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약제국에서 개발한, 피부 뽀얗게 하는 시약이 얼마나 많이 수출되는지 알아? 너도 얼굴 본새 보니 그거 먹고 온 것 같은데? 탁상공론하는 귀족 나으리들보다 산하기관에서 얼마나 왕국에 많은 도움을 주는데, 과거의 악습 덕분에 어쩔 수 없이 명맥 유지하는 귀족들이 건방지게 폐쇄 운운하고 난리야.”
“와, 왕녀님.”
은색 드레스의 영애가 이를 갈며 일단은 고개를 숙였다.
“왕족들이 엘리트들과 함께 학교를 다니게 하는 건 누가 생각해 냈는지 몰라도 너무 좋은 아이디어 같아. 안 그러면 귀족들이 얼마나 무능력한지 몰랐을 테니까. 너 약제국 폐쇄하면 그 엄청난 손해 네가 다 메꾸렴. 다니엘이 너 같은 여자를 선택할 정도로 멍청하면 왕도 못 되겠지만.”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 영애의 분함이 리젠에게까지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아셰가 피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알아들었으면 벌서지 말고 가 봐.”
영애는 이를 갈며 인사를 하고, 또각또각 걸어 나가는 길에 리젠의 어깨를 툭 치며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주제에 안 맞게 첩년 짓 하는 건…….”
그녀에게만 들리는 섬뜩한 목소리로 속삭이고는 은색 드레스가 미끄러지듯이 사라졌다.
“네 고모 닮았나 봐?”
리젠은 그대로 굳었다. 그녀를 붙잡으려고 몸을 돌리는데 아셰가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손을 허둥지둥 닦기 시작했다.
“어떡해…… 저 미친 게, 벌써 지가 왕비인 줄 아네. 남들이 차기 왕비라고 떠받들어 주니까 진짜인 줄 아나 봐.”
리젠이 살짝 충격 받은 것을 그 영애의 거만함 때문이라고 오해한 아셰가 짜증을 냈다.
“뮤엘튼 공작의 맏딸이야. 사실 귀족원 중에서는 권력이 가장 막강하고, 대표적인 윌리엄의 라인이었기 때문에 꿈을 꾸는 것도 당연하겠지. 그래도 저년이 정말로 왕비가 된다면…….”
아셰가 싸늘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어떻게든 없애 버릴 거야. 건방진 년.”
“……아셰?”
진심으로 느껴지는 살기에 리젠은 깜짝 놀라 무의식적으로 학생 때처럼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말았다.
“왕비가 되면 제일 먼저 할 일이 나를 가장 불행한 자리에 밀어 넣고 산하기관 다 없앨걸? 다니엘은 귀족들의 개가 되고 말이야. 뭐, 본인도 충분히 알고 있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도 ‘없앤다’라는 말을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리젠은 너무 충격적이어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녀의 상식으로는 아무리 나쁜 사람이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없애 버린다는 말을 진지하게 한다는 것이 말도 안 됐다. 살인은 그 어떤 경우에도 추악한 것 아닌가.
역시 왕족은 얼굴이 너무 많다. 사파엘이 왕족은 믿으면 안 된다는 얘기를 한 것이 조금씩 더 이해가 갔다. 가장 정치적인 위치이니 어쩔 수 없겠지. 왕족들이 산하기관을 존중하는 것도 결국 귀족들과의 세력 균형을 위해서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리젠은 아셰가 자신을 왕비로 미는 것도 사실은 산하기관 출신의 왕비가 아메탄을 위해 더 낫다고 생각해서 그런가 하는 의심도 들었다.
오랜 짝사랑을 응원한다는 친구의 순수함마저도 믿을 수 없다면 과연 그녀에게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리젠은 그 영애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충격적인 발언에 대해 혼자 조용히 생각하고 싶었다.
“왕녀님, 아무래도 저 손 좀 씻고 와야 할 것 같아요.”
리젠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잠시 다녀올게요.”
“같이 가 줄까? 화장실은 2층이야. 또 그것들이 몰려들면 어떡해.”
“그 정도는 이길 수 있어요. 정 짜증나면 때리고 튀죠, 뭐. 그리고 왕녀님도 바쁘신 것 같은데요?”
그녀가 아셰 곁을 아까부터 맴돌고 있던 한스팀 왕국의 지한 왕자를 흘끗 눈짓하며 말했다. 아셰가 짜증난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쟤, 내가 좋은가 봐. 자꾸 저러네.”
“호구 같은 남자 하나 물고 싶다면서요. 어때요?”
“호구 같긴 한데, 진짜 너무 재미없어. 자꾸 자기네 사막 왕국이 옛날에는 번영했는데 마력이 줄어들어 흑마법이 사라지며 이렇게 된 거라고 신세 한탄만 하잖아. 피랑 시체랑 저주 얘기만 드글드글한 흑마법 얘기를 누가 듣고 싶어 하겠어? 잠자리 섬뜩하게.”
아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목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이미지 관리는 잘해 봐야지. 그럼 리젠, 다녀와. 분명히 다니엘은 다시 올 게 분명해. 그때 내가 다 일러 줄게. 일단 화장실은 저쪽 계단으로 올라가면 돼.”
“네.”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표정으로 생긋 웃으며 한스팀 왕국의 왕자에게 다가가는 아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리젠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손이 끈적해서 기분이 나쁜 것도 있었지만 일단 음악 소리가 좀 작은 곳으로 가고 싶었다. 계단으로 올라가며 그녀는 무도회장 중앙에서 몇 번째일지 모르는 여자와 춤을 추고 있는 다니엘을 보았다. 눈처럼 하얀 흰색 정장, 길쭉한 다리와 매끄러운 살결, 부드럽게 물결치는 금발 머리가 멀리서 봐도 한눈에 띄었다.
이렇게 멀리서 바라본 것이 벌써 6년. 어디에선가 몰래 바라보기만 했던 그 시간이 이젠 6년. 말 한마디 못한 채로 속에 담아 두기만 했던 순정이 그새 6년. 이제 와 조금 더 다가가도 된다고 하니 괜히 뒷걸음질 치게 되는 이 마음은 뭘까. 난 그저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비련의 여주인공 흉내라도 내는 놀이를 하고 있었던 것뿐일까. 이렇게 주저하며 아무것도 못하는 건 나답지 않은데……. 리젠은 복잡한 심경을 누르며 겨우 걸음을 옮겼다.
손을 씻고 나서도 리젠은 쉽사리 연회가 한창인 아래층으로 내려갈 수 없었다. 생각이 복잡했기 때문이다. 밤공기가 싸늘했지만 더 이상 달콤하고 인위적인 향기를 맡기 싫어서 그녀는 테라스에 나가기로 했다. 무심코 문을 연 첫 번째 테라스에서, 두 남녀가 엉켜 있다가 그녀를 향해 매너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것을 본 뒤로 그녀는 조심스럽게 아무도 없는지 살피며 걸었다. 그래서 결국엔 가장 구석의 아무도 없는 테라스를 찾아 난간에 몸을 기댔다.
“주제에 안 맞게…… 첩년 짓…….”
르엘라와 전혀 안 어울리는 말이었다. 리젠은 르엘라가 30대 중반까지 살아가면서 일생 내내 과연 남자를 한 명이라도 만났을까 의심스러웠다. 꾸미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리젠보다도 애교 없이 꼿꼿했으며 늘 안경에 실험복 차림이었다. 리젠은 그나마 억지로 만들어 낸 쾌활함이라도 있었지만 르엘라는 한없이 진지하게 연구 윤리를 읊던 사람이다. 정말 고모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리젠은 그녀가 과연 누군가의 첩년 짓을 할 만큼의 매력이나 있는 여자인가 싶었다.
“그렇지만…… 내가 고모에 대해서 뭘 알겠어.”
그녀는 고모의 손에 컸지만, 그녀에 대해 충분히 알기에는 너무 어렸다는 생각을 했다. 르엘라가 죽었을 때 그녀는 18세였다. 르엘라는 그때 리젠을 맡아 키웠는데, 리젠은 그 나이가 되어서도 르엘라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저 가르침을 받기에만 급급했다. 당장 르엘라의 노트들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창의적이고 독창적이었는지 그동안은 짐작만 했을 뿐 전혀 몰랐다. 그녀는 문득 르엘라가 너무 낯선 여자처럼 느껴졌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귀족가의 사교계에 그런 안 좋은 소문이 떠돌고 있는 건지.
“세상 쓸데없는 고민일까?”
리젠은 둥글게 뜬 달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고민만 하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차라리 그 뮤엘튼 공작가의 여식이라는 그 영애를 붙들고 와서 몸으로 제압하고 소문의 전말을 듣는 게 더 속이 시원하지 않을까? 어차피 지켜야 할 체통도 없는 평민 출신인데 한번 막 나가 볼까? 그게 더 그녀다운 해결책 아니었나? 대놓고 시원시원하게 해결하는 것이 좋아서 원래부터 수사국 지원이 아니었나?
밖의 새까만 밤풍경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가 다시 연회장을 가기 위해 몸을 빙글 돌렸다. 그때였다. 누군가 뒤에서 그녀를 덮치는 것이 느껴졌다.
“하앗!”
본능적으로 그녀는 몸을 굴려 피했다. 문을 등에 댄 그녀의 눈이 차갑게 공격자들을 바라보았다. 온통 검은 옷을 입고 얼굴까지 가린 누가 봐도 암살범 같은 남자들이었다. 드레스 차림의 그녀가 그렇게 날래게 피할 줄 몰랐는지 살짝 당황한 듯했다.
‘칼!’
달빛에 반사된 단도가 보였다.
‘미안해, 아셰.’
그녀는 다시 달려드는 남자들을 피해 다리에 달라붙은 드레스를 지익, 하고 찢으며 아까 그녀가 들어왔던 문에 몸을 부딪쳤다. 열리지 않았다. 밖에서 무슨 조치를 취한 것이 틀림없었다. 밖에도 동료가 있다는 얘기였다. 그녀는 급한 대로 한 남자를 걷어찼으나 역시 정제된 요원들인지 제대로 맞지 않았다.
“아악!”
도약하여 한 명의 목을 밟고 난간으로 뛰려고 했으나 다른 한 명에게 다리를 잡히고 말았다. 종아리 위로 칼이 번득이는 것을 본 그녀가 흠칫하여 주문을 외우고 말았다. 화르륵 붙는 작은 불에 놀란 괴한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젠장, 이 미친년, 마법 써!”
불 한 번 피웠다고 마력이 뚝 떨어진 것이 느껴졌다. 괜히 마법이 쇠퇴하고 있는 게 아니라고 조용히 욕을 중얼거리다가, 그녀는 한쪽 하이힐을 벗어 들었다. 아무리 전투 능력이 상당하다고 해도 이렇게 훈련한 성인 남성 두 명을 상대하기란 무리였다. 이판사판이라고 생각한 그녀가 흰 하이힐의 날카로운 굽으로 가까이 있던 남자의 얼굴을 찍어 내렸다. 피가 튀었다.
“얌전히 살려 주려고 했더니 이 개 같은 년이?”
얼굴에 기다란 상처가 난 그가 그녀의 목을 잡고 바닥으로 내리치려고 했다. 그녀는 상체가 제압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발을 차서 나머지 한 명의 얼굴을 신고 있던 하이힐로 긁었다. 죽이려면 꽤나 기회가 있었을 텐데 그들은 그녀를 제압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결국 붙잡힌 그녀가 버둥거리며 마력을 모으고 있는데 한 명이 그녀의 팔을 단단히 잡으며 눈짓했다.
“먼저 기절시켜, 그냥!”
“꺅!”
목 위로 떨어지는 육중한 힘을 느끼고 그녀는 간신히 급소를 피했으나 일단 지금은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라 그저 기절한 척을 했다. 뭘 하려나 알고 싶기도 하고, 약간의 틈이 생겼을 때 기습할 생각이었다. 칼날이 그녀의 허벅지를 거침없이 파고들었고 그녀는 이를 깨물며 간신히 비명을 참았다. 축 늘어져 있는 그녀의 허벅지에 기다랗게 상흔이 생겼다. 이젠 정말 끝났다는 듯이 그가 품속에서 유리병을 하나 꺼내 흘러내리는 피를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