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사파엘은 약제국의 불을 끄고 퇴근하려다가 혼자 남아 온갖 메모를 펼쳐 놓고 공부 중인 리젠을 보고 흠칫했다. 당연히 보고서를 쓰느라 자신이 제일 늦게 퇴근하는 것일 줄 알았는데, 숨소리도 내지 않고 리젠이 무언가를 공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파엘은 어깨 너머로 리젠의 책상을 보고, 그 모든 것이 르엘라의 메모임을 눈치챘다.
“그러다가 르엘라가 남긴 자료 네가 다 보겠다. 우리는 보려고 해도 당최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모아 놓기만 했는데.”
“이러려고 저 데리고 오신 거 아니에요? 엄청 섭외하셨잖아요.”
“뭐, 그런 의도가 있긴 했지.”
한때는 리젠의 교수님이었고, 이제는 직장 상사인 사파엘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고지식하고 원칙주의적인 성격이었지만 그것 빼고는 그녀에게 언제나 다정한 사람이었다. 르엘라의 굉장히 친한 동료였다고도 들었다. 요즘 들어 르엘라의 죽음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했다. 르엘라가 죽었을 때, 사파엘은 말도 안 되는 죽음이라며 펄펄 뛰었다. 분명히 무슨 이유가 있을 거라고 온갖 시약 반응을 다 해 보았다. 그만큼 르엘라를 아끼던 사람이니 리젠을 예뻐할 수밖에 없겠지.
‘고모는 참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구나.’
리젠은 큰 눈이 툭 튀어 나오고, 깡마른 왜소한 몸에 갈색 단발머리였던 고모를 생각해 보았다. 30대 중반이 되도록 집에 데려오는 남자가 없었다. 리젠을 키우느라 그랬는지, 아니면 아예 남자에 관심이 없었는지 알 수 없었다. 아셰도, 사파엘도 그녀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것을 보면 집뿐만이 아니라 바깥에서도 인격이 훌륭했나 보다. 르엘라는 리젠이 자라서 그녀를 평가할 수 있는 나이가 되기도 전에 미쳐서 죽었다. 그것이 리젠은 정말 안타까웠다.
“근데 무슨 바람이 불어 약제국에 온 거야? 절대 약제국은 안 오겠다더니.”
“음, 그냥요.”
리젠이 헤헤 웃었다.
“막상 졸업할 때 되니까 고모의 뒤를 잇고 싶지 뭐예요? 집에도 고모 흔적들이 많아서 공부하기 좋았는데, 여기는 말도 못하게 많네요. 저 이제 실력도 엄청 늘었어요.”
“좀 미심쩍지만 넘어가 준다. 어쨌든 약제국에서 열심히 연구하는 모습이 보기 좋으니까.”
“고모도 그랬어요? 맨날 이렇게 열심히 연구했죠?”
“그랬지. 그냥 연구 자체를 좋아했던 것 같아. 약제국 일 말고는 아무 곳에도 관심이 없었거든. 아, 너 키우는 거. 육아책 열심히 들여다보던 기억은 있다. 그 외엔 맨날 약초학밖에 머리에 없었어.”
“역시. 그럴 것 같았어요.”
그녀가 펜을 한 번 굴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사파엘이 옛날 기억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리젠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기, 부장님.”
“왜?”
“사실 저 이상한 소리를 들었어요.”
“뭐?”
“제가 주제도 모르고 첩년 짓 한다고요.”
“누가 그래? 무슨 소리야, 그게? 아니, 너 요새 연애하니? 어떤 남자를 만나길래 그딴 소리를 듣고 다녀?”
사파엘이 심각하게 캐물었다. 리젠은 재빨리 말했다.
“근데 그게 고모를 닮아서래요.”
그녀는 사파엘의 표정이 완전히 굳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사파엘은 대답을 하지 못할 정도로 놀란 것 같았다. 리젠이 사파엘의 손목을 황급히 붙들었다.
“부장님, 부장님은 아시죠. 이게 무슨 소리예요?”
“몰라.”
사파엘이 입술을 깨물며 다시 냉정하게 말했다.
“헛소리야.”
“교수님, 제게는 정말 중요한 문제예요. 교수님은 제가 왜 공부 열심히 하고, 고모가 죽은 그 다음 날에도 학교에 나왔는지 아시잖아요. 그게 제가 정말 괜찮아서 그랬겠어요? 고모가 가르친 대로, 그렇게 살려고 그랬다고요! 제가 고모처럼 천재 아니라는 거 아시잖아요. 그래도 고모처럼 되려고 시험 기간마다 밤을 샜는데!”
“나는 전혀 모르는 일이야.”
리젠의 말에 감정이 실려도 사파엘은 르엘라에 대해 말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녀가 리젠의 손을 떼고 천천히 일어났다.
“너무 늦게까지 하지 말고 가. 내일도 출근해야 하는데.”
“이모!”
리젠이 그녀의 뒷모습에 대고 소리쳤다.
“이모라고 부르라며! 르엘라의 조카면 이모한테도 조카라며! 왕립고등학교 들어가면 가방도 사 준다고 했잖아! 나 그 책가방 여전히 집에 있는데…….”
사파엘이 걸어가다가 문득 멈춰 섰다.
“그 꼬맹이가 커서 이모 제자가 되고, 직원이 되었는데…… 이젠 직장 상사라고, 이 정도의 개인적인 부탁도 못 들어주는 거예요? 다른 것도 아니고 르엘라 하카트의 일인데?”
리젠이 숨을 몰아쉬었다. 사실 르엘라와 사파엘은 꽤나 친했기 때문에, 종종 사파엘이 어린 그녀를 안고 ‘이모라고 불러!’라며 함께 놀아 준 적이 많았다. 그때의 사파엘은 막 성년이 된 르엘라만큼이나 어렸었다. 시간이 흐르며 그들의 사이가 딱딱해진 것은, 그녀를 대학에서 교수로 만났을 때였다. 원칙주의자인 고모를 닮은 리젠은 사파엘을 ‘고모의 친구’가 아닌 ‘교수님’으로 대하기 시작했고, 르엘라와 똑같은 성격임에 분명한 사파엘 역시 그녀를 다른 학생들과 절대 차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리젠.”
사파엘이 뒤를 돌아보지 않아서 리젠은 그녀의 표정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게 다 지난 일이야.”
“…….”
“진실이 뭐든 간에 굳이 들춰낼 필요 없어. 너는 네 인생을 살아. 이미 모든 건 다 끝났어. 누구를 위한 진실이야? 그런 것 몰라도 우리는 잘 살았잖아. 우리 기억 속에 르엘라가 좋은 사람이면 그걸로 됐어. 나는 이제 더 이상 궁금하지도 않아.”
“어떻게 그래요?”
리젠이 조용히 대답했다.
“대체 어떤 일에 어떻게 연루되어서 어떻게 미쳤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사파엘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르엘라는 죽었어. 그 어떤 것도 그녀를 다시 살리지는 못해. 이미 죽은 사람이야. 죽었는데, 이미 죽었는데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야? 잘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들쑤셔서 르엘라의 명예만 추락시키지 마.”
“진짜 자연사가 맞는지도 모르겠는데!”
“자연사 맞아!”
사파엘이 뒤를 돌아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도 이상해서, 믿기지 않아서 몇 번이나 확인했어. 죽었을 때 온갖 시약을 다 집어넣어 봤다고. 왕족이라는 족속들이 도대체 그녀를 어떻게 이용했을지 나 같은 사람은 짐작도 안 돼서!”
“…….”
왕족이라는 말에 리젠의 눈이 떨렸다.
“너도 이상해서, 5년이 되자마자 득달같이 르엘라의 유골을 가져간 것 아니야?”
“……네?”
리젠은 머리를 쾅 하고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완벽한 성분 분석은 죽은 지 5년이 넘어야 해. 그전에는 고유의 마력 때문에 정말 얕은 분석밖에 할 수가 없잖아. 2주 전이 르엘라가 죽은 지 딱 5년이 되는 날이었지. 나도 다 해 봤다고. 나도 가져가서, 다 해 봤는데, 역시 아무것도 안 나와. 자연사라고.”
“……잠시만요. 제가 고모의 유골을 가져갔다고요?”
“내가 갔을 땐 이미 무덤 뒤를 파헤친 흔적이 있던데, 당연히 너 아니야? 감쪽같이 흙으로 덮어 놓긴 했지만, 다시 파니까 우르르 무너지더만. 유골의 양도 눈에 띄게 적고.”
리젠의 심상치 않은 표정을 보고 사파엘의 어조가 조금씩 누그러들기 시작했다.
“……당연히 리젠, 너라고 생각했는데…… 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줄 알고…… 그래서 자꾸 르엘라의 온갖 기록들 뒤지고 있는 것 아니야? 르엘라는 일기를 열심히 썼으니까…….”
“누가 고모의 유골을…… 가져간 거죠?”
“네가 아니라면…… 누구지?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인가?”
리젠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또, 이게 설명하기 복잡한데…… 좀 연속적인 저주예요. 5년에 한 번밖에 할 수가 없거든요. 왜냐하면 그 저주로 사람이 한 명 죽으면, 5년이 흐른 그 시체의 유골이 또 다른 살인 저주의 재료가 돼요. 5년이 지나야 유골의 마력이 좀 빠지니까요. 그러니 5년에 한 번밖에 할 수 없다는 최악의 시간 조건을 갖고 있어요.’
상상하기조차 싫은 가정이 그녀의 머릿속에 퍼즐로 맞춰지고 있었다. 르엘라의 유골이 또 다른 흑마법의 재료로 쓰일지도 모른다는 말은, 5년 전 흑마법에 의해 희생된 사람이 르엘라일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한 명이라도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가 아예 무용지물이 되고, 서로 마음이 깊지 않으면 다리 한쪽 정도나 잃겠죠. 서로 엄청나게 많이 사랑하면 아무런 티도 안 나고 자연사가 가능해요.’
만일 르엘라가 그 흑마법으로 죽었다면, 도대체 그녀와 서로 엄청나게 많이 사랑하던 그 남자는 또 누구란 말인가. 르엘라는 전혀 남자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녀가 알기로 집과 약제국 이외에는 드나들지도 않았다. 그녀는 밀려오는 피로감에 눈을 감았다.
“리젠.”
“네?”
“네가 르엘라의 흔적을 찾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어. 하지만 조언 하나만 할게.”
사파엘이 다시 뒤를 돌아 천천히 멀어지며 말했다.
“학창 시절부터 왕족들과 친했던 건 알아. 하지만 왕족들은 우리랑 다른 인간들이야. 그들은 정치적인 필요를 위해서라면 몇 백 명이고 죽일 수 있는 사람들이고, 그걸 대의라고 생각해.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다스리게 되니까. 그건 그들이 어렸을 때부터 교육 받아 온 방식이므로 인격과는 무관해. 그들에게 필요에 의한 살인은 조금도 범죄가 아니야. 그 기본 가정을 이해하면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 거다. 아예 갖고 있는 가치관과 생각이 다르다는 얘기야.”
“…….”
“왕자님과 왕녀님을 너무 믿지 말거라. 그들은 선악을 떠나서 어차피 네가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사파엘마저 떠나고, 어둠이 내려앉은 약제국에서 그녀는 본능적으로 다짐했다. 르엘라에 관련된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 왕족이 연루된 일이다. 다니엘에게도, 아셰에게도, 카이든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추론해야겠다고 그녀는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