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256)

37화.

‘이게 내 일이야.’

리젠은 차분하게 생각했다.

‘사실은 윌리엄 태자가 죽든지, 다니엘이 왕이 되든지, 아셰가 누명을 쓰든지, 카이든이 복수를 하든지 다 무슨 상관이야. 잠시 목적이 겹쳐 손을 잡은 거지, 내게는 르엘라가 가장 소중해. 르엘라가 억울하게 죽었다면 밝혀내야 해. 다른 건 다른 애들이 알아서 하겠지. 좋은 동료는 무슨.’

그녀는 의자를 빙글 돌려 어지럽게 흩어진 르엘라의 메모들을 바라보았다. 카이든과의 꿈 연결을 끊기 위해 매일같이 이렇게 연구하고 있는 자신이 가끔 불쌍했지만 결자해지니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너를 어떻게 믿고?’

‘야, 카이든 루스, 지금 무슨…….’

‘물론 너를 믿기에 비밀리에 시약 분석까지 의뢰했지만, 모든 일을 털어놓을 정도는 아니야. 미안하지만 안 돼.’

처음, 르엘라의 일에 대하여 얘기를 했을 때 카이든도 그녀를 믿지 않았었다. 그의 차가운 눈빛과 단호한 거절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놀랍지도 않다. 요 근래에 카이든이 꿈속에서 몇 번 봤다고 친근하게 대해 준 거지, 학교생활을 5년 동안 하면서도 제대로 웃는 모습 한번 본 적이 없다. 그냥 원래 그런 애였다. 그러니까 요즈음 리젠의 눈앞에 안 나타나는 것도 당연하다. 어디 다치거나 한 건 아닌지 걱정되는 마음을 리젠은 애써 누르며 입술을 깨물었다.

‘카이든, 같이…….’

‘……갈 길이 바빠. 혼자가 빨라.’

그깟 궁에서 나가는 길이 얼마나 길다고! 뭐 그렇게 빨리 혼자 가고 싶어서 그녀의 말도 끊어 버리고 뒤도 안 돌아본 채로 떠났는지. 그 뒷모습 이후로 며칠 동안 계속 못 보고 있는 상태였다. 리젠은 펜을 들었다.

그래, 혼자 해. 혼자 한다고. 나도 혼자 할 수 있다고. 해독제도 혼자 만들 거고, 르엘라의 일도 혼자 조사할 거야. 너만 혼자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나도 원래, 혼자서 엄청나게 열심히 잘 해 왔다고.

‘어둡고 외롭고 힘들던 길에…… 누군가 손 내밀어 줄 사람이 있다고…….’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혼자 가서 연락도 안 할 거면, 왜 그딴 말은 해서 사람 마음만 뒤집어 놓았는지…….

‘그런데…… 다른 어둠 속을 꿋꿋하게 혼자 걸어가는 너를 봤어.’

왜, 왜 그렇게 다정한 말들을…….

‘……같이 걷고 싶더라고.’

그녀는 기껏 들었던 펜을 던져 버리고, 고개를 파묻고 엎드려 버렸다.

리젠은 카이든의 손을 붙잡고 암흑 속을 걷고 있었다. 전에도 이런 기억이 있다. 다니엘의 궁으로 가는 비밀 길이다. 리젠은 꿈인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오랜만에 카이든과 자는 시간이 겹친 것이다. 차갑게 나가 버리고 연락조차 없는 그가 그동안 그렇게 짜증이 났었는데, 또 막상 꿈에서 만나니 반가웠다.

“왕자님 궁으로 가는 거야?”

“아니.”

“그럼 어디로 가는데?”

“몰라.”

뭐 이렇게 말이 짧아? 리젠은 뭐라고 한마디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하기엔 이게 원래 그의 모습이다. 사실 그동안 그답지 않게 지나치게 그녀에게 친절했을 뿐이다. 그녀는 캄캄한 암흑 속을 걷다가 좀 숨이 차는 것 같아 다시 말을 걸었다. 분위기가 무거울 때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것은 그녀의 전공 분야였다.

“너 길 잃은 거 아니야? 여기서 길 잃으면 굶어 죽는다며. 한번 잘못 들면 함정 같은 것도 있다며? 나 너 믿고 막 이렇게 가도 되는 거야?”

“…….”

“나 아직 못 죽는다. 동반 자살 길 아니지, 이거? 내가 말이야…… 사실 삶에 대한 열정이 꽤 남다른 편이거든. 학교 다니면 1등 해야 하고, 약을 먹었으면 해독제를 만들어야 하고, 약제국에 갔으면 희대에 한 획을 그을 약을…….”

“리젠.”

그가 걸음을 멈췄다.

“죽기 싫어?”

“당연한 거 아니니? 내가 왜 죽어?”

암흑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카이든이 뒤를 돌아서 그녀의 앞에 선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나랑 여기서…… 그냥 영원히 이렇게 있을래?”

그가 머뭇거리다가, 한순간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아니. 난 할 일이 있는데.”

리젠이 쿡쿡대며 웃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놔줄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내가 안 놔주면 어떻게 할 거야?”

“뭐?”

“여기서 그냥 이렇게 있자. 다니엘한테 가지 말자.”

“무슨 소리야?”

그의 입술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 어느 때보다 거친 키스에 그녀는 숨이 막혔다. 그가 리젠의 머리를 두 손으로 아프게 잡았다.

“이제 지쳐.”

“야, 다 왔는데, 거의 다 왔는데 뭐가 지쳐? 이제 ‘의심의 기간’도 한 달도 안 남았어.”

“다 싫어.”

“아야!”

거칠게 밀고 들어오는 혀 때문에 이가 부딪혔다. 그녀가 비명을 질러도 그는 멈추지 않고 손을 내려 그녀의 등과 엉덩이를 꽉 쥐었다. 그가 그녀를 쓰러트렸다. 바닥에 부딪혔는데도 꿈이어서 그런지 아프지 않았다. 그의 손이 거칠게 그녀의 옷 속으로 들어왔다.

“카이든…… 나 지금 이런 거 할 기분이 아니야.”

잠시 그의 몸이 떨어지자, 리젠이 간신히 중얼거렸다. 리젠은 딱히 반항하지는 않았지만, 한숨을 쉬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별로…… 읍!”

그녀의 벌어진 입으로 그의 혀가 들어왔다. 암흑 속이어서 몰랐다. 그녀의 두 손을 한쪽 손으로 붙잡은 채로 그가 그녀의 치마를 들치고 속옷을 내렸다. 숨이 막혀서 살짝 캑캑대는데, 그녀의 아래쪽으로 자극이 느껴졌다. 

“으으으으읍!”

그녀가 순식간에 느껴지는 쾌락에 허리를 튕겨 냈다. 그가 입술을 댄 채 속삭였다.

“그냥 나랑 여기서 멈추자.”

그의 손이 그녀의 옷 속으로 들어와 가슴을 세게 쥐었다.

“다 때려치우자.”

“카이든, 왜 이래?”

“여기에 너 가두면, 너 아무 데도 못 가니까…….”

그녀는 등에 차가운 바닥을 느끼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가 살짝 그의 가슴을 밀어내는데 그가 말을 이었다. 

“영원히 둘이 있자.”

그의 손이 다시 그녀의 여성 깊숙이 들어와 세게 자극하기 시작했다. 단단히 선 작은 돌기를 따라 원을 그리며 꾹 눌렀다. 그녀의 다리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지금 이 길을 계속 걷다 보면…….”

“아, 하지 마…….”

“너는 다니엘에게 갈 거잖아.”

“아…….”

“못 보내.”

절정에 이른 그녀의 눈앞이 하얘졌다. 뭔가, 더 대단한 기분이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의 등을 감싸 안은 그녀의 손가락 마디에 순간적으로 힘이 빠져나갔다. 축 늘어진 그녀의 몸에 짧은 키스를 반복하며 그가 계속 중얼거렸다.

“나 돌아 버릴 것 같아. 네가 다니엘과 춤을 출 때, 눈이 뒤집힐 것 같았어.”

그가 그녀의 몸을 돌려 위로 포개 엎드렸다. 그녀의 다리 사이로 그의 성기가 밀고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거기까지는 안 돼! 리젠이 다리를 한껏 오므렸다.

“미쳐 버릴 것 같아. 네가 다니엘과 사랑하는 사이라고? 그래서 피를 가져가려고 한다고?”

리젠이 고개를 젓는데도 그가 억지로 그녀의 다리를 벌렸다. 그녀가 손으로 필사적으로 막았다. 힘이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는 싫어! 아무리 꿈속이라고 해도 아직 카이든에게 풀리지 않은 감정이 있었다. 그녀에게 차갑게 돌아선 그 뒷모습에 이상하게 상처 받은 그대로였기 때문에, 리젠은 거칠게 반항했다. 게다가 지금 르엘라의 생각 때문에 충격 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진심으로 이렇게 있고 싶지 않았다.

“가지 마. 나한테 와.”

그녀는 카이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는 채, 정신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전혀 배려하지 않는 남자의 완력이 무서웠다. 

“카이든, 제발!”

리젠이 소리를 질렀다.

“하지 마! 하지 말란 말이야!”

그의 손이 멈췄다. 그녀가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싫어, 싫다고! 하지 마!”

그녀가 거의 울면서 애원하다시피하며 몸을 웅크리자 카이든이 순간 몸에 힘을 툭 뺐다.

“……미안.”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눈물이 났다. 그녀의 몸을 누르던 무거운 체온도 사라졌다. 순식간에 뭔가 허전해졌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 상태에서, 리젠은 엉망인 자신의 꼴을 상상하며 엉금엉금 일어났다. 카이든의 목소리가 있는 쪽으로 기어서 그를 안았다. 그는 그저 가만히 주저앉아 있었다.

“대체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카이든이 몸에 힘을 빼고 중얼거렸다.

“으으으…….”

리젠은 자신도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그를 끌어안고 울었다. 그녀의 뜨거운 눈물이 그의 어깨에 뚝뚝 떨어졌다.

“……무서웠어, 무서웠단 말이야.”

리젠이 중얼거리며 끅끅대고 울었다. 그러면서도 왜 그를 놓을 수 없는지, 그의 체온을 느끼는 게 좋은지 알 수 없었다. 꿈속은 항상 알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그녀는 자신을 놓아 버리며 그냥 울었다. 사실은 르엘라가 흑마법의 희생자인 것 같다는 의혹이 들었을 때부터 울고 싶었다.

우는 건 아무것도 해결을 해 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감정에 따라 우느니 차라리 메모 한 번을 더 보는 것이 도움 된다고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보니 점점 더 울지 않게 되었고, 사실은 울어 봤자 이제 위로해 줄 사람도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혼자만의 감정을 갈무리해야 한다면 우는 건 시간 낭비라고만 여겼을 뿐이다.

그런데 꿈속이어서 그런지, 자꾸만 눈물이 흘렀다. 그동안의 모든 서러움과 막막함이 폭발하여, 그녀는 아무 말도 없는 카이든을 끌어안고 정말 영원히,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영원히 울 것만 같았다.

카이든은 눈을 떴다. 잠시 눈을 붙였다가 리젠의 꿈을 꿨다. 그녀의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동분서주하며 수사에만 힘썼는데 잠깐 잤다고 그녀의 꿈이라니. 내용도 완전히 기분이 더러웠다. 싫다는 리젠을 억지로 범하려고 했다가, 그녀가 반항하면서 하염없이 우는 꿈이었다. 그가 피곤한 눈을 잠시 감았다가 일어났다.

얼굴만 안 보면 그래도 좀 잊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오히려 더 생각났다. 그래도 지금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벌떡 일어서서 길을 나섰다.

캐서린의 작은 마법 약 상점은 겉으로 보기에만 허름했지 안으로 들어가면 상상하지도 못할 공간들이 있었다. 카이든은 지금 뜨내기 마법사로 변장을 하여 그 마법 약 상점의 단골이 되려고 하는 중이었다. 그는 그 상점이 무언가 일이 벌어지는 중심이 되는 장소라는 생각을 했다. 그때 지한이 읊은 흑마법에 필요한 재료들도 몰래몰래 유통되고 있었고, 리젠이 말해 준 마력증폭약의 재료들도 천천히 다 끌어오는 중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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