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256)

34화.

아셰가 처음 하는 자신의 이야기였다. 그동안은 거의 농담처럼 ‘우리 엄마는 왕궁의 꽃병이지.’ 정도로 웃어넘기곤 했기 때문이다.

“르엘라는 어린 내게 최초의 선생님이자 어른이었어. 작은 세상에 갇혀 있던 내게 처음으로 이것저것 가르쳐 주고, 내가 두려워하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해 준 사람이었다고. 난 어린 마음에 르엘라가 좋아서 약초학도 열심히 공부했고, 왕족은 약제국에 못 들어간다는 게 너무 슬펐어. 그 마음을 다 다독여 준 사람이야.”

“왕녀님.”

“르엘라마저도 편히 눈 감은 게 아니라면, 정말 다 죽여 버리고 나도 죽겠어. 어차피 내 의지대로 살 수 없는 인생, 아등바등 살아 봤자 무슨 의미야?”

“그러지 마세요. 르엘라가 그런 걸 바라지는 않을 거예요.”

“리젠!”

아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는 화도 안 나? 너는 미칠 것 같지도 않아? 르엘라가 죽기 전에 배시시 웃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그 시간들을 생각하면 돌아 버릴 것 같은데? 그 모든 게 어떤 음모의 일부였다면, 너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어야 하는 것 아니야?”

“……그게 안 돼요, 왕녀님.”

리젠이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돌아 버릴 것 같은데 그게 안 돼요. 정신을 잃어 가며 화를 내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요. 대신 더 열심히 생각하고, 더 냉정하게 사건을 분석하고, 더 정신을 차리고 제가 할 일을 하는 것 밖에 못하겠어요. 너무…… 너무 오래 전부터 무언가를 계속 참아 왔거든요. 어쩌면 제 자신의 존재 그 자체를.”

그녀가 씁쓸하게 웃었다.

“아마 제 정신을 놓아 버릴 수 있는 건 꿈속에서나 가능할걸요.”

5. 단서

“아, 아셰 왕녀님과 혼약이요?”

“네.”

다니엘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는데, 그 미소가 남자가 봐도 예쁜지 지한의 시선이 살짝 머물렀다.

“선왕 때에 이미 이야기가 되어 있었잖아요.”

지한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리젠은 속으로 한숨을 푹 쉬었는데, 저렇게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이면 아셰는 절대로 그에게 마음을 주지 않을 것이다. 하긴, 아셰는 그런 건 상관없다고 했었나.

“제국의 황제에게 혼담이 오면서 흐지부지되었지만, 사실 저는 미리부터 해 온 약속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윌리엄 형과 의견 충돌이 있었습니다.”

리젠은 조용히 웃고 있었지만, 전혀 사실이 아닌 것을 자연스럽게 말하고 있는 다니엘에게 속으로 감탄하는 중이었다. 다니엘은 항상 윌리엄의 편이었고, 그렇다면 아셰가 제국에 가는 데에 반대했을 리가 없었다.

“공식적으로 ‘의심의 기간’이니 모든 것이 끝나야 아셰와의 혼약을 거론해 볼 수 있겠지만…… 만일 제가 왕이 된다면 늦지 않게 추진해 보도록 하는 건 어떨까요?”

거짓말이다. 리젠은 다니엘이 저렇게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부드럽게 미끼를 던지는 것에 속으로 몹시 놀랐다. 

“저, 저야 가, 감사하죠.”

지한이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말했다.

“사실…… 저는 정말 아메탄 왕국의 여인들이 예쁜 것 같아요! 특히 저희 사막에는 금발 머리가 없기 때문에…… 정말 처음 아셰 왕녀님을 뵈었을 땐 정말로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아메탄의 내정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힘을 써 주시면 저야 감사드립니다.”

리젠이 싱긋 웃었다. 이제 그녀의 차례였다.

“지한 왕자님, 저는 아셰의 가장 친한 친구예요. 무도회 때 보셨죠?”

“아, 예. 안녕하세요.”

“물론 아셰가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는 건 정말 축하할 일이지만, 그래도 아셰도 왕자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좋잖아요. 그렇죠?”

“다, 당연하죠! 왕녀님은 아름다우시니…… 저 말고도 많은 청혼자들이 있을 텐데…….”

“그러니까요.”

아이를 달래듯 리젠이 차근차근 말했다.

“한스팀 왕국이…… 사실은 작은 나라긴 하니까요. 뭐, 제국에서도 다시 혼담을 얘기할 수도 있는 일이고…… 아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그건 다 이 세상에 마력이 점차 사라지면서 생기는 문제 중 하나입니다!”

‘작은 나라’라는 말에 지한이 자존심이 상한 듯 입을 내밀었다. 그의 손이 떨리는 바람에 찻잔에 차가 조금 흘러넘쳤다. 아셰의 말에 따르면 하루 종일 흑마법 얘기만 했다고 하니 조금만 더 긁으면 나올 듯했다. 옆에서 카이든이 웃음을 참는 것이 느껴졌다. 리젠은 그의 발을 꾹 밟았다.

다니엘은 맨 처음 리젠만 불렀으나, 이상하게 카이든이 자신도 있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수사국 직원으로서 리젠이나 다니엘이 못 보는 이상한 점을 잡아낼 수도 있다는 주장이었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증인을 몰래 심문하는 자리에 카이든이 없는 것도 이상하다고 생각한 리젠이 동의의 뜻을 보이자 다니엘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래서 지한을 불러낸 왕자궁에는 리젠과 카이든이 모두 참석하게 되었다.

“흑마법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도 한스팀 왕국이 가장 번영했을 때가 흑마법이 있었을 때지요? 그땐 제국도 함부로 못했다고 하니.”

카이든이 슬며시 얘기를 꺼냈다. 리젠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그 흑마법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해?”

“들리는 소문으로는 사람도 죽일 수 있다던데.”

“세상에, 무서워라.”

리젠은 숨을 들이켜는 시늉을 하며, 아까 다니엘에게 놀란 것을 취소하기로 했다. 한번 연기를 마음먹으니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사람을 쉽게 죽인단 말이에요? 너, 너무 끔찍하다.”

리젠의 질문에 지한이 약간은 어깨를 으쓱해하며 대답했다.

“아…… 뭐, 그렇게 말처럼 쉽지는 않죠. 그럼 한스팀에 살아남은 사람이 없게요? 그런 살인 저주는 엄청 조건이 까다롭고 힘들어요. 보통 불운의 확률을 높인다거나, 간단한 두통을 일으킨다거나 하는 게 일반적이었죠. 뭐, 이제는 한스팀 사람들 아니면 아무도 관심이 없지만.”

“어머, 너무 재미있는데 왜 관심이 없나요?”

“어차피 과거의 유산이니까요. 흑마법은 마력이 엄청나게 많이 들어요.”

지한이 씁쓸하게 말했다.

“옛날엔 한스팀의 흑마법이 굉장한 비밀로 취급되었다고 하죠. 외국인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갖은 술수를 쓰던 때가 있었대요. 하지만 지금은 뭐, 한스팀 동네 꼬마들에게 물어봐도 온갖 저주의 방법들이 술술 나오지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아요.”

“한스팀 동네 꼬마들도 저주를 알아요?”

“아주 옛날엔 소수의 몇 명만 알았다고 하는데, 더 이상 비밀이 될 것이 없으니 완전히 공개되었죠. 사실 저희의 통치 수단 중 하나이기도 해요. 한스팀이 예전에는 이렇게 대단한 왕국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방법이죠. 어차피 아무도 저주할 수 없으니 국민 단결이나 관광 산업 등으로 쓰곤 해요. 그래도 어느 날 다시 마력이 회복되는 날이 오면…… 그땐 정말 대단할 겁니다. 이론상으로 한스팀 사람들은 모두 저주를 쓸 수 있을 테니까요.”

리젠은 지한의 말을 하나하나 기억하며 마음에 새겨 두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럼 너무 무서울 것 같아요. 누가 저를 그냥 죽여 버릴 수도 있는 거잖아요.”

“에이, 사람 죽이는 게 그렇게 쉽지 않다니까요.”

지한이 리젠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순간 카이든의 눈빛이 굳었으나 지한은 자신의 말에 취해서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 건 정말 어려워요. 마력도 엄청나게 필요하고, 구해야 하는 것들도 진짜 까다롭고요. 시간제한도 걸려 있는데다가 저주를 시전하는 사람조차 알 수 없는 재료까지 필요해요.”

리젠은 자신의 목소리가 자연스럽기를 기도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떤…… 재료가 필요해요? 피…… 같은 것?”

“뭐, 사람의 피야 모든 흑마법 주술에 다 들어가죠.”

“그렇군요……. 그럼 사람을 죽이는 데에는 그것보다 더한 게 필요해요?”

지한은 신나서 이것저것 설명하기 시작했다. 온갖 구하기 힘든 재료들을 나열하다가, 그가 설명하면서 웃기다는 듯이 키득거렸다.

“그리고 최악은, 아까 말씀하셨던 사람의 피가 필요한데…… 내가 죽이고 싶은 사람과 서로 사랑하는 사이의 연인, 그 사람의 피예요. 서로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따라 저주의 정도가 결정돼요. 한 명이라도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가 아예 무용지물이 되고, 서로 마음이 깊지 않으면 다리 한쪽 정도나 잃겠죠. 서로 엄청나게 많이 사랑하면 아무런 티도 안 나고 자연사가 가능해요. 되게 웃기지 않아요? 저주하는 사람이 대체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알고 그 피를 준비하겠어요? 사람의 감정이 얼마나 복잡한데. 실컷 죽이고 싶은 사람 이름을 써 놓고 생판 감정이 없는 사람의 피를 준비하면 말짱 도루묵이 되는 거예요.”

리젠과 카이든, 다니엘의 표정이 동시에 굳었다. 지금 상황에서, 왕비의 눈엣가시는 다니엘뿐이다. 그렇다면 다니엘을 죽이기 위한 흑마법을 준비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리젠의 피를 재료로 준비하고 있는 것이 뻔했다. 그렇다면 왕비의 정보로는…… 리젠과 다니엘이 서로 연인 관계라고 파악한 것이 틀림없었다. 리젠은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옆에 있는 카이든의 얼굴을 왠지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도대체 왜 왕비는 리젠을 지목했을까. 그동안은 르엘라 때문인 줄 알았다. 그런데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말이 나오자 그녀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다니엘과…… 서로 사랑하는 사람의 피? 나의 피가? 그리고 이 사실이 다니엘과 카이든에게 다 밝혀지다니! 

“게다가 또, 이게 설명하기 복잡한데…… 좀 연속적인 저주예요. 5년에 한 번밖에 할 수가 없거든요. 왜냐하면 그 저주로 사람이 한 명 죽으면, 5년이 흐른 그 시체의 유골이 또 다른 살인 저주의 재료가 돼요. 5년이 지나야 유골의 마력이 좀 빠지니까요. 그러니 5년에 한 번밖에 할 수 없다는 최악의 시간 조건을 갖고 있어요.”

“그건 이상한데요.”

리젠이 그 말에 이상함을 느끼고 바로 반박했다. 시간이 맞지 않는다. 윌리엄은 죽은 지 이제 한 달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윌리엄이 흑마법으로 죽고, 이제는 다니엘을 죽이려고 한다는 그들의 가설에 크게 어긋나는 사실이었다.

“그럼 최초의 죽은 사람이 있어야 할 것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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