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리젠이 대충 상처를 치료하고 붕대를 감을 동안 카이든은 꾸벅꾸벅 졸았다. 그녀는 그를 굳이 깨우지 않고, 집에 있는 재료들로 건성건성 요리를 하며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공격받을 만한 이유가 없다. 그들의 대화와 행동들을 차근차근 생각해 보면서 스튜를 끓이다가 뒤를 흘끗 돌아보았다. 카이든이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아예 자고 있었다.
그가 리젠의 집에 드나든 것은 몇 번 되지도 않는데 굉장히 익숙한 느낌이었다. 사실 그와는 학창 시절 내내 데면데면하게 지냈고, 심지어 라이벌 관계라 서로를 경쟁 상대로 여겨 부정적으로 의식하면 의식했지 절대 좋은 감정이 없었다. 그런데 꿈에서 연속하여 보기 시작하며 왠지 모르게 친밀해졌다. 그녀는 학교 동창들이 장난삼아 말하던 ‘몸정’ 같은 단어가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무리 꿈이어도…… 그게 그렇게 무섭다는데…… 그렇다면 이런 편안한 감정은 과연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만일 그들이 꿈으로 연결만 되어 있지 않아도 아마 졸업 후에 볼 일이 없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꿈 연결 시약만 잘못 제조하지 않았더라도 그녀는 지금 수사국에 있을지도 몰랐다. 생각해 보니 그 사건 하나로 너무 많은 미래가 바뀌었기 때문에 가정조차 힘들었다.
고모처럼 그렇게 천재로 살 생각도 능력도 없었고, 그저 열심히 눈에 보이는 길만 힘차게 살면 된다고 생각한 삶이었는데, 어쩌다가 누군가에게 시해 사주를 받을 만큼 인생이 이상해져 버렸을까. 그녀는 허브를 뚝뚝 따서 샐러드를 만들며 계속해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 또 자 버렸네.”
“출장 가 있는 동안 못 잤다며. 더 자지 그래.”
“됐어.”
그가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중얼거렸다.
“딱히 좋은 꿈을 못 꿨거든.”
“와서 밥 먹어.”
리젠이 빠르게 말을 끊으며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 찬 식탁을 치웠다.
“왕궁에 계속 있었다면 훨씬 더 맛있는 것들이 많았겠지만.”
“아쉽겠네. 그렇게 화려한 무도회에 한 시간도 못 있었다니. 작정하고 꾸미고 갔으면서.”
그녀는 이미 피투성이가 된 드레스도 하이힐도 대충 벗어 두고, 집에서 입는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였다.
“그러게 말이야. 막상 공주 놀이 해 보니까 너무 재미있더라고.”
“난 네가 무도회 같은 데 갈 줄은 생각도 못했다.”
카이든이 식탁에 놓여 있던 먼지가 잔뜩 쌓인 찻잔을 두 손가락으로 아슬아슬하게 집어서 치우며 말했다. 그의 표정에 못마땅함이 순간 스쳐 지나갔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넌 거기 왜 간 거야?”
“왜? 나는 가면 안 되냐?”
“아니, 너무 의외라서…… 보통 산하기관 사람들은 잘 안 가니까.”
“왕녀님이 끌고 갔어.”
리젠은 왠지 가타부타 설명하기가 민망해서 대충 얼버무렸다. 카이든이 망설이다가 괜히 스튜를 뒤적이며 말했다.
“다…… 다니엘하고, 크흠, 춤은 왜 췄어?”
“가, 가르쳐 준다더라고.”
한동안 숟가락 움직이는 소리만 들릴 뿐 식탁에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좋았겠네.”
카이든의 씁쓸한 말에 리젠이 눈을 살짝 굴리다가 좀 더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춤 처음 배워 봤어. 귀족도 아니고, 그런 걸 배울 일이 없잖아? 물론 나한테 그 정도 스텝이야 정말 꼬맹이 수준이었지. 별로 어렵지도 않더라고. 사실은 살짝 지루하기도 했어. 너무 뻔한 스텝이 반복되고 몸을 움직이는데 박진감이라고는 하나도 없거든. 음, 그래도 너도 한번 배워 볼래? 내가 가르쳐 줄까?”
“됐어.”
그가 피식 웃었다. 리젠은 분위기가 약간 다운되는 것 같으면 억지로 명랑함을 가장하여 말을 많이 하는 경향이 있었다. 처음엔 그저 그냥 밝고 성격이 쾌활한 애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자주 관찰하다 보니 그저 발랄한 척을 잘하는, 생각보다 속을 알기 힘든 여자였다. 분명 오늘 있었던 일로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충격을 안 받은 건 아닐 터였다. 무슨 상황에 있더라도 일단은 남들 앞에서 웃어 보이고 슬픔이나 분노는 감추는 성격인 듯했다.
“그런 건 딱 봐도 내 스타일 아니야. 여자랑 끌어안고 빙빙 도느니 달리기를 한 번 하고 말지. 그리고 오늘 다리에 칼 맞은 애한테 무슨 춤을 배워?”
“음, 그 사건 말인데.”
리젠이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 눈으로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점이 있어. 나를 죽이려고 하지는 않았어. 사실 죽이는 게 목적이었다면 훨씬 쉬웠을 텐데.”
“널 죽이면 왕궁 무도회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 셈이 돼. 문제가 커져. 수사국도 당연히 개입할 거고. 그렇지만 대체 그럼 죽이지도 않을 걸 널 왜 공격하겠어?”
“그걸 전혀 모르겠어. 그런데 그들이 했던 행동이나 대화 같은 걸 봤을 때…… 내 피를 가져가려는 것 같았어.”
“……뭐?”
“이 상처 말이야. 전혀 급소가 아니잖아.”
리젠이 허벅지에 감은 붕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칼로 그어서 유리병에 피를 담더라고. 내가 왠지 느낌이 안 좋아서 깨 버렸지만. 그리고 마음 같아서는 손목을 그어 동맥혈을 받고 싶다느니, 얼굴에 칼을 긋겠다느니 이런 말을 했어. 나를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라…… 내 피를 받는 게 목적인 것 같은…… 물론 나를 기절시키려고 했던 걸 봐서, 비밀로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네 피를 어디에 쓰는데?”
“그러게.”
또 다시 오리무중이었다. 리젠은 손톱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사람의 피라면…… 시약에 들어가는 재료도 아니야.”
“배후로 추정할 사람은 한 사람뿐이야. 왕비 쪽 말고는 우리의 적이 없으니까. 그런데 왕비 측에 네가 노출되었다는 게 더 신경 쓰이는데.”
“일단…… 내가 그 사람들 얼굴을 하이힐로 다 찍어 뒀거든? 혹시나 왕비의 수족들 중 얼굴에 하이힐이 찍힌 상처가 생긴 사람들이 있다면 왕비가 배후라는 것이 확실해지겠지. 그건 수사국인 네가 알아서 해 봐.”
카이든은 질렸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에 그것까지 예상하고 그들의 얼굴을 하이힐로 찍었다니. 그런 그의 표정을 보며 리젠이 씩 웃었다.
“수사국 수석 예정이었던 여자를 얕보면 안 돼.”
“웃기지 마. 네가 수사국 썼어도 수석은 나야.”
“대련하면 내가 이길 수도 있다니까? 마법 쓰면 또 몰라!”
“……바보같이.”
그가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는…… 차라리 소리를 지르고 울어. 그런 순간에까지 몇 수 계산해서 괜히 위험해지지 말고.”
그 모든 게 어이가 없다는 듯이 카이든이 리젠의 머리를 한 번 꾹 누르고, 괜히 신경 쓰인다는 듯 그녀의 갈색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피라니……. 섬뜩하게 그게 뭐야?”
그의 차분한 목소리에 걱정과 분노가 함께 담겨 있었다. 섬뜩하다는 말에 리젠의 눈동자가 한 바퀴 굴렀다. 섬뜩하다…… 섬뜩하다…… 평상시에 절대 듣지 못했던 이 단어를 아까 들었던 것 같은데…….
‘호구 같긴 한데, 진짜 너무 재미없어. 자꾸 자기네 사막 왕국이 옛날에는 번영했는데 마력이 줄어들어 흑마법이 사라지며 이렇게 된 거라고 신세 한탄만 하잖아. 피랑 시체랑 저주 얘기만 드글드글한 흑마법 얘기를 누가 듣고 싶어 하겠어? 잠자리 섬뜩하게.’
아셰의 뚱한 목소리가 기억났다.
“카이든.”
리젠이 천천히 고개를 들며 중얼거렸다.
“사람의 피가 필요한 경우가 있어.”
“어?”
“……흑마법.”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게 사라진 지가 언젠데.”
카이든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게다가 한스팀 왕국에서나 좀 있었던 거지, 다른 나라에서는 제대로 연구도 안 됐어. 그것도 부족 간의 내전이 잦아 온갖 저주가 발달한 사막 국가의 특수성 때문에…….”
그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다가 말을 뚝 그쳤다. 리젠은 그가 자신과 같은 곳까지 생각이 미쳤음을 알고 몸을 앞으로 기울여 속삭였다.
“루벤 왕자님의 아내가…… 한스팀 왕국의 사람이라며?”
“……알아봐야겠군.”
카이든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흑마법이 사라진 건 대륙에 마력이 점점 더 없어지며 생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흑마법은 거의 특정한 상대에 대한 저주에 특화되어 있는 만큼, 굉장히 까다로운 재료와 엄청난 마력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르엘라의 마력증폭약이 연루되어 있다는 가설이 유력한 지금, 흑마법이라고 개입되지 않았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흑마법에 대해 어디서부터 알아봐야 할지도 모르겠어. 대학에서도 전혀 배우지 않았던 과목인데…… 책이라도 있나?”
“카이든. 지금 왕궁에, 흑마법에 대해 엄청 떠들고 싶어 하는 한스팀 출신의 사람이 있어.”
“……뭐?”
“내가 무도회에서 봤어! 아셰 왕녀님한테 엄청 껄떡거리던 남자.”
리젠이 벌떡 일어나 눈을 반짝이며 소리쳤다. 그녀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역시, 나는 아무래도 수사국에 갔었어야 했다니까. 이 정도면 약제국에서 썩기 너무 아까운 인물 아니니?”
카이든은 집에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리젠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지만 막상 혼자 남으면 공격 받던 잔상이 떠올라 불안해질 것이기 때문에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언제고 다시 올 수 있었다.
“내가 어떻게 매일 너만 지키고 있겠냐?”
그의 태도는 굉장히 강경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지켜야지.”
카이든이 그러면서도 못내 신경 쓰인다는 듯이 덧붙였다.
“그런데, 나 빼고는 이렇게 여자 혼자 사는 집에 정말 남자를 들이면 안 돼. 나 같은 남자는 정말 드물어.”
“카이든.”
리젠이 한숨을 쉬었다.
“난 아빠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아빠도 그만큼 똑같은 잔소리는 계속 안 하겠어.”
“어쨌든 적어도 오늘 밤은 혼자 못 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