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다니엘과 동갑인 아셰는, ‘다니엘 오빠’와 ‘다니엘’을 혼용하여 쓰곤 했다. 다니엘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아셰는 물 만난 고기처럼 폭포수같이 말을 쏟아 내었다.
“그런데 요즘에 귀족가 영애들은 왜 이렇게 많이 만나? 괜한 희망 고문 시키지 말고, 얼른 리젠 잡아. 내가 말했잖아. 리젠 마음을 잘 모르겠다고. 정치질도 좋지만, 여자 마음이 얼마나 갈대 같은데. 난 분명 충고했어. 아무리 오랫동안 간직해 왔다고 하더라도 변하는 건 한순간이고, 원래 떠나는 사람 마음은 기다려 주지 않아.”
“흐음…….”
다니엘의 조각 같은 얼굴에 그늘이 졌다.
“옛날에는…… 약혼녀가 어쨌든 제국에 있다고 생각할 때에는…… 정말로 그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었는데…… 당연히 그게 맞으니까 말이야.”
“그렇지. 내가 지금 그래. 어차피 잘 안 될 거 아니까 아예 이성에 관심이 안 생기지.”
“약혼녀가 없어지고…… 계속 뭔가 도움을 청하고 그러다 보니까…… 이상하게 편하더라고. 르엘라 조카라서 그런가 봐. 그냥 믿음이 가고…… 확실히 뭐든지 잘 하고…… 밝고 명랑하고…… 엄청 영리하잖아.”
“으아아아, 뭐야, 진짜! 닭살 돋아!”
“귀족들 표 좀 모아 보겠다고…… 귀족 영애들을 만나면서 이상하게 더 생각이 나더라고. 리젠은 그 귀족 영애들하고 모든 게 다 반대야. 능청맞게 자신을 낮추며 상대방을 웃길 줄 알고, 영리하고 똑똑한 걸 숨기지 않아…… 추진력도, 담력도 대단하고. 내가 지켜줘야 할 대상이 아니라, 뭔가 의지하고 싶은 대상이야.”
다니엘이 살짝 웃으며 아셰에게 말했다.
“이게…… 이런 감정이…… 좋아하는 거겠지?”
아셰가 입을 떡 벌렸다.
“당연하지…….”
그녀는 생각보다 놀랐는지, 웃음까지 멎은 채로 중얼거렸다.
“난 오빠가 누군가에 대해서 이렇게 자세히 얘기하는 거 처음 봐.”
다니엘은 부드럽게 금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씩 웃었다. 이런 얘기를 하는 자기 자신이 신기한 건 다니엘도 마찬가지였다. 아셰가 약간 충격을 받은 어조로 말했다.
“사실은…… 괜히 리젠 갖고 노는 거면 그만두라고 하려고 했어. 요새 오빠가 귀족 영애들 순회하며 만나는 거, 보기 싫었거든. 그런데…… 그런 부탁은 안 해도 되겠네.”
그녀가 생각에 잠긴 눈으로 테이블의 한쪽 끝을 바라보았다.
“……이제 문제는 리젠이네.”
“내가 노력해야지.”
다니엘이 별로 초조하지 않은 듯 싱긋 웃었다.
“놓치고 싶지 않으니까.”
“아, 그래……. 된 것 같아…… 잠시만…….”
리젠은 집에서 냄비에 각종 엄선된 재료들을 넣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의 표정이 심각하게 냄비 안에서 끓고 있는 액체의 색깔 변화를 관찰하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확실해. 이제 소그노의 뿌리가 문제인데……. 일단 100g?”
그녀가 신중하게 무게를 재어 냄비 안에 잘 손질된 소그노의 뿌리를 털어 넣었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엉겁과도 같은 1분이 지났다. 액체에 코를 파묻고 있던 그녀가 시약의 색깔이 더 이상 변하지 않는 것을 보고 실망해서 한숨을 쉬었다.
“하나만…… 하나만 더 찾으면 돼. 기운 내자, 리젠 하카트. 거의 다 왔다.”
아무리 주변에서 일이 터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리젠은 언제나 자신의 가장 큰 목적을 잊지 않았다. 시약에는 책임을 져야 한다. 카이든과의 꿈 연결을 끊을 수 있는 해독제를 만드는 것이 그녀의 가장 큰 과제였다. 그래도 그동안 르엘라의 메모나 노트를 보면서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굉장히 많은 진전을 이루고 있었다. 악바리처럼 약제국에서 퇴근하고 난 이후에도 죽어라고 연구를 한 덕이었다.
“소그노의 뿌리가 아니면, 다음번에는 비슷한 상성의…… 일란의 모래를 넣어 볼까…….”
리젠은 오늘 했던 실험의 결과를 일지로 적고, 뒷정리를 하며 내일 약제국에서 보는 자체 중간시험을 준비하기로 했다. 인성 및 상식 수준, 가치관 등이 주된 내용인 이 시험을 통과해야만 이제 약제국의 신약을 개발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 거의 대부분이 사회적인 상식 수준이었기 때문에 리젠은 대충 책만 한 번 읽고 가기로 했다.
“아메탄 왕국의 신분…… 왕, 왕족, 귀족, 영주, 평민. 뭐, 다 아는 얘기고…… 산하기관의 역사 및 가치관…….”
왕국 산하기관은 아메탄에만 있는 독특한 기관이었는데,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는데다가 별다른 광물도 나지 않은 작은 나라인 아메탄이 제국에 공물은 바칠지언정 꽤나 부유하고 안정된 사회구조를 갖는 데에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원래는 개국 초기 왕권이 아주 강했을 때, 무능한 귀족보다는 영리한 평민에게 일을 맡기는 것이 더 좋겠다고 생각한 왕이 추진력 있게 밀어붙인 개혁의 결과였다. 그래서 엄밀한 시험으로 학생들을 뽑는 왕립고등학교와 왕립종합대학을 거쳐 산하기관에 두기로 하였다. 보통 산하기관에 들어오려는 사람들은 좀 똑똑하다 싶은 평민이나, 수도에서 일자리를 갖고 싶은 지방 영주의 자식들이었다. 특히나 대학의 경우 산하기관의 부장들이 직접 학생들을 가르치며 부하 직원으로서의 가능성을 보라는 제도는 꽤나 합리적이어서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산하기관이 절대 낄 수가 없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정치였다. 정치만은 귀족의 영역이었고, 통치는 왕족의 영역이었다. 산하기관은 말 그대로 국익을 위해 일만 하는 곳이었다. 다만 왕권이 점차 귀족들에게 밀려 쇠약해지기 시작하면서 왕들은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산하기관의 권력에 점차 힘을 실어 주기 시작했다. 원칙상 산하기관에 들어온 평민들은 모두 귀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다는 법령이 들어온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산하기관에서 딱히 영향력을 가지는 일은 별로 없었다. 특히나 가장 왕족의 지원을 많이 받고 대우가 좋은 수사국의 경우 ‘왕족의 개’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왕족은 산하기관에서 귀족에게 대응할 정보나 힘을 얻고, 반대급부로 산하기관은 왕족에게서 비호를 받는 날들이 이어지던 때에 역사적인 사건이 생긴다. 카를 왕이 행정국의 직원과 결혼을 선포한 것이다.
그동안 왕의 결혼은 항상 귀족의 여식하고만 이루어졌다. 그리고 태자가 아닌 나머지 자식들은 외국인과 결혼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기본적으로 아메탄은 일부일처제였지만, 왕과 태자만은 몇 명의 첩을 거느릴 수 있었다. 그런데 카를 왕이 행정국의 직원을 첩도 아니고 왕비로 올리며, 귀족들에게는 ‘산하기관의 직원은 귀족에 준하니 원칙상 틀린 것이 없다.’라고 선언해 버렸다.
한때 행정국의 직원이었던 왕비 이브나는 왕비가 되어서도 행정국에서 근무를 계속하여 국장까지 올랐다. 그녀가 카를의 동의를 받아 산하기관의 윤리를 세운 것은 아메탄 역사에 커다란 한 획이었다. 그녀의 생각에 산하기관은 진실과 법칙을 따르는 곳이지 왕에게 무조건적인 복종을 하는 곳이 아니었다. 예전에는 왕이 그릇된 일을 하더라도 수사국에서 모두 덮어 주곤 했다. 그러나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이 이브나의 신념이었고, 그녀는 평민을 대표하고 있는 산하기관은 당연히 귀족과 왕족을 감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생긴 것이 산하기관의 기본 윤리이다. 기본 윤리에 따르면 그들은 왕족과 무조건적으로 분리되고, 오로지 객관성과 전문성을 위해 움직여야만 했다. 온갖 정치적인 이해관계 이전에 진실과 학문이 있어야 한다는 이브나의 친필을 보며 리젠은 새삼 또 감동했다. 이런 글들을 볼 때마다 직업의식도 생기고 소명감도 왠지 차오르는 듯했다.
특히나 수사국은 왕족과 가장 밀접하고 여러 정치적 이해관계가 달린 곳이지만, 절대적으로 후대를 위해 진실을 감추는 전례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서술되어 있었다. 그 이후 수사국의 여러 가지 비기 등이 왕족에게도 공개가 되지 않는다는 문장을 읽으며 리젠은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신념이 부장에서 국장으로 올라갈수록 더 투철해지는 것 같았는데,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객관성과 전문성.”
르엘라도 언제나 했던 말이다. 우리의 연구가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언제나 주시하고, 원칙에 맞추어 행동할 것.
“진실과 학문.”
리젠은 이브나의 글을 읽으며 중얼거렸다. 이브나는 체계를 중시하는 행정국 직원답게 모든 부서에 맞추어 기본 윤리와 원칙을 철저하게 적어 두었다.
“정치적인 판단을 하려고 하지 말 것. 가치 판단 위에 항상 진실을 둘 것. 사람의 특성을 믿지 말고, 결론을 정해 둔 뒤 일을 시작하지 말 것. 어떠한 외부 압력이 있더라도 사실을 은폐하지 말 것. 으아, 멋있다.”
거의 대다수가 당시의 왕족과 긴밀한 관계에 있던 수사국에 걸리는 원칙들이 많았다. 딱히 시험에 나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 리젠은 원래 수사국에 가고 싶었기 때문에 관심 있게 읽었다.
“진실은 하나이고 사람의 생각은 오류가 가능하므로, 보고 싶은 것만 보며 멀쩡한 증거를 외면하지 말 것. 벽에 부딪혔을 때에는 정보가 부족한 것이므로, 최대한 정보를 더 모으고 합리적으로 연결고리를 찾아 퍼즐을 맞춰 볼 것. 범인 선상에 사건으로 인해 이익을 보는 사람을 올리되 수사하는 자가 모든 것을 알 수 없음을 명심할 것.”
리젠은 혼자 몸을 떨며 코를 찡긋했다.
“아아, 내가 이래서 수사국에 가고 싶었다고. 멋있어, 멋있어. 재밌기도 하고.”
그녀는 시험공부를 끝내고 소파에 가득 쌓여 있는 옷을 치우며 다리를 뻗어 앉았다. 카이든이 오면 항상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게 잠들곤 했다. 그리고 아주 한심하다는 눈으로 지저분한 집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곤 했다. 그제야 리젠은 누군가를 집에 들인다는 것의 위험함을 알게 되었다.
“하여간 똑똑한 자식.”
너무 사적이고 개인적인 공간에 추억을 만들면, 남은 사람이 그 흔적 때문에 너무 마음이 허전해진다.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남자는 함부로 들이면 안 되는 거였는데.”
그녀가 괜히 툴툴대며 하품을 하려는 순간, 밖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천천히 몸을 풀며 일어났다. 다니엘이 아무리 호위 무사들을 잔뜩 붙여 줬다고 해도 그녀는 자신이 언제든 위험에 처할 수 있음을 잊지 않고 있었다. 어쨌든 왕족의 싸움에 휩싸인 이상 그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마치 고모의 죽음이 5년이 지난 지금까지 누구의 주목도 받지 않았던 것처럼. 그녀는 조용히 바지로 갈아입고, 호신용 단검을 찾아 쥐었다. 여러 가지 훈련을 받는 수사국 직원은 아니어도, 약제국 입사 후 체력 단련을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쉽게 잡혀 줄 생각은 없었다.
그녀가 심호흡을 하고 있을 때, 다락방 창문을 통해 들어왔는지 피를 뚝뚝 흘리며 호위 무사 중 하나가 들어왔다. 리젠은 별로 놀라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