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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27/256)

27화.

별 반전 없이, 리젠은 몇 번의 스텝을 다니엘에게 배운 이후로 아주 능숙하게 반복되는 스텝을 밟을 수 있게 되었다. 다니엘은 약간 당황하며 웃었다.

“이렇게 빨리 배울 줄 몰랐는데.”

“패턴이 있어서 별로 안 어려운데요. 이런 것보다 백배 어려운 무술 훈련도 예전에 얼마나 많이 했었는데요.”

그녀가 빙글 돌며 우아하게 스텝을 밟았다. 어쨌든 몸을 움직인다는 점에서 그녀에게 딱히 어렵지는 않았다. 저 멀리서 초록색 드레스의 아셰가 계속해서 한스팀 왕국의 왕자라는 지한과 춤을 추고 있었다. 리젠의 눈이 계속해서 주변을 살폈다. 테스티는 상석에 앉아 그 누구와도 춤을 추지 않으며 모든 무도회를 둘러보고 있었고, 그 옆의 루벤은 지루하다는 얼굴로 와인을 들이켜고 있었다.

“어…… 저기 저분은 누구세요?”

리젠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춤을 추고 있던 다니엘에게 물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간 다니엘이 상냥하게 대답했다.

“나람? 루벤의 부인이야. 결혼한 지 7년 정도 되었는데 아직 아이가 없어.”

“저분도 외국인이시겠네요, 원칙에 따르면.”

“어. 한스팀 왕국에서 루벤이 사막 여행하다가 직접 데려왔어. 나는 조금 더 강대국의 여자를 데려올 줄 알았는데, 심지어 저 여자는 왕녀도 아니야. 그래도 테스티가 별말 안 하더군.”

노래가 바뀌며 다니엘과 리젠의 몸이 더욱 더 밀착했다. 다니엘이 그녀의 손을 붙잡고 천천히 스텝을 밟았다. 리젠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완벽히 박자를 맞췄다.

“리젠. 신기해.”

“뭐가요?”

“넌 왜 다 잘해?”

“그러는 왕자님은요?”

“나는…… 왕족이라 어쩔 수 없는 거고. 아셰도 마찬가지잖아.”

저 멀리 아셰가 이제 다른 남자와 함께 춤을 추고 있었는데, 리젠은 그녀의 얼굴이 그렇게 예쁘게 웃을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항상 그녀의 앞에서는 꺄르르륵 대며 숨이 넘어가게 웃거나 푼수같이 키득댔기 때문이었다. 살짝 걸린 미소가 그렇게 우아할 수 없었다.

“아셰는 아마 네게…… 편한 모습을 보여 준 거겠지.”

“아.”

“나는 아직 안 보여 줬고.”

“……그런가요?”

“그런데…….”

다니엘의 푸른 눈이 그녀를 가득 담았다. 그의 미소년 같은 얼굴에 아셰처럼 우아한 미소가 걸렸다.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달콤하게 울렸다.

“그런데 왜 아셰가 리젠을 편하게 대했는지는 알 것 같아.”

“네?”

“그동안은 생각하지 않았는데…… 나도 어떤 여자랑 함께 있어야 편안한지 좀 알아볼까 싶기도 하고.”

리젠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 사실 이런 시간을 아주 오랫동안 바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열일곱에 그를 다시 만난 그 순간부터 다니엘을 좋아했다. 몇 번이고 그의 이름을 자신도 모르게 끄적이고 있었다. 그가 농구라도 할 때면 필사적으로 그의 움직임을 시선으로 좇았다. 그뿐인가, 손 한 번이라도 잡아 보고 싶어 꿈 연결 시약까지 만들었다.

“오늘 밤 여기 있는 수많은 여자들과 춤을 춰야겠지만…….”

다니엘과 이렇게 단둘이, 이렇게 밀착하여 이런 달콤한 대화를 주고받는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아마 지금이 가장 마음 편한 춤이겠지…….”

거짓말같이 그때 음악이 끝났다. 리젠과 다니엘이 살짝 떨어져 숨을 고르는 동안, 푸른 드레스를 입은 붉은 머리의 아름다운 귀족 영애가 다가왔다.

“다니엘 왕자님.”

다니엘은 리젠에게 지어 주던 자상한 미소를 띠고 돌아보았다.

“왕자님과 춤을 추고 싶어 하는 영애들이 많습니다. 기회를 주시는 것이 어떨지…….”

“아, 그렇군요.”

다니엘의 부드럽지만 살짝 망설이는 대답을 듣고 리젠이 눈치껏 끼어들었다.

“예, 왕자님. 저는 조금 지칩니다. 쉬고 있을게요.”

“그럴래? 조금만 숨 좀 돌리고 있어. 곧 갈게.”

리젠은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테이블로 향했다. 다니엘은 지금 지지 기반이 모두 윌리엄에게서 온 것이라 많은 귀족들의 힘을 얻어야 했다. 이런 사교계 자리에서 많은 영애들과 접하는 것도 정치적인 행동 중 하나였다. 모두 이해하고 또 응당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으므로 그녀는 별로 마음 상할 것도 없이 원래 있던 테이블에 앉았다. 달콤한 마카롱을 하나 집어 먹으며 그녀는 지금쯤 카이든은 대체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인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응시하는 시선이 있었다. 테스티는 호위 무사에게 손짓하여 속삭였다.

“저 여자야. 다니엘과 연속으로 세 번 춤을 춘 저 여자애.”

“아셰 왕녀님과 함께 온, 갈색 머리의 여자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아. 저 여자를 볼 때 다니엘의 표정이 완전히 달랐다.”

테스티가 도도하게 어깨를 폈다.

“젊은 남자들은 참 감정을 못 숨겨.”

“저 여자가 리젠 하카트입니다. 르엘라 하카트의 조카이고요.”

“일이 그렇게 되는군.”

“……일단 오늘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언제 그런 은밀한 대화를 했냐는 듯, 호위 무사는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고 테스티는 인자한 표정으로 무도회 전반을 다시 응시하기 시작했다.

리젠은 혼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녀는 귀족들과 별다른 연결점이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귀족이었다고는 들었지만 그다지 이런 곳에 올 정도로 권력이 있는 집안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래도 외국인들이나 한껏 꾸민 사람들을 보는 재미가 있어 지루하지는 않았다.

아셰는 다니엘을 단단히 유혹해 보라고 했으나 그녀는 딱히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도 몰라 그저 춤만 추고 와 버렸다. 아셰가 분명히 작은 농담에도 예쁘게 웃어 주고 자꾸 치켜세워 주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런 조언들이 이제야 생각이 났다. 생각해 보니 춤도 못 추는 척하면서 질질 끌고 있으라고 한 것 같기도 했다. 그녀가 약간 씁쓸한 마음에 와인을 마시고 있는데 순간 불길한 기운이 덮쳐 왔다.

“이런.”

그녀는 본능에 따라 몸을 재빨리 살짝 비껴서 일어났고, 그녀의 어깨에 보라색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

“어머, 죄송해요.”

모르는 여자였다. 리젠의 차가운 갈색 눈이 갑자기 나타난 은빛 드레스의 귀족 영애를 노려보았다.

“손이 미끄러져서. 큰일 날 뻔했네요.”

리젠은 그녀의 의자 밑으로 떨어지고 있는 액체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녀가 운동신경이 뛰어나 잽싸게 비켜서 그렇지, 정말 와인에 홀딱 젖을 뻔했다, 리젠은 어이가 없어 그 영애를 가는 눈으로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상에, 왕립고등학교 학생일 때에도 이런 식의 괴롭힘은 찾아본 적도 없었다! 귀족이라면서 유치하기는.

“예의가 없으시네. 사람이 사과를 하는데.”

은색 드레스의 영애 뒤에 있던 주근깨를 화장으로 가린 여자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비꼬기 시작했다.

“역시 출신은 못 속인다고, 산하기관 직원답네.”

“진짜 아메탄 왕국은 너무 너그럽다니까. 한낱 왕궁의 산하기관 직원까지도 무도회에 출입 가능하게 해 놓고 말이야.”

“산하기관 애들이 그래서 기고만장하잖아. 맨날 객관성이랑 전문성 운운하면서 왕족들 말도 잘 안 듣는대. 미친 거 아니야?”

“그러니까, 자기들 월급 주는 게 누군데?”

“뭐, 그래서 이렇게 귀족들한테도 분수 모르고 까부나 보지. 야, 눈 희번덕거리지 마. 산하기관 직원들 신분 상승한 건 고작해야 100년이야. 귀족의 역사는 2,000년이 넘었고.”

논쟁에 참여하기 시작한 귀족 영애들이 모여들어 한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 리젠은 이래서 약제국 직원들이 하나같이 무도회에 관심이 없었구나 싶었다. 왕국의 산하기관은 신분과 관계없이 우수한 성적을 가진 학생들이 들어올 수 있었고, 실질적인 왕국 업무를 담당한다고 하여 귀족에 준하는 대우를 한다고 법에 정해져 있었다. 정치는 귀족들이 하는 것이지만, 전문적으로 나라 굴러가는 일은 산하기관에서 주관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법일 뿐이고 여전히 귀족들의 입맛에는 맞지 않는 듯했다.

“네가…… 감히 학교 좀 같이 다녔다고 왕자님을 넘봐?”

은색 드레스의 영애가 피식 웃으며 눈을 부라렸다. 리젠은 설마설마했던 짐작이 맞아떨어지자 유치하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해서 피식 웃어 버렸다. 그녀가 전혀 수치스러워하지도 않고 도리어 어이없다는 듯한 반응을 보이자 귀족 영애들의 무리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 시건방진 계집애가…….”

리젠은 아무 표정의 변화 없이 와인 잔을 들었다.

“미안하지만 제가 이런 싸움을 하기에는 좀 바쁘네요.”

그녀의 목소리는 정말로 지금의 상황이 귀찮은 말투였다.

“제가 바락바락 대들어서 좋은 구경거리를 만들어 드리거나, 눈물로 잘못했다고 호소하여 마음을 풀어 드리기엔 제 인생도 충분히 피곤해서요. 영애들께서는 내일 볕 좋은 정원에서 삼삼오오 모여서 이런 얘기를 하셔도 시간이 남아도시겠지만, 저는 당장 오늘 밤에 이만큼 두꺼운 책을 보면서 연구를 해야 하거든요?”

그녀가 들고 있던 와인 잔의 와인을 자신의 손에 줄줄 따라 내었다. 그녀의 왼손에 붉은 와인이 뚝뚝 떨어졌다.

“이 정도로 마무리하죠. 빌린 옷이라 옷을 망칠 수는 없고, 손 정도는 씻으면 되니 양보해 드릴 수 있어요. 충분히 굴욕적인 것 같은데 이 정도로 타협할까요?”

영애들이 질렸다는 얼굴로 그녀의 손에서 테이블로 흐르고 있는 와인 방울들을 바라보았다. 하나둘 자리를 뜨는 와중에 은색 드레스의 영애만이 남아 그녀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내가 왕비가 되면…….”

그녀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리며 천천히 손을 올렸다,

“산하기관부터 손보겠어. 약제국은 첫 번째로 폐쇄하고 말 거야.”

은색 드레스의 영애가 리젠의 뺨을 치기라도 하면, 리젠은 그 전에 팔목을 잡아 비틀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손이 제대로 다 올라가기도 전에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세상에. 네가 왕비가 될 것 같으면 어떻게든 다니엘에게 정신 차리라고 욕해야겠네?”

어느새 다가온 아셰가 팔짱을 끼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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