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수사국에서는 여러 가지 비밀 훈련을 시킨다. 카이든은 맨 처음 입사했을 때 정말로 죽는 줄 알았다. 잠입수사를 대비한다며 잠을 제대로 못 자는 건 기본이거니와, 며칠 동안 굶기는 훈련도 받았다. 마력을 온몸에 분산하여 사람이 정상적으로 뛸 수 없는 높이를 뛰는 도약을 하기도 하고, 인기척을 숨겨 주변에 동화되는 훈련도 받았다.
그는 마력을 온몸에 운용하며 기척을 숨긴 뒤 다시 캐서린의 상점에 몰래 들어갔다. 무한히 있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마력이 허용하는 한 가만히 있으면 여러 가지 정보가 얻어 걸리곤 했다. 이렇게 흔적을 지우고 잠입하는 것은 수사국에서만 왕족들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비밀로 전해지는 비기이며, 카이든도 서약에 따라 자신이 이런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다니엘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만일 수사국 직원들이 이렇게 자신의 기척을 완전히 숨길 수 있어서 사실상 그 누구도 감시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사회에 큰 혼란이 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죄송해요. 아직 다 못 모았어요.”
캐서린은 어떤 남자에게 사정하는 중이었다. 그들이 대화는 속삭임으로 이루어져서, 카이든은 온 신경을 귀에 집중해야 했다.
“옛날처럼 그렇게 마법사들이 많지 않다니까요. 5년 동안 확 줄었어요. 그렇다고 불법적인 건데 아무한테나 권할 수 없으니까, 신중하게 골라야 하잖아요.”
“그래도 마음이 급하시니 최대한 빠르게 모으도록 해. ‘의심의 기간’도 3주밖에 안 남았어.”
“아니, 다니엘이 왕위에 오르신다는 보장도 없잖아요? 윌리엄 태자님을 죽인 증거가 나올 리 없는데.”
“안 오른다는 보장도 없지.”
카이든은 눈을 크게 떴다. 캐서린과 이야기하고 있는 남자의 얼굴에 크게 찍힌 상처가 있었다.
“그 여우 새끼가 생각보다 수완이 좋아서 윌리엄 쪽의 귀족들을 꽤 포섭한 모양이야. 왕비님이 불안해하신다. 어차피 ‘의심의 기간’의 ‘최종 재판’ 때 별다른 걸 갖고 오지는 못할 것 같지만…… 혹시 모르니 모든 사태를 대비해 둬야지.”
“알았어요. 마법사들을 더 모아 볼게요. 뭐, 대다수의 마법사들은 마력 고갈 때문에 거의 미칠 지경이라고 하니 약제국에 신고하느니 한번 먹어 보는 걸 선택할 것 같긴 하거든요.”
“그래. 좀 천천히 해도 되긴 해.”
남자가 턱을 손으로 쓸며 말했다.
“어차피 재료도 다 못 모았잖아.”
“그 계집애 피를 아직도 못 받은 거예요?”
카이든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다니엘이 호위 무사를 잔뜩 붙여 놨어. 걔한테 붙은 게 자그마치 다섯 명이야, 다섯 명. 미친 거 아니야? 어지간히 아끼나 봐. 약효는 좋겠어.”
“다섯 명? 본인한테도 그만큼 안 붙어 있지 않아요?”
“그래서 지금까지는 거의 접근도 제대로 못했어.”
“참 나. 일개 연구원한테 다섯 명이라니. 그년 상판대기 한번 보고 싶네. 얼마나 반반하면 왕자가 정신을 못 차린답디까?”
“그냥 그래. 예쁘장하기는 한데 그런 애야 많지. 근데 아주 괴팍하고 보통내기가 아니야. 연구원이라고 해서 엄청 쉽게 생각했다가 엿 먹었었지.”
그가 자신의 찍힌 상처를 가리키며 으르렁거렸다.
“그 집안 내력인가 봐.”
“하긴,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 엄청 웃기지 않아요?”
캐서린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형제가 결국 각자 고모랑 조카에 꽂힌 거 아니야?”
카이든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도저히 추론이 불가능한 대화였다. 형제라면 윌리엄이나 루벤을 말하는 거고, 고모라면 르엘라를 말하는 것 같은데 대체 어떤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럼 어쩌게요? 그년 피가 없으면 말짱 도루묵일 텐데.”
“다섯 명이 붙었음 열 명으로 치면 되지.”
그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일이 좀 시끄럽게 되겠지만, 일이 급하니 이젠 이쪽도 어쩔 수 없어. 애초에 얌전히 기절해서 피만 흘려 줬으면 본인도 편했을 텐데 계집애가 제 무덤 판 거지, 뭐. 죽일 수는 없고, 내 얼굴을 이렇게 만든 이상 죽기 직전까지라도 난도질해야지. 뒷감당이야 왕비 마마가 다 해 주실 테고 말이야.”
“물어볼 거 있어.”
늦은 밤, 다니엘의 궁에 금발 머리를 길게 늘어트린 아셰가 비밀의 길을 통해 들어왔다. 다니엘은 서류를 뒤적이고 있다가 차분히 책 속에 감추고 문을 열어 주며 싱긋 웃었다.
“아, 아셰. 잠시 기다려. 차라도 끓여 줄게.”
“필요 없어.”
그녀가 테이블에 앉아서 팔짱을 끼고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다소 황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나 다니엘은 별로 놀라는 것 같지도 않았다. 아셰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두 가지, 두 가지만 대답해 줘. 그리고 부탁 두 개만 들어주기.”
“대답은 할 수 있는데 부탁을 무조건 들어주겠다는 말은 못하겠어.”
“그래? 그럼 내가 뭘 원하는지 똑똑히 알아 줬으면 좋겠어. 그거면 돼.”
“그래.”
윌리엄과 다니엘, 아셰는 항상 사이가 좋은 남매였다. 특히나 동갑내기였던 다니엘과 아셰는 학교까지 같이 다니며 언제나 붙어 다녔고, 정말 친하게 지냈다. 어떻게 보면 아무런 기반 없던 아셰가 이렇게 당당하게 다닐 수 있는 것도 모두 다니엘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아셰와 다니엘은 동갑이라는 이유만으로 왕족들이 받는 교육을 같이 받았고, 다니엘은 누군가를 후궁의 자식이라고 해서 무시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다니엘과 친해진 아셰는 자연스럽게 그와 어머니가 같은 윌리엄과도 가까워졌다.
“첫째. 한스팀의 왕자한테 나와의 혼담을 얘기했다는 게 사실이야?”
“사실이야.”
다니엘이 순순히 말했다. 그의 편안한 표정을 보며 아셰가 다그쳐 물었다.
“대체 왜?”
“알아보고 싶은 게 있었어. 그냥 희망만 준 수준이고 확답은 안 했지. 정말로 널 거기에 보낼 생각은 딱히 없어. 네가 가고 싶다고 하면 당연히 보내 주겠지만.”
“그럼…… 그냥 미끼였던 거야? 나와의 혼담이?”
“그래. 자연스럽게 부르기 위한 거였어.”
아셰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자신과 아무런 상의도 없이 혼담을 확실히 했다면 당연히 화가 날 일이었지만, 그저 이야기만 한 수준이라면 그 정도야 기꺼이 이용해 줄 의사가 있었다. 어차피 왕위 계승 순위에서 먼 왕녀가 혼담을 미끼로 이용당하는 건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그녀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혼담이야 들어오든, 오빠가 골라 혼담을 넣든, 그런 건 상관하지 않을게. 그런데 나랑 약속 하나만 해 줘.”
“들어 보고.”
“그중 최종으로 고르는 건 내가 했으면 좋겠어. 그 정도 선택권은 줄 수 있잖아?”
“…….”
“다니엘, 그 정도는 내가 오빠한테 부탁할 수 있는 것 아니야?”
“너는 내가 왕이 될 거라고 가정하고 얘기하는구나.”
“왕이 되겠지. 상식적으로, 국왕이 죽은 날 태자가 죽었고 그래서 갑자기 2왕자가 왕위를 물려받게 생겼어. 길 가는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 이상하잖아.”
“이상해도, 증거가 없으면?”
“증거가 뭐가 필요해? 그냥 ‘최종 재판’ 때 표만 많이 받으면 그만이지. 윌리엄 쪽 표 다 받고, 산하기관 쪽 표 다 받으면 충분해. 산하기관은 중립적이니까, 분명히 다 루벤의 편을 들기엔 찝찝하다고 생각할 거야.”
“……내가 죽으면?”
“무슨 소리야? 오빠가 왜 죽어?”
“왕비가…… 윌리엄도 죽였는데 왜 나를 못 죽이겠어?”
“사람 죽이는 게 그렇게 쉬워? 그것도 왕궁에서?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아셰가 턱도 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피식 웃었다. 다니엘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판에서 궁에만 있는 아셰는 딱히 도움도 방해도 안 되는 패다. 정보를 굳이 공유할 필요는 없었다.
“왕이 되면 굳이 나를 이용할 필요까지는 없잖아. 나는 왕족으로 자랐고, 그래서 내 이익을 위해서라면 남의 인생쯤이야 이용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렇지만 이 상황에서는 굳이 내 혼약까지 이용하지 않아도 돼. 최종 선택권은 내게 줘. 어차피 난 죽어도 제국 같은 덴 가기 싫으니 나중에 뒤통수치지 않을게. 그냥 난 조용한 나라에 얼굴 좀 반반한 남자를 골라서 죽은 듯 살 거야.”
“……알았어. 그 약속은 들어줄 수 있어.”
다니엘은 천천히 생각에 잠기더니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셰가 안심이 된다는 듯 웃으며 그제야 의자에 편하게 몸을 기댔다.
“다행이다.”
한숨과 함께 허탈하게 웃은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한스팀의 왕자는 너무 남자로서의 매력이 없더라. 제국 가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매일같이 그 피니 저주니 그런 얘기 들어야 되는 게 짜증날 것 같아. 차라리 말없는 남자가 낫겠어.”
“두 번째는 뭔데?”
다니엘의 인형같이 단정한 얼굴을 보고 있던 아셰의 눈에 장난기가 순간 확 어렸다.
“리젠 좋아해?”
“뭐?”
“리젠 하카트 좋아하냐고. 내 친구 좋아해?”
“그런 건 왜 물어봐?”
“오, 아니라고는 말 못 하네?”
아셰가 언제 그렇게 진지하게 혼담에 대하여 따져 물었냐는 듯이, 깔깔대며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당연히 내가 친애하는 오라버니와 나의 소중한 친구를 위해 사랑의 메신저 정도의 역할을 해 줄 수는 있다, 이거지.”
“무도회 끌고 온 건 네 짓이지?”
“미안하지만, 난 리젠의 마음은 모르겠어.”
아셰가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휘감으며 노래하듯 말했다.
“옛날엔 오빠의 마음은 모르고, 리젠의 마음은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반대인 것 같아. 오빠, 리젠 좋아하지?”
“왜 그렇게 생각해?”
“리젠을 기다려서 춤을 세 번이나 춘 것, 무도회 밤에 계속해서 내게 리젠 어디 있냐고 물어본 것, 비밀의 길을 가르쳐 준 것, 지금도 이렇게 리젠 얘기 나오니 표정 관리 못 하는 것.”
다니엘이 한숨을 쉬었다. 아셰가 키득키득 웃었다.
“다니엘, 내가 너를 몰라? 오빠가 한 번이라도 여자에 대해서 관심이나 가진 적 있었어?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하는 건 선수지만, 정작 관심은 전혀 없었던 게 오빠야. 그런데 리젠한테 비밀의 길을 가르쳐 줘? 딱 걸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