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이 길 역시 나와 아셰만 아는 길이니 왕비의 눈에 띄지 않을 거야. 이 길로 죽 정원을 통과하면 아셰의 궁 비밀 문이 나와. 문을 두 번 두드리면 아셰가 나올걸. 가는 길은 또 아셰가 안내해 줄 거고.”
“무슨…… 비밀스러운 길이 이렇게 많아요?”
“훨씬 더 많아. 왕족들은 항상 위험한 길을 걸으니까. 우리는 형제 살해를 아무렇지도 않게 교육받아.”
다니엘은 부드럽게 웃었다.
“왕비마마가 뭘 준비하고 계시다며. 그리고 그게 나를 죽이려는 거잖아. 그걸 다 알면서도 오늘 저녁에 아무렇지도 않게 문안 인사를 드려야 하는 생활이야.”
새삼 그녀는 아셰와 다니엘에게 기시감이 들었다. 길만 해도 이렇게 비밀스러운 것들에 둘러싸여 살아온 왕족이라는 존재가, 과연 그녀가 이해 가능한 인간이기는 할까? 사파엘이 왜 그렇게 경계를 시켰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다니엘에게 꾸벅 인사하고 아셰의 궁을 향해 혼자 나왔다.
그녀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던 다니엘이 문을 닫았다. 카이든은 아무 말 없이 차만 홀짝이고 있었다. 다니엘은 언제나 말이 없고 무뚝뚝한 그의 유일한 친구를 바라보며 빙긋 미소 지었다.
“리젠이 오니 확실히 분위기가 다르네.”
“뭐가?”
“넌 말이야, 말도 없고 잘 웃지도 않아서 별로 재미가 없는데…… 리젠은 워낙에 밝고 활달하니까.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도 저렇게 유쾌한 게 대단하지 않아?”
“흠.”
카이든은 동의하지 않는 듯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별로 밝은 것 같지는 않던데.”
“그래? 내가 보기엔 그냥 천성이 긍정적이고 에너지가 넘치는 애 같은데. 학교 다닐 때에도 항상 뭐든지 열심히 했잖아. 게다가 뭐든지 잘 하기도 하고. 아까 설명하는 것 봤지? 괜히 너랑 수석을 다투던 사이가 아닌 것 같아. 애가 빈틈이 없으면서도 어쩜 저렇게 명랑한지.”
“……그래?”
“학교 다닐 땐 내 앞에서 별로 말도 잘 못 했던 것 같은데…… 막상 직장 다니니까 더 성격이 나오는 것 같단 말이야. 내숭 떠느라 예쁜 말만 골라하고, 한마디 한마디에 의미 부여하는 귀족 영애들만 보다가 단순히 밝은 리젠을 보니까 뭔가 치유되는 느낌이야.”
카이든은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의 친구는 언제나 말이 없었으므로, 다니엘은 별다르게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천천히 캐서린의 동태를 얘기하던 카이든이 무도회까지 따라온 얘기를 했을 때, 다니엘이 씩 웃었다.
“캐서린 덕분에 무도회도 왔구나. 보통의 너라면 절대 안 왔을 텐데.”
“그러게.”
“끔찍하지 않았어? 모든 것이 네 스타일이 아니었을 텐데.”
“그다지.”
“춤도 안 췄을 거 아니야.”
카이든은 아무 말도 없이 턱을 괴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카이든이 그런 은근한 웃음을 보이는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다니엘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 보이네. 무슨 일 있어?”
“아, 아니. 그냥 좀 어젯밤에…….”
그가 자신이 말하면서도 머쓱한지 딴청을 부리며 중얼거렸다.
“기분 좋은 꿈을 꿨거든.”
“뭐야, 그깟 꿈 가지고.”
“그냥, 꿈속의 기분이 너무 좋아서…….”
다니엘은 카이든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그가 이렇게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너무 요즈음 일이 많고 복잡해서 조금 미쳤나 싶어 다니엘은 조심스럽게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냥 계속 생각나네.”
“괜찮아! 뭘 그런 걸 신경 써?”
아셰가 전혀 신경 쓸 것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나저나, 진짜 이상하네. 도대체 널 왜 노리지? 게다가 피? 그걸 어디다 써? 리젠, 확실히 본 것 맞아?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데.”
리젠은 흑마법에 대하여 설명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아셰에게는 이미 짐이 너무 많은 것 같았다. 윌리엄 태자를 시해한 범인으로도 한 번 몰렸고, 게다가 어디로 시집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은근 초조해하고 있는 듯했다. 이 상황에 왕비가 무언가를 또 꾸미고 있으며, 이번 대상은 다니엘일 것 같다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녀를 미끼로 한스팀의 왕자를 부른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사실 리젠은 다니엘이 아까 아셰와의 혼약을 얘기한다며 지한을 꾀어낸다 했을 때 아셰의 동의 없이 그렇게 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워낙에 왕족들은 정치적 이익을 위해 사랑조차 걸림돌로 여긴다는 걸 충분히 들어왔기 때문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말을 하면 아셰가 다니엘에게 실망할지 아니면 잘했다고, 당연한 일이라고 동의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아셰는 다니엘을 지지한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고, 그게 윌리엄의 뜻이라며 상당히 정치적인 발언까지 했다고 들었는데…….
“그나저나 이 길을 다니엘 오빠가 직접 알려 줬다고?”
아셰가 킬킬거리며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
“리젠, 다니엘 오빠는 아무나한테 이런 길을 알려 줄 사람이 아니야. 널 엄청나게 믿는 거야.”
“……뭐, 그런가 보죠?”
“믿는다는 건, 어쨌든 좋아하는 거, 뭐 그런 거랑 연결되는 거 아니겠어?”
그녀가 콧노래를 부르며 키득거렸다.
“다니엘이 여자한테 어쨌든 그런 신뢰를 보인다는 건…… 리젠, 오빠가 엄청나게 친절하고 다정해 보이겠지만 사실 속은 엄청 의뭉스럽거든. 뭐, 왕족이니까 당연한 거지만. 그런데 이런 비밀스러운 길을 알려 줬다는 건 네가 진짜 특별하다는 거야! 오히려 잘해 주고, 웃어 주고, 그런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거라고.”
“그거야 같은 배를 탔으니 그렇겠죠.”
“아, 답답하네. 리젠, 조금 더 희망을 가져 봐.”
아셰는 입을 내밀며 테이블을 가볍게 쾅 쳤다.
“무도회에서 세 곡이나 다니엘하고 춤을 춘 사람은 너뿐이야. 누가 봐도 다니엘의 눈에서 꿀이 떨어졌으니 뮤엘튼가의 건방진 년도 너한테 위기의식을 느낀 거라고. 게다가 어젯밤엔 나한테 다니엘이 네가 어디 있냐고 묻기까지 했어. 리젠, 이건 정말 대단한 거야. 다니엘의 속마음이야 나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넌 정말 그에게 특별한 여자야. 좀 더 설레는 모습 좀 보여 주면 안 돼?”
리젠이 한숨을 쉬며 그녀가 끓여 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확실히 아셰는 차를 몹시 잘 우려냈기 때문에 아까 다니엘의 궁에서 마신 것보다 훨씬 더 향이 좋았다.
“왕녀님.”
그녀가 천천히 말했다.
“그런데 저…….”
“왜?”
“……정말 안 설레요.”
“……뭐?”
아셰가 충격을 받은 얼굴로 그대로 굳었다.
“저…… 왕자님 정말 좋아했거든요? 왕립고등학교 입학식 날 마주친 순간부터 좋아했어요. 10대 때에는, 왕자님과 나눈 별것 아닌 대화들을 일기장에 그대로 옮겨 적을 정도로 좋아했어요.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어도 가슴이 두근두근했다고요.”
리젠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여전히 왕자님은 제가 아는 사람 중 단연 가장 잘생긴 사람이에요. 솔직히 정말 빛이 나잖아요. 반짝거리는 금발 머리도, 동그랗고 푸른 눈도, 하얗고 매끈한 조각 같은 얼굴도.”
아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데 안 설레요. 같이 춤을 춰도, 저를 보고 웃어 주셔도, 예쁘다고 해 주셔도, 그저 너무 잘생긴 외모에 눈길만 뺏길 뿐이지 예전처럼 마음이 움직이지를 않아요. 저도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리젠.”
아셰의 손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냥 너무……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서 그런 것 아닐까? 다니엘이 왕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네가 너무 멀리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아니야? 계속 안 될 거라고 생각했던 상대가 갑자기 다가오니 순간 주춤하는 것 아니야? 어떻게 오랫동안 품어 왔던 마음이 그렇게 쉽게 없어져? 뭣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공격도 받고 하니까 그냥 남자에 신경 쓸 여력이 없어진 것뿐이야. 에잇, 속상하네. 도대체 왜 널 노리는 거야? 네 피가 뭐라고?”
“글쎄요……. 그런 건가…….”
리젠이 한숨을 푹 쉬었다.
“사실 고모가 연관되어 있는 것 같아요. 절 노리는 것도 그것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안 그러면 저를 왜 노리겠어요? 제 특이 사항이라고는 르엘라 하카트 조카인 것밖에 없는데.”
“뭐?”
아셰가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진심으로 놀랐는지 입을 떡하니 벌렸다.
“르엘라가? 대체 왜?”
“자세히는…… 밝혀진 게 아니지만…… 뭔가 왕비님의 계략 때문에 희생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이제…… 고모가 자연스럽게 미치고 자연스럽게 죽은 게 맞는지도 모르겠어요.”
“안 돼.”
아셰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르엘라가…… 르엘라가 희생당했다고? 안 돼, 말도 안 돼. 진짜 가만 안 둘 거야. 정말로, 정말로 가만두지 않을 거야.”
“아직 확실하지 않아요.”
“가능하다면 지금 왕비를 때려죽이고 싶은 기분이야.”
아셰가 이를 갈며 눈에 힘을 주었다. 리젠은 아셰가 종종 뿜어내는 강렬한 살기에 순간순간 놀라곤 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학교생활을 함께 하고, 시험과 과제에 스트레스를 받던 급우가 맞을까? 이런 모습을 자신에게 보여 주는 것이, 다니엘 말대로 그녀에게만 편안함을 느끼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리젠.”
“네?”
“네게 말하지 않았지만…… 르엘라는 엄마보다도 날 더 아껴 준 사람이야.”
리젠이 눈을 깜빡거렸다. 르엘라가 아셰에게 약초학을 가르친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따르고 있는 줄은 몰랐다. 문득 르엘라의 장례식에서 아셰가 거의 실신할 정도로 운 것이 기억났다.
“우리 엄마는 힘없는 공국에서 온 외국인이고, 워낙에 심약한데다가 아바마마의 사랑도 못 받아서 거의 자신의 궁에서 감금되어 있다시피 하지. 나는 그게 감옥이랑 뭐가 다른지 모르겠어. 어제도 무도회에 오지 못했잖아. 테스티가 무서워서. 엄마는 매일 울기만 했고,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모든 걸 두려워만 하며 살았어. 어쩔 수 없지. 힘이 되어 줄 그 무엇도 없으니까. 그래서 나는 엄마의 보호자처럼 자랐어. 엄마한테 보호받는다는 기분은 한 번도 못 느낀 것 같아. 아, 엄마가 나한테 절대 자신처럼 살지 말라는 얘기는 많이 했다. 그건 마음에 새기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