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모자라는 것 같아. 시간 없어.”
다시 한 번 다가오는 칼을 그녀가 발로 쳐 냈다. 생으로 상처를 입은 다리가 후끈후끈했다. 저 멀리 떨어진 하이힐을 집어 던져 일단 유리병을 깼다. 그녀의 피가 사방팔방으로 튀었다. 정신없이 피하는데 볼에서 불꽃이 튀었다. 따귀를 맞은 것이다.
“이년이 진짜!”
“아아악!”
머리채가 잡힌 그녀가 비명을 지르는 사이 다시 나머지 한 명이 굴러서 구석으로 떨어진 칼을 집었다.
“단단히 잡고 있어. 보통 계집애가 아니야.”
“마음 같아서는 손목 줄을 끊어 동맥혈을 받고 싶군.”
“죽이는 건 위험해. 상판대기가 반반하니 얼굴을 그어 주면 될걸.”
리젠은 칼끝이 그녀의 얼굴로 향하는 것을 똑바로 바라보며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머리를 굴렸다. 이 모든 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대체 그녀가 뭐라고 이런 훈련된 괴한까지 고용한단 말인가? 객관적으로 그녀가 이런 남자 둘을 이기기는 어렵다. 약제국에 들어오고 나서는 체력 훈련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오기가 생긴 그녀는 다가오는 괴한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이런 미친년!”
그때였다. 지붕 끝에서 누군가가 뛰어내려 들어와 그녀에게 달려드는 괴한 중 하나를 난간 밖으로 순식간에 차 냈다. 리젠은 그 틈을 타 자신의 뒤에서 손을 붙들고 있던 다른 괴한의 머리를 뒤로 세게 부딪혀서, 잠시 손아귀의 힘이 줄어든 틈을 타 팔꿈치로 가슴을 가격했다. 헉, 하고 쓰러지는 괴한 뒤로 검은 머리의 청년이 달려들어 머리를 가격했다.
“억!”
“카이든?”
“누구의 사주지?”
리젠은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이대로 험한 꼴을 당하는 줄 알았는데 순식간에 지붕 위에서 카이든이 나타나 한 명은 2층 밖으로 떨어트렸고, 한 명은 순식간에 제압했다. 그가 괴한의 목을 꺾으며 살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누가 시켰지?”
괴한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주문을 웅얼거리더니, 작은 불꽃을 만들어 카이든의 손에 내뿜었다. 위력은 아주 적은 정도였지만 그의 힘을 잠시 빼는 데에는 충분했다. 순간 휘청거리는 카이든의 머리를 벽에 박고 나서, 괴한은 난간을 짚고 2층 높이를 뛰어 내려갔다.
“……마법사였나 보군. 요즘 마법사는 부업으로 이런 것도 하나 보지?”
“카이든! 피!”
리젠이 정신없이 절뚝이며 다가가 그의 머리에 흐르는 피를 닦았다.
“어, 어떻게 여기 있는 거야? 어떻게 된 거야?”
불과 10분밖에 안 되었던 갑작스러운 습격인데,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좋은 향기와 달콤한 과자, 웅장한 음악이 울려 퍼지던 무도회는 아예 다른 세상인 듯했다. 물론 여기까지 웅웅거리며 경쾌한 연주와 사람들의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 모든 것이 다 헛것 같았다.
“리젠…….”
“언제부터 여기…….”
황당해서 말을 더듬거리는 그녀는 순간 말을 멈추었다. 카이든이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리의 부상 때문에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아까 테라스에서 뒹굴던 커플들처럼 그들 역시 테라스 구석에서 서로의 몸을 포갠 형상이 되었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 한숨과 함께 울렸다.
“……늦지 않아서 다행이야.”
“늦었어.”
리젠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수사국 지망의 에이스였기 때문에 시간을 좀 끌 수 있었던 거지.”
“이 바보가 진짜…….”
“다 내 덕분이라고. 내가 잘났기 때문에 무사한 거야.”
“멍청하긴. 농담이 나오냐?”
그가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아서 그녀는 숨을 캑캑댈 수밖에 없었다. 리젠은 그의 어깨에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기대고 몸에 힘을 뺐다. 사실은 너무 놀랐다. 그녀는 살의를 가진 누군가에게 습격을 당한 것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거짓말처럼 위기의 순간에 나타난 카이든도 놀라웠다.
“지방 출장 갔다며.”
“어떻게 알았어?”
“……다니엘 왕자님한테 들었어.”
다니엘의 이름이 나오자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리젠은 숨을 가다듬으며 재차 물었다.
“네가…… 여기에 왜 있는 거야?”
“마력증폭약을 거래한 것 같은 작은 마법 약 상점이 있어……. 그곳의 주인인 캐서린이라는 여자가 왕비의 사촌이야. 뭐라도 찾아보려고 잠입했다가, 그 여자가 한껏 차려입고 나가길래 뒤를 밟았지. 근데 무도회였어.”
“아…….”
“‘의심의 기간’ 중 수사 자율권을 획득하니 편하군. 역시 왕자가 뒤에 있으니 든든해.”
“……그렇구나.”
리젠은 상처 입은 다리가 쓰라렸지만 왠지 그의 품을 벗어날 수 없어 가만히 기대어 있었다.
“그럼 언제부터 무도회에 있었어?”
“네가 다니엘과 춤출 때부터.”
“어머, 나 엄청 예뻤는데 그럼 그것도 봤겠네?”
“네 손에 직접 와인 들이붓는 것도 봤지.”
“그런 건 왜 보냐? 근데 어디 있었지? 난 네가 있는 줄도 몰랐네.”
“수사국 요원이 너한테도 잠입을 들키면 되겠냐?”
“야!”
“화장실까지 따라갈 순 없어서 거기서 널 놓쳤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줄이야.”
“그러게.”
리젠이 눈을 깜빡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내가 이런 공격을 받아야 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나?”
“그러게.”
카이든이 그녀의 머리를 쓸었다. 그의 손길에서 조심스러움이 느껴졌다.
“그래도…….”
그녀가 씩 웃으며 중얼거렸다.
“다행이야. 카이든, 고마워. 덕분에 험한 꼴 안 당했어. 이 예쁜 얼굴에 칼질이라도 당했으면 어쩔 뻔했어?”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야, 내가 지금 이렇게 피투성이에 머리 엉망이고 드레스 찢어져서 그렇지, 아까는 예뻤다? 봤을 거 아니야.”
“내 눈엔 다 똑같아.”
“뭐?”
“그냥 다 똑같다고.”
나른한 그의 목소리에 리젠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허허 웃었다. 카이든이 그의 무게를 더 그녀에게 실으며 키득거렸다.
“교복을 입든, 실험복을 입든, 잠옷을 입든, 드레스를 입든, 내 눈엔 그게 그거니까 앞으로 이렇게 괜한 옷 입지 마라. 어깨가 다 드러나고, 이게 뭐냐?”
“진짜 왕녀님, 가만 안 둘 거야.”
리젠이 자신도 모르게 그의 품에 파고들며 중얼거렸다.
“무도회는 모든 사랑을 하는 소녀들의 꿈이라더니. 예쁘게 차려입고, 좋아하는 남자가 손을 내밀어 주어서, 남들의 시선을 느끼며 춤을 추는 그런 곳이라더니.”
“……아니야?”
“피투성이 되어 옷은 넝마가 되고, 남들 몰래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오랜만에 격투라는 것도 하는 그런 곳이네.”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쿡쿡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좋은 동료가 구해 주고 안아 줬으니,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어휴.”
카이든이 몸을 천천히 떨어트리더니, 리젠의 엉망이 된 머리를 손으로 쓸어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그의 왼쪽 머리에서도 피가 아직도 흘렀다. 그의 검은 눈이 빤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리젠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흠칫했다.
“……그런 말 하지 마.”
“어, 어? 왜? 무, 무슨 말, 말하는 거야?”
그가 어리둥절한 리젠의 얼굴을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 리젠의 심장이 순간 두근두근 뛰었다. 꿈이었다면 아마 키스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작은 한숨을 쉬고 천천히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는 머리 위의 상처를 스윽 닦고 태연하게 말했다.
“소란 피워서 좋을 것 없을 듯하니 몰래 나가자.”
“……그래. 일단 이 모든 상황을 정리할 필요가 있어. 근데 어떻게 몰래 나가?”
“놀라지 마.”
“어? 어어어, 야!”
카이든이 그녀를 번쩍 들어 안았다. 리젠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그가 2층 난간을 뛰어 넘었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하늘을 거의 날다시피 하는 곡예 수준의 도약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카이든의 목을 꽉 잡고 매달렸다. 정원의 들길을 따라 그녀를 안고 달린 그는 왕궁과 이어진 약제국을 향했고, 약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비밀번호를 그녀가 입력해야 할 때가 되어서야 리젠을 내려주었다.
“야, 이게 인간이 말이 되는 힘이니?”
“이 정도 간단한 마력 운용쯤이야. 수사국에서 엄청 훈련했다고.”
“전혀 간단한 것 같지 않은데? 이런 것도 가르쳐 주다니, 역시 수사국 갈 걸 그랬나 봐.”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어쨌든 훈련에서 배운 비기들은 비밀이니까.”
“더한 것도 있어?”
리젠은 놀란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괜히 너스레를 떨었다. 카이든은 전까지만 해도 공격을 당하고 방금은 하늘을 날아 놓고서도 쾌활하게 말을 잇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것도 그렇고, 이 길도 처음이야. 왕궁이랑 이렇게 이어지나? 저쪽 길은 뭐야?”
“2왕자궁이랑 이어지는 길. 여기 정원이 복잡해서 다들 잘 모르는 길이긴 해.”
그녀는 아무도 없는 텅 빈 약제국을 통해 뒷문으로 나갔다. 왕궁을 완전히 벗어난 이후에서야 모든 것이 끝난 듯했다. 그녀의 집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가는 길은 굽이 부러진 하이힐을 신어서 그런지 힘들었다. 그녀가 비틀거리며 걷는 것을 본 카이든이 한숨을 쉬며 앞에 섰다.
“업혀.”
“……어?”
“그 다리로, 그 신발을 신고 어떻게 걷겠다는 거야?”
“음…… 미안한데.”
“어차피 집에 혼자 못 보내.”
그녀는 양쪽 하이힐을 손에 들고 카이든의 등에 업혔다. 그가 가볍게 그녀를 들어 올리고 밤거리를 걸었다. 왕궁에서는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는지 화려한 폭죽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집으로 가는 길이 쓸쓸하지 않았다.
“카이든.”
“왜?”
“저녁 먹었어?”
“아니. 어제부터 아직 한숨도 못 자고 한 끼도 못 먹었어.”
“맛있는 거 해 줄까?”
“아니. 너 요리 못하던데.”
“너 진짜…….”
“그리고 내가 몇 번을 말하냐.”
카이든이 한숨을 쉬었다.
“여자 혼자 사는 집에 함부로 남자한테 문 열어 주지 말라고.”
“그럼 너도 오지 마.”
“나는 괜찮고.”
“왜?”
“나는 굉장히 자제력 있고, 이성적이고, 하여튼 그런 남자니까.”
꿈속에서는 제일 위험해 보이던데? 리젠은 코웃음을 쳤다. 오늘 들었던 말들 중에 제일 웃겼다고 생각하며 그녀가 카이든의 목에 더 세게 팔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