번 이해할 수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마력이 있었어도 이깟 괴한쯤이야! 체력과 물리력에서 오는 한계는 도저히 극복할 수가 없었다. 그가 리젠의 뺨을 후려치고, 쓰러진 그녀의 등 뒤로 허리춤에 찬 채찍을 꺼내 휘둘렀다.

“아아아아악!”

살이 찢어지는 아픔이 등 뒤로 느껴졌다. 그녀의 두 다리는 그가 밟고 있었지만, 팔이 자유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아파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채찍질이 두세 번 더 이어졌다. 살과 피가 튀기는 고통은 기절할 정도로 아팠다. 그녀의 손이 흙을 잡으며 아프게 쓸렸다. 여린 살갗을 헤치며 상처를 내는 손이 느껴졌다. 그녀의 피를 받아 가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아, 안 돼…….”

너무 아파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격한 아픔은 처음이었다. 그녀가 욕을 웅얼거리자 한 번 더 채찍이 공기를 휘두르는 소리가 들렸다. 리젠이 눈을 질끈 감을 때였다.

“이 빌어먹을 새끼가!”

사람이 사람을 치는 소리가 밤공기를 울렸다. 리젠은 당장 일어날 힘도 없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 낮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눈물이 순식간에 후두두둑 떨어졌다. 눈물이 정신없이 흐르며 시야가 더 흐리멍덩해졌다.

“……가만 안 둬. 넌 내가 죽인다.”

리젠은 카이든의 그렇게 화가 난 목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퍽, 퍽 하는 일방적인 구타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엉금엉금 기어 가까스로 벽에 몸을 기대고, 눈물로 흐려진 시야를 닦았다. 카이든이 괴한의 가슴팍을 발로 차며 차가운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괴한이 비틀거리며 제대로 된 반격도 못하고 당하는 동안, 리젠은 코를 훌쩍이며 다리에 힘을 주다가 괜히 핏줄이 터져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그를 제압하고 있던 카이든이 리젠이 비명을 지르는 순간 뒤를 돌아보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괴한이 골목길을 달려 사라졌다. 카이든은 그를 쫓으려는 시도도 하지 않고 그녀에게 뛰어 다가왔다.

“괜찮아?”

“아, 아니야……. 나 괜찮아…….”

그녀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살짝 웃어 보였다.

“그나저나, 피 뺏겼어. 얼른 따라가. 너는 할 수 있잖아.”

이 와중에도 그녀는 자신의 꼴이 엉망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머리는 쥐 파먹은 것처럼 잘라 놨고, 온몸은 피투성이에 옷은 넝마가 되었고, 세게 맞은 뺨은 부어오르고 있었다. 억지로 웃어 보여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채찍질을 당한 등은 시간이 갈수록 더 아팠다.

“가. 넌 막 지붕 위를 날아다닐 수 있잖아. 얼른 가서…….”

“웃지 마, 바보야.”

그가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 눈물을 닦아 주었다.

“넌 이 상황에도…… 괜찮은 척을 하냐?”

그녀는 시야가 흐릿하여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그가 허겁지겁 자신의 외투를 벗어 엉망진창이 된 그녀의 옷 위로 조심스럽게 덮어 주었다.

“왜…… 저 피 가져가면, 정말 다니엘이 죽을 것 같아서?”

“카이든, 그게 아니고…….”

“리젠.”

골목길에 힘들게 기대어 있던 그녀를 카이든이 조심스럽게 안았다. 아무도 없는 캄캄한 밤의 골목길, 추격자들은 목적을 달성하고 더 이상 그녀를 찾지 않았고, 사방은 다시 고요해졌다. 오랫동안 그가 따뜻한 품으로 그녀를 가만히 안고 있었다. 그녀가 정신이 없는 와중에 가만히 눈만 깜빡이고 있는데, 그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그 어떤 것보다 크게 울렸다.

“널 좋아해.”

리젠은 멈추지 않는 눈물 때문에 히끅거리다가, 번개를 맞은 것처럼 혼자 흠칫 놀랐다. 그의 목소리가 멈추지 않고 꽉 문 잇새 사이로 흘러나왔다.

“아무리 참아 보려고 해도 안 돼. 접으려고 해도 안 접어져. 혼자 간직하려고 해도 난 도저히 못하겠어.”

그녀를 감싸 안은 카이든의 팔에 점차 힘이 들어갔다.

“네가 다니엘을 좋아해도, 다니엘 역시 너를 좋아해도, 그래도 나는 너처럼…… 그냥 지켜볼 순 없어. 난 그렇게 못해.”

“카, 카이든…….”

리젠의 머리가 띵해졌다. 그렇다면 그동안, 그가 좋아한다던 여자가…….

“리젠 하카트, 나한테 와. 그냥 날 좋아해 줘. 나 좀 봐.”

그가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돌아 버리겠어.”

그의 목소리가 너무 고통스러워 보여서, 리젠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허리를 감싸려고 팔을 올렸다.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네 꿈만 꾸고…… 그 꿈에서 미친놈같이 싫다는 널 억지로 안고…… 자괴감에 돌아 버릴 것 같았는데…….”

그녀가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던 팔을 순간 멈췄다. ‘꿈’이라는 단어가 나오니 순간 멍하던 의식이 돌아온 것이다.

“젠장……. 그렇게 잊어 보겠다고 며칠 널 멀리 해도 온종일 네 생각뿐이고, 잠입 수사 하고 있다가도 네 이름 들리니까 미친놈처럼 그 먼 거리를 뛰어오고, 다니엘 목숨 줄을 들고 있을지도 모르는 새끼가 도망가는데도…… 널 두고 갈 수 없어.”

“카이든.”

“마음 접는 거, 안 되는 거 내가 제일 잘 알지만…… 그래도 나 좀 봐 줘, 바보야.”

“카이든 루스.”

한밤중, 골목은 아주 조용했다. 리젠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나를…… 왜 좋아하게 됐어? 너, 학창 시절 내내 나한테 관심도 없었잖아.”

“어느 날부터 꿈을 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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