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256)

32화.

무도회 다음 날은 휴일이었지만, 카이든은 리젠을 데리고 비밀리에 다니엘의 궁으로 향했다.

“이미 다니엘은 감시당하고 있을 거야. 궁 곳곳에 왕비의 눈이 있을 테니까. 그래서 이런 길로 가야 해.”

“이 길은 뭐야?”

리젠은 몇 군데의 갈림길부터 기억을 하지 못하고, 될 대로 되라며 카이든의 손을 잡은 채 어둠 속을 헤매고 있었다. 

“왕궁 지하엔 이런 미로가 엄청나게 많아. 대피로이기도 하고, 수족을 부리는 길이기도 하고. 왕궁 밑의 이런 길들은 각자 궁의 주인밖에 모르지. 아셰에게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는 이 길을 다니엘은 내게 직접 가르쳐 줬어.”

“아…….”

“내가 이 길로 들어가 그를 죽이면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없어. 다니엘은 내게 목숨을 맡긴 거야. 보통 왕족들은 절대 이런 길을 알려 주지 않아. 그의 신뢰에…… 보답을 해야겠지.”

“그런 대단한 길을 나를 알려 줘도 돼?”

“내가 널 좀 아는데…….”

카이든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넌 이거 다 기억 못 해.”

“이게 진짜!”

“틀려?”

리젠은 화가 나서 카이든의 등을 한 대 아프지 않게 때렸다. 사실 거침없이 걸어 나가는 카이든의 걸음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암흑이었고, 구불구불한 갈림길도 많아 도저히 그녀의 좋은 머리에도 불구하고 기억을 할 수가 없었다. 

“절대 혼자 들어오지 마. 잘못 들어왔다가는 출구도 못 찾고 여기서 아무도 모르게 굶어 죽을 수 있으니까.”

“입구도 기억 안 나.”

리젠이 툴툴거리며 대꾸했다. 캄캄한 어둠 속을 둘이 걷다 보니 그의 숨소리마저 크게 들렸다. 그녀는 눈에 보이지 않아도 카이든의 뒷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팔 전체에 붙은 잔근육, 칠흑같이 검은 까만 머리, 칼같이 다림질하여 입은 검은색 제복, 깊은 눈매 속에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까지. 어젯밤 말마따나 학창 시절 내내 서로 관심 없이 지냈다가, 지금은 서로 둘도 없는 동료가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시작이 그녀의 어리석은 실수 때문이었다는 걸 그가 안다면…….

그가 길의 끝에서 문을 두드리자, 문 너머로 다니엘이 시녀들을 물리는 소리가 들렸다. 믿을 수 없게도 문을 열자 다니엘의 궁이 나타났다. 다니엘이 계단으로 올라오는 카이든의 손을 붙잡아 끌어 올려 주며 활짝 웃었다.

“카이든, 왔구나.”

그가 훌쩍 뛰어 바닥으로 올라온 뒤, 뒤따라오는 리젠의 손을 붙잡아 주었다. 리젠 역시 날쌔게 뛰어 올라왔다. 다니엘의 눈이 커졌다.

“아아, 리젠.”

그가 비밀 문을 닫고, 황급히 정리가 되지 않은 머리를 매만졌다.

“리젠까지 올 줄은 몰랐네.”

다니엘이 부드럽게 웃으며 테이블의 의자를 빼 주었다.

“이쪽으로, 레이디.”

“왕자님, 무도회 한번 갔다고 절 귀족으로 착각하시는 거 아니에요?”

리젠이 깔깔거리며 의자에 과장된 몸짓으로 사뿐히 앉았다.

“레이디라니, 난생처음 들어 보는 말인데요. 아니면 어제 너무 ‘레이디’라는 말을 많이 하셔서 습관처럼 나오신 것 같은데.”

“어젠 그 어떤 귀족보다 예뻤거든. 진짜야.”

그의 푸른 눈이 살갑게 눈웃음을 쳤다. 카이든은 무표정으로 자신의 자리에 앉아 다니엘이 직접 따라 주는 차를 마셨다.

“언제 갔었어? 밤새 계속 찾았는데 안 보였어.”

다니엘이 턱을 괴고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 곡 정도는 더 추려고 했었는데.”

“그것 때문에 왔어.”

카이든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 공격이 있었어.”

“……무슨 소리야?”

내내 웃음기를 머물고 있던 다니엘의 표정도 굳었다.

“어제 복면을 쓴 괴한한테 공격을 받았어요. 저를 죽이려는 것 같지는 않았고, 제 피를 받아 가려고 했어요.”

“피? 대체 왜?”

다니엘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리젠이 똑 부러지게 지금까지의 상황을 정리했다.

“지금 우리가 밝혀내야 할 것은 두 개. 6년 전의 화재와, 윌리엄 태자 시해 사건이에요. 그렇게 큰 화재가 일어나려면 마법사 몇 명으로 안 되는데…… 마력증폭약이 개입되었다면 이야기는 다르죠. 그리고 그 마력증폭약의 부작용이 마력에 의한 역류였다면 수많은 마법사들이 마력 역류로 죽었다는 것도 설명 가능해요. 그런 부작용은 약의 완성도로는 최악이지만, 사실 증인 인멸에는 최고라고 할 수 있어요.”

리젠은 자신의 손에 자그마한 불꽃을 만들며 중얼거렸다.

“저는 마법사는 아니지만…… 선택 과목이 마법이라 잘 알아요. 마력이 조금만 더 많으면…… 이것보다 훨씬 더 큰 불꽃을 일으킬 수 있겠죠. 제가 마법사라고 해도 마력을 증폭시킬 수 있는 약이 있다고 하면 구미가 당길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약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 르엘라 하카트뿐이에요.”

“……믿을 수 없어. 르엘라는 그럴 사람이 아니야.”

“고모는 죽었으니 진실은 모르죠. 그러나 저도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데에는 동의해요. 그래서 저는 이 모든 일에 저희 고모의 광증과 죽음까지 연계된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어요. 분명히 저희 고모가 개입된 사건이에요.”

리젠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다음이 윌리엄 태자 시해 사건. 이것도 지금 밝혀진 건 아무것도 없죠. 그러나 너무 대놓고 이익 보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왕비 측의 시급한 암살이라고 추론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죽였는지 알 수가 없고, 시암 반응이 나타났기 때문에 당연히 시약에 의한 암살이라고 예상하지만…… 사실 우리가 전혀 예상 못 하는 저주 방법이 있기는 해요.”

“저주?”

“왕자님도 아예 예측을 못하시잖아요. 저희도 그랬어요. 사람의 피가 필요한 저주, 흑마법이요.”

“에이, 말도 안 돼.”

다니엘은 처음 카이든이 했던 반응 그대로 허탈하게 웃었다.

“그나마 좀 발달했다는 한스팀 왕국에서도 사라진 흑마법이 왜 아메탄 왕국에 지금?”

“흑마법이 사라진 건, 기본적으로 이 세상에 마력이 사라지고 있는 것 때문에 그래요. 그렇지만 마력증폭약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고, 또 까다로운 재료들도 왕비님이라면 구할 수 있을지 몰라요. 그리고 루벤의 비가…… 한스팀 왕국의 출신이라면서요.”

리젠의 똑 부러지는 말에 다니엘의 웃음기가 사라졌다. 다니엘은 곰곰이 생각에 잠겨 중얼거렸다.

“루벤이 나람을 맨 처음 데려왔을 때…… 다들 몹시 놀랐어. 우리 모두 루벤이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건 알았지. 조금 더 힘이 되는 여자를 데려올 줄 알았어. 그런데 한스팀 왕국에 여행을 갔다가 우연히 만났다는 여자를 데려왔지. 태자 아니면 외국인과 결혼해야 한다는 법칙을 지켰으니 아무도 막지 않았고, 반대할 것 같았던 테스티도 전혀 아무 말이 없었어.”

다니엘이 주먹을 꽉 쥐었다.

“뭔가 이상해. 왜 리젠의 피가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또 다른 흑마법을 준비하고 있을지도 몰라. 흑마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니 어떻게 조사해야 할지도 감이 안 잡히는군.”

“이번 무도회 때문에 한스팀 왕국에서 지한이라는 왕자가 왔어.”

카이든이 차분하게 말했다.

“그 왕자를 납치해서 몇 대 때리면 술술 불겠지.”

“농담이지?”

리젠이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외교국에 일 만들지 말고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

“아…… 그 회색 머리? 아셰한테 거의 정신 못 차리던?”

다니엘이 생각났다는 듯 무릎을 쳤다.

“그럼 쉽지. 아직 안 돌아간 걸로 아는데.”

그가 빙긋 웃었다.

“아셰와 혼약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며 궁으로 부르면 되지. 살살 구슬려서 이것저것 물어보자고. 리젠, 그때 함께 있어 줄 수 있어? 내가 지한이라도 리젠 같은 미녀가 작정하고 웃으며 호기심을 보이면 모든 걸 다 말해 줄 것 같아.”

“좋아요. 아셰의 제일 친한 친구라서 불렀다고 하면 되죠.”

의기투합한 다니엘과 리젠의 모습을 보며 카이든이 부루퉁하게 중얼거렸다.

“뭐하러 그렇게 복잡하게 해? 내가 알아서 알아 온다니까.”

“넌 할 일이 있잖아. 캐서린의 뒤를 밟아.”

다니엘이 차를 마시며 눈을 찡긋했다.

“분명히 그 약 상점에서 마법사들을 모으고 마법증폭약을 판 것 같으니까.”

“맞는 것 같아요.”

리젠이 박수를 한 번 치며 말했다.

“오늘 아침에 약제국 기록과 대조해 봤어요. 몇 군데 유통 경로를 거치긴 했지만 그 재료들이 모두 다 캐서린의 약 상점으로 들어갔더라고요. 분명히 그 약 상점에서 시약을 마실 마법사들을 모으고 마법증폭약을 판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 또다시 캐서린이…… 그때의 재료들을 모으고 있는 듯해요. 최근 각종 재료의 주문량이 급격히 늘었어요.”

“……그래?”

“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6년 전의 일이 다시 일어나려고 하는 것 같은데…….”

리젠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오늘 아침에 내린 결론을 말했다.

“지금 왕비가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안 남았어요, 왕자님.”

다니엘은 표정의 변화 없이 조용히 차를 마셨다.

“……걱정해 주는 것 맞지?”

그가 별로 놀라지도 않고, 부드러운 눈으로 리젠을 바라보았다. 리젠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능청을 떨었다.

“오래오래 사셔야죠. 왕이 되시면 더 좋고요. 약제국에 지원도 좀 늘려 주시고. 우리 카이든의 든든한 뒷배도 되어 주세요. 중년에 수사국장 정도는 달 수 있게요.”

다니엘이 쿡쿡 웃었다.

“전 이제 아셰 왕녀님 줄도 끊어지게 생겼어요. 그 비싼 드레스며 하이힐이며 다 망가트렸단 말이에요. 가서 빌어야 하는데, 물어내라고 하면 노예 계약이라도 맺어야 할 판이라고요.”

“리젠, 온 김에 아셰한테 들렀다 가.”

그가 일어나서 책장에 숨겨져 있던 뒷문을 열어 주었다. 카이든과 리젠이 둘 다 놀라서 숨을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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