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그녀가 날카롭게 질문했다.
“이전의 유골이 계속 필요하다면, ‘최초의 저주’는 어떻게 걸어요?”
“그러니까 제가 불가능하다고 했잖아요.”
지한이 아주 학구열에 불타는 모범생을 바라보는 듯한 눈길로 리젠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최초의 저주를 위해서는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을 한곳에 몰아넣고 죽여야 돼요. 한순간 사람이 백 명 이상 죽은 땅의 흙이 필요하거든요. 그것도 그 지역의 흙은 한 사람밖에 못 죽여요.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어요? 사람 하나를 못 죽여서 백 명을 죽이는 게.”
지한은 다니엘과 리젠, 카이든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든 것이 단순히 흑마법의 잔인함에 놀라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원래 외국인들에게 흑마법의 잔혹함을 얘기하면서 옛날 한스팀의 위력을 자랑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이런 반응이 뿌듯하기까지 했다.
“아주 옛날에, 사막에 전쟁이 많았을 땐 그런 흙을 구하기 쉬웠대요. 그래서 모두가 그런 흙을 구해서 5년마다 한 명씩 사람을 죽였다는 고대의 기록도 있어요. 물론 마력이 아주 풍부했을 때의 이야기지만…… 그런데 요새는 제국과의 평화 협정으로 전쟁도 일어나지 않잖아요. 어제 같은 무도회에 불이라도 나지 않는 이상 요즘 같은 세상에 한 번에 백 명을 어떻게 죽입니까?”
“정리하면 다음과 같아.”
지한을 보내고, 다니엘이 차분하게 말했다.
“루벤 쪽에서 흑마법을 쓰는 상대는 나람. 한스팀에서는 동네 꼬마들도 다 저주를 할 수 있다니 당연히 나람도 할 수 있겠지.”
카이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원래도 무표정이었지만, 새까만 눈동자가 더 깊이 잠겨 있는 것 같았다.
“최초의 저주에 필요한 조건을…… 6년 전 서쪽 궁의 화재로 이뤘겠지. 100명이 넘게 죽었으니까. 마력은 르엘라의 마력증폭약으로 해결했을 거고.”
“……네.”
“가능성은 둘이야. 그 흙을 지금껏 갖고 있다가 윌리엄을 죽였든가, 5년 이전에 누군가를 죽이고 윌리엄을 죽였든가.”
“그 어떤 상황이어도 시간이 맞지 않아요, 왕자님.”
리젠이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윌리엄 태자님은 돌아가신 지 한 달이에요. 어떻게 윌리엄 태자님을 죽이고 또 왕자님을 죽이는 계획을 세울 수 있겠어요? 최근에 백 명 이상 죽은 사건도 없었는데.”
“그건 역시 이상해. 무언가……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거나, 잘못 가정한 것들이 있는 거겠지.”
다니엘이 아무 말도 없는 카이든을 향해 물었다.
“그들이…… 또 흑마법을 준비하고 있는 게 확실해?”
“아까 그 한스팀의 왕자 놈이 읊은 재료들이 모두 다 캐서린의 마법 약 상점에 모이고 있어.”
카이든이 피곤한 듯 자신의 눈을 쓸었다.
“그리고…… 준비하지 않는다면 왜 리젠의 피를…….”
리젠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카이든은 벌떡 일어섰다.
“일이 안 풀릴 땐 정보를 더 모아야겠지.”
리젠이 민망한 마음에 차를 마시다가 갑자기 일어난 카이든을 바라보았다.
“먼저 일어날게. 아무래도 그 상점에 다시 가 봐야겠어.”
“카이든, 같이…….”
“……갈 길이 바빠. 혼자가 빨라.”
그가 차갑게 말했다. 리젠은 왠지 서운하여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요 며칠 다정하게 굴어 줬다고 그 한마디에 그가 갑자기 멀게 느껴졌다. 그래…… 원래 저렇게 차갑고, 무표정한 남자였지. 다니엘은 별로 놀라지도 않은 것 같았다.
“부디 몸조심해.”
“그럼.”
카이든은 꾸벅 인사를 하더니 천천히 걸어 다니엘의 궁을 나갔다. 리젠은 티는 내지 않았으나 몹시 당황했다. 당연히 올 때 같이 왔으니 함께 나갈 줄 알았다. 물론 바쁘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자신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먼저 나가 버리는 카이든의 모습이 낯설었다.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가 버렸다.
“충격 받았나 봐.”
다니엘이 차를 마시며 조용히 말했다.
“부모님이…… 흑마법의 제물이라고 생각하면 당연히 충격이겠지.”
“그, 그런가요.”
“혼자 있고 싶어 한다는 뜻이야. 놔두면 돼.”
다니엘은 그와 오랜 친구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양 편안하게 말했다. 리젠은 불편한 한숨을 한 번 쉬고, 어색하게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리젠.”
“네?”
“나 좋아해?”
리젠은 하마터면 차를 쏟을 뻔했다. 손이 떨렸다. 그녀의 머릿속으로 오만 가지 생각이 오고 갔다. 마음 같아서는 모르겠다고 대답하고 싶었으나, 그만큼 바보 같은 대답이 없는 것 같아 망설여졌다. 말을 잇지 못하는 리젠을 보며 다니엘이 싱긋 웃었다.
“테스티가…… 왜 네 피를 구하려고 했을까?”
“으음…….”
그녀는 미친 듯이 머리를 굴렸다. 아셰와의 대화에서 단서를 찾아낸 리젠이 알겠다는 듯이 어색하게 외쳤다.
“아, 아셰가 그러는데, 왕자님과 춤을 세 번 춘 사람이 저뿐이었대요.”
“그건 그랬지.”
“그래서 그런 거 아닐까요? 아이고, 왕비마마가 뭔가 오해하신 게 분명해요. 왕자님은 그저 춤을 가르쳐 주시려고 그런 건데…….”
“그러면…….”
다니엘이 파란 눈에 웃음을 가득 담았다. 그가 턱을 괴고 리젠의 갈색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냥 네 피 줘 버려도 되는 것 아닐까? 한 명이라도 감정이 없으면 아무 효과가 없다며.”
“그, 그런가요?”
평소 같았으면 센스 있게 발랄한 대답으로 화제를 돌렸을 텐데, 리젠은 왠지 급격히 당황하여 바보 같은 소리만 하고 있었다.
“농담이야.”
그의 긴 속눈썹이 살짝 떨렸다.
“리젠, 몸조심해.”
“……네?”
“사실은…… 내가 널 안 좋아하면 모든 게 간단하게 끝날 문제인데,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니 나 혼자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이긴 하지만…….”
리젠의 갈색 눈이 커졌다.
“감정은 감출 수는 있어도 없앨 수는 없는 거잖아.”
“왕자님. 저, 저기…….”
“날 좋아하지 말라는 말은 하기 싫어.”
그가 턱을 괸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그 흑마법 정말 이상한 마법이네. 효과가 없는 방법이 존재하는데, 그걸 바라지 않게 되는 게 말이야.”
리젠은 심호흡을 했다. 생각할수록 이상한 마법이다. 만일 흑마법으로 죽기 싫으면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면 끝나는 잔인한 마법이기도 했다.
“왕자님, 저도 가 볼게요. 사실 저도 연구하고 있는 게 많아서 늘 바쁩니다.”
당황스러운 상황에서는 빨리 일어나는 것이 답이었다. 일어나는 리젠의 팔목을 다니엘이 부드럽게 잡았다.
“네 안전이 걱정돼. 아까 말했지만, 네 피가 그쪽에 들어가면 난 죽을지도 몰라. 호위 무사들을 붙여 줄게. 물론 평소에는 몸을 숨기고 있을 테니 네 생활에 불편함은 없겠지만…… 항상 보호 받고 있다는 느낌만 기억해.”
“……네.”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뭐, 카이든이 최대한 같이 있어 준다고…… 하기는 했는데…….”
“걘 바빠. 당연히 항상 네 곁에 있을 수 있을 리가 없지. 굳이 너까지 지킬 필요는 없다고 전해 줄게.”
“아…… 그렇죠.”
“그리고, 얼굴에 하이힐 자국 있는 사람들 찾아서 내 부하들이 열심히 움직이고 있어. 배후야 짐작이 가지만 그래도 물증을 위해. ‘최종 재판’ 때 완전히 다 밝혀 버릴 거야.”
“부하 많으시네요.”
리젠이 간신히 농담을 하며 웃었다.
“저는 카이든밖에 없는 줄 알았어요.”
“카이든은 친구이자 동료고.”
다니엘이 리젠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제 왕이 될 건데 부하야 열심히 부려야지. 옛날의 한량이 아니잖아. 테스티 정도의 힘을 상대하고 있으려면 꽤 바빠.”
“그 많은 부하들 실업자 만드시지 마시고 꼭 왕위에 오르셔야 합니다. 아셨죠? 카이든도 저도 줄 잘못 선 건 아니겠죠?”
“리젠.”
그가 웃고 있는 리젠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왕이 되면 지금보다 더 힘들어질 텐데…….”
“뭐, 그러시겠죠?”
“그때에도, 내 옆에서 이렇게 밝은 모습으로 있어 줄 수 있어?”
“……네?”
“내가 지칠 때마다…… 네게서 힘을 받아 가도 될까? 너의 위트 있는 한마디 정도면 되는데.”
“뭐, 한마디 정도라면 당연히. 약제국으로 오시면 되죠. 사파엘 교수님은 엄청나게 싫어하시겠지만.”
“아니.”
그가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여기, 나의 궁에서.”
부끄러운 듯 그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죽을 수도 있으니까 프러포즈는 지금 못하겠다. ‘의심의 기간’ 중에는 자연스럽게 파혼당할 만큼 한 치 앞도 모르는데 나도 참 급했네.”
“왕자님, 어, 저기…….”
“이 모든 건 지금 멈추자. 한 달 뒤, ‘의심의 기간’이 끝나고 얘기해. 내가 나도 모르게 못 참아 버렸어.”
그가 싱긋 웃었다.
“피 조심해. 뺏기면 안 돼. 나 죽을지도 몰라, 진짜로. 이젠 정말로 죽기 싫은데.”
“무슨 소리예요. 누구 좋으라고 죽어요, 왕자님이.”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을까, 철딱서니 없게.”
다니엘이 이런 말을 하는 자신이 웃긴지 계속해서 피식거렸다.
“저주의 대상이라는데, 죽을지도 모른다는데. 왜 설레는지 모르겠어.”
다니엘이 호위 무사를 붙여 줘서 그런지, 이제는 카이든이 밤중에 그녀의 집에 찾아오는 일이 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안부 한 번 물어오지 않는 그에게 약간의 서운함이 몰려오곤 했다. 꿈에서라도 보나 했는데, 역시 또 수면 시간이 제각각인지 나타나지 않았다.
며칠 동안 아예 카이든이 그녀의 집에 살다시피 해서 그런지 혼자만 있는 것이 적응되지 않았다. 함께라는 것은 정말 순식간에 익숙해지는 일이었는데, 혼자가 되는 것은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다. 왠지 혼자서 집에 있는 건 허전하기도 해서 리젠은 항상 약제국에서 늦게까지 남아 꿈 연결 시약의 해독제를 만들기 위한 연구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었다. 몇 가지의 난제만 풀면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요 며칠 카이든의 얼굴을 못 봤는데, 이제 꿈마저 끊기면 정말로 남남이 되는 건가. 함께 지한을 만난 날 이후로 대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리젠, 퇴근 안 해?”
“조금 더 연구할 게 있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