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256)

31화.

“어쨌든 적어도 오늘 밤은 혼자 못 둬.”

“그럼 밤새고 지키렴. 네 맘대로 해.”

그녀가 새침하게 말하고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은 카이든이 이 집에 함께 있다고 생각하니 든든하기는 했다. 그녀도 사람인데 갑작스럽게 습격을 당하고, 허벅지가 욱신거릴 만큼의 부상을 당했는데 놀라지 않을 리가 없었다. 사실은 무섭고 얼떨떨했다. 남의 앞에서 징징거리고 싶지 않아 그저 밝은 척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 카이든이 스스로 같이 있어 준다고 하니 내심 마음이 놓였다.

“나머지 일은 내일 계획하고, 일단 자.”

“왜 들어와? 넌 거실에서 자.”

“너 잠드는 것 보고 갈게.”

리젠은 그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어차피 언쟁을 해 봤자 별다른 소득이 없을 것 같아 냉큼 침대에 누웠다. 오늘 밤 꿈에도 그가 나오겠지만, 그래도 이제는 그런 꿈들이 싫지 않았다. 어차피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게다가 이제는 현실이 꿈보다 훨씬 역동적이었다. 꿈마저 피하면서 살기엔 너무 피곤하다. 그리고 무의식의 카이든에게 물어볼 것도 있었다.

“그래. 얼른 잠들게.”

그녀가 이런저런 책들이 굴러다니는 침대의 이불 속에 눕자 맘에 안 든다는 듯 카이든이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침대에는 책들뿐만 아니라 옷에서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약병까지 굴러다녔다. 용케 자리를 잡고 누운 그녀의 곁에 그가 앉았다.

침묵 중에 숨소리만 흘렀다. 불까지 끄고 나니 더 어색했다. 리젠은 카이든의 넓은 어깨를 눈을 깜빡이며 바라보았다.

“……자?”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 암흑 속에서 카이든이 속삭였다.

“아니.”

리젠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얼른 자. 내일 아침엔 일 시킬 거야.”

“무슨 일?”

“캐서린의 마법 약 가게…… 뭔가 또 시작했어. 이상한 물건들이 들어오고 있어. 사람들도 급격히 많이 드나들어. 왕비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게 틀림없어.”

“알았어. 그 목록들 주면, 내일 아침에 분석해 볼게.”

“예감이 좋지 않아. 이제 왕비가 노릴 사람은 다니엘뿐이야. 의문사는 윌리엄에서 그쳤으면 좋겠어.”

“내일 내가 꼼꼼히 볼게. 안 그래도 왕자님이 말씀하셔서 유통 경로도 다 정리해 놨어.”

다시 침묵이 흘렀다. 서로의 숨소리를 과하게 의식하느라 리젠은 몸도 쉽게 뒤척일 수 없었다. 엄청나게 피곤했는데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다소 외진 언덕에 위치한 그녀의 집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리젠이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안 카이든이 문득 말을 걸었다. 

“야.”

“왜?”

“……다니엘 좋아하면서 힘들지 않았냐.”

“갑자기 무슨 소리야?”

“널 좋아하지 않는 상대를 아무 말 못하고 지켜보는 게…… 괜찮았냐고.”

“아무 말 못하지 않았어. 꽤 친했는데. 이런저런 얘기도 꽤 하고.”

“그런 소리가 아니잖아, 바보야.”

리젠은 흥, 하고 콧방귀를 한 번 뀌고 생각에 잠겨 중얼거렸다. 10대 때의 자신을 떠올려 보면 다니엘을 정말 많이 좋아하긴 했었다. 만일 그때 무도회에서 다니엘과 춤이라도 췄다면 몇 날 며칠을 그 생각만 했을 수도 있었다.

“괜찮았었어.”

“어떻게 그럴 수 있냐?”

“그냥, 나쁘지 않았는데. 매일같이 설렐 수 있는 대상이 있는 게. 대화라도 길게 하면 하루 종일 기분 좋고, 수업 시간이 지루할 때 훔쳐보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뭐, 왕자님은 다른 여자랑 결혼할 테지만 그래도 혼자 좋아하는 게 잘못은 아니잖아? 물론 좀 괴로운 날들도 있었지만 그것보단 설레는 날이 많아서 괜찮았어.”

“……그래? 결국 다른 여자랑 잘될 걸 알면서도?”

카이든의 목소리가 왠지 정말로 씁쓸해 보여서 리젠은 쉽게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다소 버벅거리며 말문이 막힌 그녀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으며 카이든이 중얼거렸다.

“근데 왜 난 그게 안 될까.”

너무 어두워서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가 길게 늘어진 그녀의 갈색 머리끝을 만지작거렸다. 리젠은 이불 속에서 뒤척이며 살짝 물었다.

“무슨…… 소리야?”

“나는 왜…… 안 괜찮을까.”

정적이 흘렀다. 더 이상 대화가 이어지지 않아서, 리젠은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는 채 잠이 들었다.

그녀는 무도회 차림 그대로였다. 괴한들의 습격도 받지 않았고, 와인을 손에 쏟아 끈적거리지도 않았다. 붉은 드레스는 몸의 라인에 착 달라붙었고, 다이아몬드 목걸이도 수많은 샹들리에 조명에 반짝이며 빛을 뽐냈다. 틀어 올린 갈색 머리는 우아했고, 아셰의 시녀들이 혼신의 힘을 다한 메이크업 덕분에 평소보다 훨씬 예뻐 보였다.

사실상 원래 무도회 때보다 예쁜 것은, 카이든의 상상 속에 그녀가 훨씬 더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리젠은 사람들 사이에 정신없이 섞여 있다가 누군가의 손을 잡았다. 검은 제복을 입은 카이든이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가득 담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를 보며 리젠이 장난스럽게 말을 걸었다.

“춤 춰 볼래? 좀 시시하긴 했지만.”

리젠은 그의 손을 이끌어 그녀의 허리에 댔다. 춤 같은 건 안 배워도 자신 있다는 아까의 허세와는 다르게 그는 뭔가 어색해 보였다. 그래도 곧잘 흉내를 내는 그를 보며 리젠이 키득대고 웃었다. 다니엘과 춤을 출 때에는 잘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음악도 귀에 들리지 않았는데, 카이든과 엉망인 스텝을 함께 밟고 있으니 굉장히 유쾌했다.

“괜찮지? 혹시 아무래도 네 스타일 아니야?”

“뭐…….”

카이든이 무심한 척하며 시선을 돌렸다.

“나쁘지는 않네.”

“그으으으래? 너 사실 남들 몰래 잠입해 있으면서, 다니엘이 백 명의 여자랑 춤추는 거 보면서 내심 부러워한 거 아니야?”

리젠이 깔깔거리며 마주 잡은 손을 꽉 쥐었다. 카이든이 그녀의 허리를 힘주어 더 당기며 으르렁거렸다. 

“웃기지 마.”

“하나도 안 부러웠어? 진짜 하나도?”

리젠의 경쾌한 스텝을 따라가며 그가 헛기침을 했다.

“흠…… 뭐, 하나 정도는.”

“하나?”

“고통스러울 정도로 부러웠지.”

왜 무도회 꿈을 꾸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어디에선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을 카이든과 함께 밝은 조명 아래에서 춤을 추고 있자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녀는 카이든의 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카이든.”

“왜?”

“너 좋아하는 여자 있지?”

“……무슨 소리야?”

그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역시 무의식중에라도 그녀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사실 리젠은 그가 좋아한다는 그 여자가 정말 궁금했다. 지난 꿈에서 살짝 언급했을 뿐이지만 그게 그렇게 궁금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조금 더 질문을 우회하기로 했다.

“음…… 네가 생각할 때에, 너보다 좀 멍청한 여자애가 누구야?”

“나보다는 다 멍청해.”

리젠은 하마터면 그의 발을 꽉 밟아 줄 뻔했다. 다음 조건이…… 지켜 주고 싶던 여자였나? 

“그럼…… 제일 약한 애. 제일 약한 여자애는 누구야?”

“제일 체력이 없는 애? 체술은 유진이 꼴찌잖아.”

그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러니까 앉아만 있는 행정국 갔지.”

유진? 리젠의 눈이 가늘어졌다. 별로 관심은 없었지만 꽤나 성적이 좋아 행정국 수석으로 들어간 여자애다. 조용조용하고 음침한 애라고 생각했는데…… 리젠은 카이든의 어깨에 올린 손에 힘을 주며 재차 물었다.

“밝고 쾌활한 애보다…… 어두운 애가 좋아?”

리젠은 보통 밝고 명랑하며 악바리 근성이 있는 똑똑한 애로 평가되었다. 다니엘도 그녀에게 어떻게 그렇게 모든 걸 잘하냐고 물었을 만큼 그녀는 혼자서도 뭐든 잘했다. 아셰가 가끔 모자란 모습도 보이고 일부러 약한 모습을 보이라고 조언할 만큼, 누구에게도 빈틈을 보여 주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숨긴 채 밝고 명랑하게 남과 대화하는 게 익숙해져 있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부모의 사랑이 없는 채로 자랐다. 열 살 때까지 아버지는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조차 거부했다. 어쩔 수 없는 결핍은 받아들이라고 르엘라는 조언했다. 슬픔을 모두 보여 주면 더 슬픈 인생을 살 거라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르엘라가 죽었을 때에도 그 누구에게도 징징대지 않았다. 어차피 슬픔은 혼자만의 것이니까.

“너무 밝고 명랑한 애는 나랑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아서.”

카이든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래서 사실 학창 시절 대부분 너한테 별 관심이 없었어.”

리젠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카이든의 무표정한 검은 눈이 너무 얄미웠다. 굳이 내가 아니라는 걸 그렇게 티를 내야 해?

기분이 단단히 상한 그녀는 그대로 그의 손을 놓고 무도회장을 가로질러 혼자 걸어갔다. 꿈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저 그녀의 멋대로 할 수 있었다. 카이든이 몹시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했지만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럼 난 뭐야? 꿈속에서 그냥 나타난 여자라 본능적으로 끌어안고 그런 거야? 

정원에 나가 혼자 앉은 그녀는 왠지 모를 속상함에 하이힐을 벗어 던져 버렸다. 정답은 알고 있었다. 그의 무의식은 그냥 어떤 여자가 나왔어도 입술을 들이 밀었을 것이다. 맨 처음 꿈에서도 아무 생각 없이 대련하다가 갑자기 불이 붙지 않았는가. 다 알면서도 그냥 마음은 다른 여자한테 있는데 욕정의 대상만이 된 기분이 너무 나빴다.

“야.”

어느새 따라 나온 카이든이 그녀의 앞에 섰다.

“왜 그래?”

리젠이 벌떡 일어났다. 그녀가 막무가내로 자신의 입술을 카이든에게 부딪히며 말했다.

“너도 이런 거 나랑만 해.”

“……어?”

그녀의 팔이 그의 목을 감쌌다.

“나하고만 하자고. 다른 여자 말고.”

그녀가 대담하게 혀를 내밀어 그의 입술을 쓸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꽉 잡았다. 왕궁에서는 여전히 감미로운 음악이 나오고 있었고, 정원의 밤공기는 시원했다. 카이든이 약간의 신음 소리를 내며 그녀의 몸을 더 꽉 끌어안았다. 키스는 더 깊어졌고, 그저 욕정에 의한 꿈속이라고 할지라도 기분이 좋았다. 머리 위에서 불꽃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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